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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마음 (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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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신비로움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진 것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통적으로 옛날 사람들은 마음이 가슴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이 처음 주장하여 지배했던 사상입니다. 그런데 실제 마음이 가슴에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의사들이 방사선 사진을 찍고, 가슴을 해부해도 마음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심장은 마음을 상징하는 장기일 뿐, 마음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뇌에 있을 것이라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로마시대의 의사 갤런이 플라톤의 이론을 뒤엎은 주장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뇌가 지각하여 전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머리를 만지면서 “요즘 마음이 아파서 괴롭다!”고 말하면 왠지 어색합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에서는 마음을 유전세포의 조직에 있다고 말하고, 또한 인간생명의 기운으로 보는 견해도 생겼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마음의 위치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도대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 몸 속에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 마음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기쁘고, 마음을 알고 싶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느끼고, 기뻐하시고, 보여주십니다. 과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려준 곳이 바로 본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첫째,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탕자의 비유만큼 많이 알고 듣는 말씀이 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내용을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탕자의 비유는 3가지의 관점에서 늘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집을 나간 둘째아들인 탕자의 관점과 집을 지킨 맏아들의 관점, 그리고 이 두 아들을 대하시는 아버지의 관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 속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집중적으로 알려주는 부분이 본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아버지는 기다립니다. 무작정, 한없이 기다립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갖고 기다립니다. 지금 아버지가 기다리는 것은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보통 아들이 아니라 ‘탕자’입니다. 아버지를 아프게 하고, 실망시킨 아들입니다. 이런 탕자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찬송가 317장에 보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가사가 나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 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 오기기만 밤새 기다리신 다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내가 잘못하고 죄를 짓는데도 하나님의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서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굉장히 무서운 분인데 마치 없으신 것처럼, 죽으신 것처럼 잠잠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렵다가도 반응이 없으니까, 이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푹 빠질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죄를 짓는데도 가만히 계실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과 이름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잘못이 공개되면 사람만 창피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욕을 먹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하려는 의도로 잠잠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잠잠하신 이유는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는 힘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 범죄에 대해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잠하신 것은 나의 잘못보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힘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해 부모가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지금도 쉬지 않고 주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기 전에 먼저 기도를 듣습니다. 나의 죄를 대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어 때론 잠잠하시고, 넘어가십니다. 참으로 의인의 기도는 역사 하는 힘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생애에 많은 부분에서 누군가의 큰 덕을 보고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에 대한 잠잠하시는 마지막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다듬어 가십니다. 아버지는 탕자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기다리십니다. 만약 나의 범죄 하는 것마다 기다리지 않고 징계하신다면, 우리가운데 하나님 앞에 설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없이, 애타게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탕자와 같이 잘못하고, 범죄하고, 실망시킨 나를 기다리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늘 나를 주목하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존재가 있음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특히 주눅이 들 때마다, 약해질 때마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큰 힘과 위로와 용기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탕자가 잘못한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자기 몫을 요구한 것이 잘못이고, 그것을 현금으로 바꾼 것이 잘못입니다. 무엇보다도 집을 떠난 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탕자는 이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는 건너올지 못할 강을 건넌 것입니다. 탕자의 이런 잘못은 오직 아버지께 대한 잘못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진노가 하늘 끝까지 치솟을 상황입니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탕자를 받아주어도 아버지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도저히 살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아버지가 그를 용서하며 받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에서 가장 큰 표현은 용서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행동해도 용서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가장 큰 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을 말할 때 용서를 빼놓을 수 없고, 성경을 대하는 우리에게 용서가 가장 큰 위로가 되고, 나를 살리고, 큰 힘을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먼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셨고,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늘과 땅이 높음같이”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처럼 측량할 수 없는 넓은 마음으로 접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 자녀를 불쌍히 여김같이” 용서하신다고 말합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만큼 깊고 강한 것이 없습니다. 자녀는 종종 부모를 향해 대적하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버린다고 해도, 부모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 말합니다. 형제와 자매를 얼마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숫자적으로 490번만 용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칠은 완전한 숫자를 가리킵니다. 무제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한정, 무제한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아비가 자녀를 불쌍히 여김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품으로 가야 합니다. 탕자가 그의 가던 길에서 멈추고 돌아서서 아버지께로 간 것처럼 우리도 용서가 있는 아버지 품으로 가야 합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나를 기다리시고,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베푸는 마음입니다. 여기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베푸는 아버지이십니다. 사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것만도 눈물나는 감동적인 일이고, 용서까지만 해도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거기서 그치지가 않습니다. 아들을 향해 뭔가 주고 베풀고, 끊임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집에 있던 맏아들보다 더 많이 줍니다. 결국 이것으로 맏아들의 분노가 치미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마음은 탕자에게 향해 있었다는 것이고,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아버지가 탕자에게 베푼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집을 떠나기 전 그의 분깃을 준 것을 시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힙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모두는 다 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베풀고 또 베풀고, 주고 또 주고,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정진호 교수라는 분이 지은 책 중에 ‘루카스 이야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어떤 장애인 부부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은 2001년 6월 캐나다의 신앙공동체 데이 브레이크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제가 이것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애인 부부가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그 부부는 간절히 아기를 갖기 원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두 번에 걸친 유산은 그들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렵게 들어선 세 번째 아이를 위해 기도하던 중 통증이 찾아왔다. 황급히 병원으로 찾아간 그들에게 의사는 아이에게 심각한 장애가 발견되었으니 당장 유산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의 뇌가 골 밖으로 나와있는 치명적인 장애였다. 이런 경우 아이가 죽지 않고 세상에 나오더라도 아마 15분을 살기도 힘들 거라고 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들은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얼마나 기다리던 아이인가? 얼마나 애틋하게 어루만지던 생명인데,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의사에게 아이를 뱃속에서 계속 키우겠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 말을 냉정하게 잘랐지만, 부부는 생명을 죽일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뱃속 아이의 이름을 루카스(Lucas)라고 지었다. 그리고 루카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매일 루카스에게 아름다운 찬양을 들려주었고 기도했다. 루카스를 볼 수는 없었으나 만질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기에 매일 그 아이와 말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마침내 출산의 날이 다가왔다.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아이를 받았을 때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부부는 루카스가 부모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도록 어린 핏덩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보물처럼 껴안아 주었다. 주어진 15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고 한시간이 지나도록 루카스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두 시간, 세시간이 지나자 의사는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일이 없으니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루카스를 집으로 데리고 온 부부는 그날부터 루카스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평생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모아 놓은 것 같은 나날이었다.
루카스를 위해 서둘러 세례를 받게 했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조심스레 닦아주고 매일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날들이 지나간 후 마침내 루카스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다. 루카스는 17일을 살아냈다. 루카스를 떠나 보내던 날, 예배당에서는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장례예배가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단위에 놓인 작은 관 안에 루카스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했다. 예식이 끝나고 루카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앞으로 걸어나와 관 앞에선 루카스의 엄마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루카스와 함께 했던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루카스를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루카스의 아버지가 말했다. "저는 루카스로 인해 비로소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준 내 아들 루카스에게 감사합니다. 루카스는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뿐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고 또 주고, 베풀고 또 베풀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 사랑을 받으며 살았고, 또 앞으로 우리 삶에 그런 사랑을 받으며 천국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이 은혜가 나를 강권하고 압도하며, 내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기다리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그리고 한없이 주고 베푸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새기시고, 한 주간도 믿음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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