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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비다 처럼 (행 9: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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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은 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선을 행하는 자는 잘 되어야 하고 악한 자는 망해야 한다는 소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세상인지 악을 행하는 자가 오히려 더 잘되고 선하게 착하게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반대로 더 힘들게 어렵게만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선을 행한다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를 이리저리 다니며, 두루 살피고, 생각해 보아라. 성의 광장을 모두 뒤져, 정직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아라.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아라. 너희가 찾을 수 있다면 내가 이 성을 용서해 주겠다.”고 예레미야서 5장 1절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믿음 안에서 참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정직한 일을 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그토록 찾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런 사람이 잘 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를 못하기에 우리가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는 다비다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여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볼 때 과연 가치 있게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먼저 다비다에 대해서 먼저 살펴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는 도르가라고도 부른다고 했습니다. 다비다는 사슴 또는 눈이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아람 말이고 같은 뜻의 그리스 말이 도르가입니다. 이 여인을 가리켜서 누가는 당당히 여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비다는 여제자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도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여제자라는 칭호를 다비다에게 붙여서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또한 보통으로 불리는 여인의 이름 다비다와 함께 그리스 말로는 도르가라고 친절하게 소개할 정도로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준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우선은 여제자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저의 믿음입니다. 제자라면 당연히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배운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흔히 예수를 믿어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제자라고 할 때는 단순히 나 하나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끌어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제자라고 불릴 정도로 다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성도들 앞에 아름다운 본을 보이는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비다는 이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그 남편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볼 때 다비다는 과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녀가 돌본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른 과부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과부만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과부가 되어서도 여전히 가진 것이 좀 있다면 그래도 낫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정말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바로 과부입니다. 거기다가 자칫하면 사람들로부터 남편을 잡아먹은 사람이라고 하는 욕설까지 듣기 십상이었으니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너희가 힘써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라고 하였고 마땅히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접대하기에 힘쓰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비다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 여인을 가리켜 언제나 착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썼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비다는 겉치레로 이런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돈 좀 있다 싶으면 거들먹거리면서 우세를 떨기에 그가 살아있을 때는 그 앞에 굽실거리지만 죽고 나면 뒤돌아서서 욕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다비다가 행했던 언제나 착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썼던 것은 결코 겉치레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죽은 뒤에 베드로를 청해 왔을 때 다비다와 함께 지냈던 과부들의 태도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비다는 과부들을 불러 함께 지냈을 뿐 아니라 직접 속옷과 겉옷을 지어 입혔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홀로 되어 외롭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누구도 돌보는 이들이 없는 과부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마음씨기 다비다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를 섬겨야 할지를 볼 줄 알았던 여인이었기에 그 이름처럼 정말 눈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진실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요 이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언제나 착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썼던 것이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돌보아 줄 이 하나 없는 과부들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다비다는 이 과부들을 불러 자기 집에 함께 머물도록 하였고 친히 그녀들을 위해 겉옷과 속옷을 만들어서 입힐 정도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런 그녀의 삶이 참으로 진실이었음을 베드로를 청하여 울며 간청하는 과부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녀가 죽은 다음에 마침 베드로 사도가 욥바에 가까운 룻다라는 곳에 와서 애니아라는 중풍병자를 고쳐주고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청하였고 이에 베드로가 즉시 일어나 그 심부름꾼들과 함께 달려올 정도로 다비다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던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바로 이래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보다 죽고 난 다음에 더 사람들이 안타까워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언제나 착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쓸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다 감동시킬 수 있는 바로 그런 사람으로 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 주님의 말씀처럼 선한 일에 힘쓰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비다는 왜 병에 걸려 죽어야만 했는지요?

