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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제자공동체입니다 (막 3: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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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의 반기문외교통상부장관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UN 유엔총장에 당선될 것이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4차에 걸친 예비투표를 통해서 줄곧 일위를 차지하면서 결국 단독후보로 추천되었다고 합니다. 4차투표에서는 상임이사국 5개국의 찬성과 비상임이사국 10개국 중에서 한나라가 기권하여 14명이 찬성하였고 1나라가 기권표를 던져서 결국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유엔사무총장이 되면 국제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교도보가 마련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언론지에서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같이 이번 일을 기적이라고 할정도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분열되어 있는 나라이고 이념 갈등이 있고 많은 불안 요소가 있는 나라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후보인 반 장관이 많은 나라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그가 좋은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느날 한번 표심을 잡기 위해서 노력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꾸준한 평상의 삶에서 그의 인격과 삶과 능력이 표심을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능력과 삶이 잘 구비되고 준비되어졌을 때에 얼마나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한 사람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가 이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준비하고 갖추어야 할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오늘 이 세상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과연 나는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입니까? 나는 얼마나 쓰임받고 있습니까?

오래전 영국의 한 괴짜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회를 가진 일이 있었습니다.
매우 많은 친구들과 관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매우 많은 친구들과 관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몇곡의 연주가 끝나자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다음순간 그는 자기가 연주하던 바이올린을 갑자기 집어 던지더니 발로 밟기 시작했습니다. 파격적인 행동 앞에 관객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또하나의 바이올린을 가져오자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방금 전 그가 연주한 바이올린은 사실 그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이 아닌 20파운드짜리 싸구리였습니다. 그러니 너무 아까와하지 마십시오. 이제 최고의 바이올린으로 본격적인 연주를 하겠습니다. “ 그 연주 역시 큰 감동을 주었고 관객들은 큰 감동의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솔직히 말해 20파운드 짜리 바이올린 연주나 비싼 바이올린의 연주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괴짜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런 행동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악기가 반드시 위대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바로 위대한 음악가가 위대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가장 집중한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람을 먼저 준비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그가 쓰실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선택한 12명의 제자가 소개됩니다. 왜 더 뽑지 12명만 선택하셨을까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12지파를 세우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12지파와 12명은 바로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이세상에서 교회를 통해서 가장 원하시는 뜻은 바로 제자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불렀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 삼으시기 원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1. 주님의 제자는 주권적인 부르심을 통해서 선택되었습니다.

13-1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여기 12명의 선택은 주님의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다는 것은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여 부르신 12명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때에는 그 기준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16절부터 19절에 소개되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 사람인 시몬, 가롯유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별볼일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어부의 직업은 평범한 직업이었고 세리와 같은 직업은 천대를 받던 12명의 이름이 오늘 본문에 소개됩니다.
이들이 예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12명의 제자라고 하였을 때 세상사람들의 안목에서는 “수준이하의 작품”일 수 있습니다. 가능성과 기대을 걸기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이들은 만들어져갔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인격으로 다음어져갔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약한 자들,세상적으로 미련한 자들을 불렀을까요?
고전3: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주님은 약한 사람들,미련한 사람들을 불러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제자로 훈련시키시고 변화시켰습니다.

여기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그의 본명은 시몬이고 베드로는 별명입니다. 베드로의 뜻은 반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석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그의 성격을 보면 그는 전형적인 다혈질의 사람으로서 다혈질의 단점인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럽고 인내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혀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이란 사람을 변화시켜서 반석처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기초가 이루어졌습니다. 불안정하고 문제있는 사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동역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함께 사역하던 핵심 제자가 바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보아너게’입니다. ‘보아너게’란 일반적으로 ‘우뢰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천둥의 아들 우레의 아들이란 말을 들을때 어떤 느낌이 옵니까?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뢰의 아들‘이란 부정적으로 사물을 파괴시키는 벼락을 떠올립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성격이 벼락같았다는 것입니다. 원색적인 한국 말로는 정말 ’지랄같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9장 54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 위하여 사마리아라는 마을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 마을로 들어오지 마시오’ 하고 좇아냈습니다.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열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합니다. “주님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부름받은 제자들을 보면 성격적으로 인격적으로 삶 속에 문제가 많았던 약점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 훈련되어졌을때에 그들을 통하여 하늘의 메시지가 증거하는 변화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선택하여 제자삼은 사람은 비록 하루아침에 완전히 변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교회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약점과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약점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 앞에 나의 약점과 부족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에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베드로의 경우처럼 그 약점과 결점이 3년의 훈련 속에서 또 나타낫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그 결점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를 미쁘신 주님께서 결국은 신실한 제자로 만들어 완성케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결점과 약점으로 넘어질때마다 나를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 다시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제자의 길을 가는 자들의 결점과 약점을 바라볼때에 비로 연약하고 약하고 넘어질지라도 서로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부르심 속에 주님의 제자되엇다면 결국 마침내 멋있게 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임받는 곳에 자신을 드리시고 귀하게 쓰임받는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한 목적은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친히 공생애의 삶을 사실때에 홀로 계시지 않고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셔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과 함께 게시면서 대화도 나누시고 저들과 함께 음식도 나누시고 저들과 함께 잠을 주무시기도 하면서 동거동락을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이 혼자 계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를 소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러분 항상 함께 할때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3년동안 항상 그 제자들과 함께 햇듯이 오늘 우리와 함깨 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그 함께 하심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바람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도 우리 주님처럼 반복적인 매일의 함깨 하심의 체험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로 세워져가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일상의 삶이 날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매일의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부름받은 주님의 제자들이 매일 항상 주님을 여기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우리는 먼저 지금 여기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향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이 음성을 주님의 음성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소홀히하거나 거역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만약에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주님의 음성으로 듣겨지지 않고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병든 주님의 제자일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먼저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사모하고 항상 그 말씀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3년의 공생애 사역을 보게 되면 많은 시간들이 말씀의 시간을 갖았습니다.
그 말씀의 시간을 갖으면서 주님의 제자들도 함께 하면서 그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말씀들이 먼저 주님의 제자들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주신 말씀들입니다. 주님이 그 말씀들을 오늘 우리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주실 때 그 말씀을 믿음으로 주님의 음성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가을에 먼저 저와 여러분들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보통 사람들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많은 독서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먼저 주님의 말씀을 먼저 가까이 하시고 주님을 더욱 체험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과 만나고 함께 하는 말씀의 시간을 갖되 일정한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꾸준히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경우에는 새벽기도 시간 전이나 새벽기도 시간 후에 갖습니다. 요즘은 로마서를 통한 새벽의 말씀을 받고 하루를 살아가는 주님의 뜻으로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그 말씀외에는 주님과 교제를 위해서 시편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과 교제합니다.
다음 주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깨하면서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혼자 기도하시기도 했지만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기도하실때에 물론 제자들은 함께 했지만 기도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에 실패한 제자들을 더 이상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제자로 함께 하면서 끝까지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제자삼으셨습니다. 결국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기도의 본을 보이시면서 주님이 이끌던 그 제자들이 기도의 제자로 승리했습니다.

