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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가 ‘찌라도’로 바꾸어진 이야기 (합 1:1-3, 합 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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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할 자격이 없는 저에게 설교자의 특권과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 아침에도 설교를 시작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설교하는 저와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난 주 어느 날 새벽기도를 인도하기 위해서 제 자리에 앉아서 잠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찌하여’ 라는 단어와 ‘찌라도’ 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하박국 1장에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강한 의문을 토로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하박국이 하박국 3장에서는 '없을찌라도’ '없을찌라도’ '없을찌라도’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해서 '어찌하여'가 '찌라도'로 바뀌어졌습니까? 어떻게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까? 오늘 아침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선지자 하박국은 합 1장에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세 번이나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강한 의문과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이 세상에 불의한 일, 불공평한 일, 포악한 일,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며 세상과 하나님을 향해 의문과 불만과 원망을 토로할 수가 있습니다.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찬성하는 안을 가결하자 주기철 목사님은 아마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슬퍼하며 한국 교회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로 변했을 때 부산에 내려가서 기도하던 박윤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도 아마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울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1948년 10월 21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으로 사랑하는 두 아들이 공산 폭도에 의해 총살을 당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도 아마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통곡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 극치의 의문과 항의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부르짖어졌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선지자 하박국도 어떤 의미에서 메시야적 의문과 항의의 부르짖음을 토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선지자 하박국이 왜 세 번씩이나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부르짖었는지 그 원인과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합1:3에 기록되어 있는 '어찌하여'의 원인과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계에 죄악이 만연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계에 간악과 패역과 겁탈과 강포와 변론과 분쟁과 불의가 만연함을 보고 선지자 하박국은 속이 타서 견딜 수가 없어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합1:12에 기록되어 있는 '어찌하여'의 원인과 상황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무섭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그 발은 표범보다 빠르고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합1:6-8). 이와 같은 무서운 심판 선언의 말씀을 듣고 하박국은 너무 속이 상해서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십니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합1:14에 기록되어 있는 '어찌하여'의 원인과 상황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바다의 어족처럼 산과 들의 곤충처럼 그렇게 무참히 짓밟아 죽이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주께서 '어찌하여' [이스라엘]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라고 부르짖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이스라엘의 범죄상을 바라보고 슬퍼하며 부르짖었고, 포악한 갈대아 사람들이 처 들어올 것을 바라보고 슬퍼하며 부르짖었고, 이스라엘이 바다의 어족처럼 무참히 짓밟힐 것을 바라보고 슬퍼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세 번이나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강한 의문과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둘째,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처절하게 부르짖던 선지자 하박국이 그 답을 얻기 위해 성루에 올라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모든 의문과 불만과 원망과 절망과 탄식을 안고서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파수군의 사명을 다 하기로 다짐하며 성루에 올라서서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습니다. 한 나라가 영적이고 도덕적이고 군사적인 위기와 재난에 처했을 때 그 궁극적인 해결은 정치나 경제나 군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궁극적인 해결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결국 선지자 하박국은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처절하게 부르짖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2:1). 얼마나 지혜로운 신앙의 자세요 겸손의 자세인지 모릅니다. 너무 쉽게 자포자기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너무 성급하게 아우성치며 길 거리로 나서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처럼 한경직 목사님처럼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고요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겸손하고 가장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고요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성루에 올라서서 무릎을 꿇고 고요히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2,3). 하나님께서 탄식하는 하박국에게 들려주신 응답의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정한 때'에 즉 '종말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어둡게 보이지만 심판의 과정을 거친 다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즉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구원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70년 후가 될 수도 있고 700년 후가 될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구원의 뜻이 정한 때에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거의 모든 선지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관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박국에게 주신 말씀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이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700여 년 후에 사도 바울이 외친 말씀이었고 그후 다시 1500여 년 후에는 마르틴 루터가 외친 말씀이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붙잡혀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종말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 하박국은 이제는 절망적인 현실에 붙잡혀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종말의 때를 바라보는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박국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외치면서 초연하게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박국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없을찌라도’ ‘없을찌라도’ ‘없을찌라도’ 라고 고백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합3:2). 인간의 타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하박국은 놀라움과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이제는 조급하게 좌절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길거리로 나서지도 않고 조용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를 간절하고 겸손하게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놀라운 역설적인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에 의해 좌우됨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을찌라도,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을찌라도,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한글 성경에는 '없을찌라도’라는 말이 한번 나오지만 NIV 영어 성경에는 'though' 'though' 'though' 라는 즉 '찌라도'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것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들만이 토해내는 역설적인 신앙의 고백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비슷한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합3:17,18의 고백과 단3:17,18의 고백은 같은 내용의 '찌라도'의 고백이었습니다. 사실 참된 신앙은 없을 때에 안될 때에 고백하는 '찌라도'의 신앙입니다. 가진 것이 없고 뜻대로 안될 때에 고백하는 '찌라도'의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찌라도'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에 넘치게 되고 그리고 용기와 힘에 넘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9).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고 앞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오늘과 내일을 사는 나의 삶에 무서운 용기와 열정을 지니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조용하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모험적으로 살게 됩니다. 사슴과 같이 멀리 그리고 높이 뛰게 만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선지자 하박국이 살던 시대와 비슷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 정치계는 물론 종교계에도 불의와 부정과 부패와 포악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을 돌아보든지 가정의 삶을 돌아보든지 사회의 삶을 돌아보든지 남한과 북한의 삶을 돌아볼 때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는 탄식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자포자기하여 주저 앉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길거리로 나가서 성급한 분노를 발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선지자 하박국처럼 조용히 성루에 올라서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개인이나 나라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해결이 정치나 경제나 군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선지자 하박국처럼 이렇게 고백하여야 할 줄 압니다.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6.25 전쟁의 혼란과 폐허 위에서도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은 성급하게 서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서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너무 성급합니다. 우리들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듯이 덤빕니다. 성루에 조용히 올라서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실지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1-2).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리라"(사61:1-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2,3).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조급하고 성급한 우리 한국 사람들의 기질에 맞지 않는 불만스러운 말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고 불가해하고 종말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저는 역설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을 고백했던 선지자 하박국을 존경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을찌라도,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을찌라도,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9). 저는 역설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을 고백했던 사도 바울을 존경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저는 선지자 하박국의 역설적인 신앙을 체 받아 살았던 터툴리안과 어거스틴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저는 늦게 서야 불합리하고 역설적인 하나님 바라봄의 신앙을 조금씩 배우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 바라봄에서 그리고 종말적인 신앙에서 해결됩니다. 그러면 기쁨과 용기를 지니고 달려가게 됩니다. 그곳이 로마의 감옥이든지 6.25 전쟁의 폐허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새벽마다 그 분의 음성을 새롭게 들으며 얼마나 큰 감동과 감격을 누리는지 모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9). 선지자 하박국에게 주셨던 은혜를 우리들 모두에게 조금씩 조금씩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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