흔히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합니다. 특히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섬기며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만사형통하여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존경받는 여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 언제나 착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썼던 사람이었던 다비다가 병에 걸려 죽게 된 이 일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가 그토록 언제나 착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썼다면 병에 걸리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단순한 병이 아니라 죽을 정도의 병에 걸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큰 병에 걸린다고 할 때 보통은 그 사람에게 이렇듯 벌 받을 만한 무슨 숨겨진 죄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병을 은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형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다비다가 병에 들어 죽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내세울만한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 애니아라는 사람도 고침을 받는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네 삶에 질병과 같은 어떤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못된 짓만 골라가며 사는 사람이 아닌 믿음 안에서 진실 되게 살고자 힘쓰는 사람,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참된 믿음의 사람에게도 이런 어두움의 그늘이 드려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함부로 그 사람을 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욥이 어느 날 갑자기 재산을 다 도적맞고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돌풍에 무너져 내린 집에 다 깔려죽고 그 몸에는 중병이 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 찾아온 친구들이 욥을 책망하지 않습니까? 네게 숨겨진 죄가 있지를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욥에게 당한 고난이 결코 이런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시련들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거기에 반응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은혜로 바뀔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은 우리 앞에 있는 고난과 질고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권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을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움을 가지고 중보하고 축복하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비다가 병에 걸려 죽었을 때 그녀에게는 바로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는 이런 주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베드로를 청함으로 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우리를 시험하는 그 어떤 일로 인해서도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죄로 인해서건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 인해서건 간에 그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을 간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모습인 것이요 또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시 기억할 것은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죽을병으로 대변되는 이런 시련과 아픔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르게 살려고 하고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생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이런 부정적인 면을 보기보다는 그것을 은혜와 선으로 바꾸어나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를 찾아 빨리 오라고 청하였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은혜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심부름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돌아보며 룻다까지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애니아는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고쳐 주실 거요.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애니아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머물고 있는 동안, 다비다가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다비다의 시신을 씻어 다락방에 두었습니다.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욥바에 사는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어 속히 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욥바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과부들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 만든 여러 옷가지들을 베드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신을 향해 몸을 돌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비다가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더니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비다가 죽었을 때 아주 가까운 룻다에 베드로가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단순히 베드로가 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중풍에 걸려 팔년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지내던 사람 애니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준 일이 있었기에 다비다가 죽었을 때 욥바에 사는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와달라고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시련의 때에 또한 은혜의 자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나 겪는 시험 이외에 여러분에게 닥칠 시험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시험을 견디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주십니다.”라고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다비다에게 일어날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는 예비하고 계셨던 것이요 이를 위해서 베드로를 룻다에 보내셔서 애니아를 고치시고 그곳에 머물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는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요 우리들에게 닥친 시련의 날들에 이 피할 길을 찾아 주의 종을 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의 청을 듣고 욥바 다비다의 집에 왔을 때 울며 간청하는 과부들을 보면서 그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래 베드로는 사람들을 모두 내어 보낸 뒤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슨 기도를 했겠습니까? 아니 기도하는 베드로의 마음은 또한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먼저 베드로는 이 울며 간청하는 과부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부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라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감히 하나님 앞에 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게 하여 주시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 과부들의 안타까움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열어 달라고 지금 간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 엘리사를 통해서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을 베드로는 바라봅니다. 그 역사를 간절히 구하는 중에 그때 베드로의 마음에 강한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신을 향해 몸을 돌려 “다비다여, 일어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비다가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더니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소식이 욥바 전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결국 다비다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며 절망이 변하여 새로운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살아가며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앞에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를 주의 종에게 알려 함께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함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비다의 죽음을 다시 살아남으로 바꾸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 앞의 질병과 죽음과 같은 역사도 바꾸어 참된 기쁨과 행복된 삶으로 바꾸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욥바에서 일어난 이 일이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나의 일, 우리의 일이라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앞에 그 어떤 시련이 있다고 해도 그 어떤 아픔이 있다고 해도 그 어떤 질병과 고통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마음을 같이 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주의 종과 함께 하나님 앞에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들 앞에도 펼쳐져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귀한 날들이 이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고 교회에 닥쳐온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밖으로 모든 성도들이 흩어질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절망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광야를 통해 내려가는 길에서 큰 역사를 일으키게 되고 흩어진 무리들이 가는 곳마다 다시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게 되자 사울이 다시금 다마스쿠스까지 오게 됩니다. 물론 목적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핍박의 대명사 사울을 복음의 앞잡이로 바꾸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날로 힘을 얻는 교회들을 베드로로 하여금 돌아보게 하사 룻다까지 오게 하시고 애니아를 고치시더니 다비다가 죽었을 때 그곳으로 청함을 받아 달려가 다시금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역사의 도구로 사용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욥바에 머물다가 다시금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청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으로 하여 땅 끝까지 이르도록 펼쳐지는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역사가 급물살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 속에 반드시 고난과 시련의 날들이 함께 섞여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님의 섭리를 이어나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를 시험하는 그 어떤 일로 인해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원인이 죄로 말미암았건 아니면 또 다른 섭리이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저와 여러분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조금의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시련이 있습니까? 질병이 있습니까? 죽음이 있습니까? 여기에 매이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일이든지 우리가 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역사하심이 우리들의 삶에 펼쳐질 수 있기를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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