먼저 원하는 것은 좀 우리들 중에 내가 먼저 은혜받고 또 기도의 체험이 있어서 먼저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주님의 제자로서 기도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그분들이 아직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아직 기도에 실패하고 있지만 진정 주님의 제자라면 기도의 승리자로 기도의 제자로 나아가게 될줄 믿습니다.

또 바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주님의 제자로서 내가 기도에 아직 실패하고 있습니까?
그 실패로 인해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도우시고 붙들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기도의 회복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균형있는 영성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주님은 동일한 적용을 소원하십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복을 경험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3. 전도하시기 위하여 제자삼으셨습니다.

14절 하반절과 15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함께 하시고 훈련하신 후에 목적으로 삼으신 것은 바로 전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결국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기도하고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세상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바로 전도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이땅에 오셨던 주님께서 가장 안타까와했던 부분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10장 2절에 말씀하십니다.“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나 지금 시대나 우리 주님은 추수할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를 불러 주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 삼으신 목적 중에 하나가 바로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조건 전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도의 능력을 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좇는 권세를 주셔서 제자들이 전도할 때 귀신이 물러가고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밞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습니다. 주님이 이미 주신 능력에 의지하여 전도자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전도를 강조하시고 전도 사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 그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전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전도를 지상명령으로 분부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불러서 제자삼으신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님의 마지막 소원 마지막 희망은 바로 전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온통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지 전도에 관한 말씀들이 중요내용입니다. 복음은 한마디로 말을 하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즉 복음은 어떻게 죄인이 구원받는가에 대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기독교에 가장 핵심 기독교에 가장 축복이 바로 이 구원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시고 제자삼으셔서 이 구원의 복음을 맡기시면서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요즘 교회는 외적으로 과거에 비해 얼마나 눈부신 발전을 했습니까?
요즘 교회당건물들은 과거보다 얼마나 좋은 재료와 아름다운 디자인 멋진 모습으로 지어지고 있습니까? 요즘 교회 마다 과거에 볼 수 없는 인터넷과 영상기재로 얼마나 멋지고 세련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또 교회들마다 풍부한 세미나와 다양한 문화행사와 볼거리들이 개발되어 다양한 욕구들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과거보다 더 많은 지식과 좋은 교육방법들을 통하여 교회마다 교회교육이 되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 발전되고 성장되어가고 있는데 문제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얼마나 더 세워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좋은 건물이 사람을 더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좋은 인터넷과 영상기자재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지식들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증거하고 헌신하는 복음의 제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특별히 2006년 이제 가을이 되어 우리가 한해를 보내면서 이 가을에 주님의 제자된 우리가 집중하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개인적으로 교회 속에 전도를 위해서 애쓰고 힘쓰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볼때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주에는 거리에 나가서 찬양을 하면서 지나가는 택시와 행인들을 중심으로 전도지와 요구르트와 전도용 소금을 나눠주면서 전도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참여하여 헌신하시는 분들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열린모임으로 전도학교에서 또 개인적으로 전도를 위해 애쓰는 분들을 보면 주님의 제자로서 사명감을 갖고 열정을 갖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의 일이 특별한 그리스도인들 소수만이 해야 할 사역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모든 교회 속에 직분자들이 먼저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주님의 제자로서 전도에 대한 명령을 실천할 때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전도는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된 우리의 필수요 사명이요 목적입니다. 여러분 한번 같이 고백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나의 사명이다” “전도는 나의 필수다”.

나가는 말 )))) 2차 대전이 끝났을때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라는 도시의한 교회에 마을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이유는 그 교회 마당에 있는 예수님 상때문이었습니다. 폭격을 맞아서 하필이면 예수님의 두팔만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떨어진 두팔만 복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아예 다시 만들 것인가를 두고 토의하는 중에 누군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폭격맞아서 두팔이 없는 그대로 놔두도록 합시다.그리고 그 안에 우리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써넣읍시다. 예수님은 당신과 나의 팔을 필요로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과 나의 팔을 필요로 하십니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자 하십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찾아가셔서 안수하시고 치유하시는 그 주님의 손이 내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들고 계시는 그 주님의 손이 바로 나의 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손이 주님의 손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손이 능력의 손 복음의 손이 되어지는 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 목적을 위해서 열두제자를 불러 세우셧습니다. 동일한 목적으로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 제자 삼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제자로서 그 사명을 위해 귀하게 드려지시는 은혜와 삶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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