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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3): "그래도 남는 것은?" (고전 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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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평을 넓혀 가자>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사실상 UN 사무총장으로 내정이 되었습니다.
UN 사무총장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 이상으로 영광스러운 직책입니다.
'세계의 대변인'으로서 수많은 국가 지도자들과 만나 국제 분쟁을 조정하는 등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온 국민들이 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지만 저 역시 남달리 뿌듯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장관이 저의 고등학교 선배이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기문 장관의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 사람들입니다.
음성군 원남면 행치리는 광주 반씨의 집성촌으로서
반장관의 일가친척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마을이 조성된 지 400년 만에 최고의 경사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크게 기뻐할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가친척들일 것입니다.
아직 생모가 살아 계시다고 하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겠습니까.
또한 동생들 역시 그런 자랑스러운 형과 오빠를 두었으니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와 같이 전 국가적인 경사에도
기뻐하는 사람들의 정도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생각해봤습니다.
반장관이 우리 감리교인이고 게다가 우리 내리교회 교인이라고 한다면
아마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할 때 자기 중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가, 혈연, 지연, 학연 등의 연줄이 얼마나 되는가를 먼저 따집니다.
또한 그 사람이 나와 어느 정도의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가도 중요합니다.

반기문씨가 UN 사무총장으로 내정된 것이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의 경사이지만
그 느끼는 기쁨의 정도는 나와 반장관의 사이가 어느 정도 가까운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단지 저의 고교 선배라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보다는 조금 더 자랑스럽게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음성 사람들은 동향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타지역 사람들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고
반씨 일가는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이고 관계 중심적입니다.
모든 인류를 보편 타당하게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분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실천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대개 나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더군다나 주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 나와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고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사실, 한 사람의 사람됨이나 인격적인 크기는 사랑의 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잡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 자기 친인척, 가까운 이웃들만 사랑하는 사람보다 이런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훨씬 더 큰사람이요 바로 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우리 같은 범인이 이렇게 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
즉 은사(恩賜)라는 바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랑이 일시적인 감정이나 변덕스러운 느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인격의 한 부분이요, 지속적인 습관이요 기질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우리의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가족들과 친구들을 다 만나셨겠지만 우리 마음 같아서는 누구한테나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대해주고 싶지만 그게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이 아직 기억에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아직 미움의 앙금이 채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까지도 다 품고 사랑한다," 말 하기는 쉬워도 실천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물로서 주셔야만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변화가 되고
성령으로 충만한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열매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왜 사랑이 최고의 은사일까?>
우리가 고전 13장을 읽을 때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사랑도 방언이나 예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 즉 은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은사는 은사 중에 가장 좋은 은사요 가장 위대한 은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자랑하는 가지가지의 은사들을
쭉 열거하면서 다 귀하고도 좋은 은사들이라고 인정하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귀하고 더 좋은 은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고전 12장의 마지막 절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뒤이어 고전 13장에서 은사 중에 가장 좋은 은사, 최고의 길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들 중에 최고 가는 으뜸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 왜 최고 가는 으뜸 은사일까요?
오늘 봉독한 고전 13: 8-13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른 은사들은 다 일시적인데 반하여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부분적인데 반하여 오직 사랑 하나가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영원토록 남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8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주를 심판하실 그 날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의 은사는 그 중간 시기 동안에나
필요한 것이지 주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여기 지상에서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주시는
은사에 불과할 뿐, 천년 만년 영원무궁토록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은사가 아닙니다.

9-10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예언과 지식과 방언은 부분적인 것이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령한 은혜를 받아 미래에 일어날 신비한 일을 예언하고
우주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신비한 언어로 천국 방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할 때 선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날 뿐, 지금 여기에서는 희미하고 불완전할 뿐입니다!

이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대비를
바울 사도는 '어린 아이의 비유'와 '거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11절 말씀을 다같이 보세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번 추석에 고향에 다녀오신 분들은 옛날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그렇게 크게 보이던 마을이나 학교 운동장이
어른이 된 다음에 가보니 얼마나 작아 보이는지 모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서울이 얼마나 큰 도시일까 미국이라는 나라는
또 얼마나 큰 나라일까 상상의 날개를 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서울이나 미국은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그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막상 서울과 미국에 살아보니 별 것 아니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렸을 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했겠습니까?
아무리 머리가 좋다해도 깨닫는 것 또한 얼마나 어린 아이 같았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미숙하고 유치하지 않았습니까?
어른이 된 다음 우리는 그 때 미숙하고 유치했던
말이나 깨달음이나 생각을 다 버리지 않았습니까?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과 같은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은사들을 대단한 것으로 자랑해서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우리가 어린 아이 적일 때에나 필요한 것이지 어른이 된 다음에도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가 도래해서 우리 모두 영적인 성인이 되면
자연히 사라지고 말 유아기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은사일 뿐입니다!

이제 12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 보세요.
아무리 거울이 맑고 또렷해도 거울로 보는
우리의 얼굴은 실물로 직접 보는 것보다는 희미합니다.
거울로 보는 우리의 얼굴은 분명 우리의
진짜 얼굴이 반사되어 비취기 때문에 거짓은 아닙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도 분명히 진짜이지 가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들은 거울로 우리의 얼굴을 보듯이 희미한 것들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똑바로 쳐다보는 것 같이 아직 선명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진짜 선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장차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바라볼 그 때처럼 선명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주의 종말이 찾아오는 날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하나님을 마주 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동안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온전히 더욱 또렷이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이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대비한 후,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요?
신(信 pistis), 망(望 elpis), 애(愛 agape)는 기독교의 3덕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주님이 오실 그 때까지
우리가 이 땅위에서 살면서 항상 붙들어야만 할 최고의 덕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중에서 왜 최고의 으뜸이 사랑일까요?
주님이 재림하셔서 영원한 천국이 도래하게 될 때, 그리하여 모든 일시적인 것이
사라지고 영원한 것이 이루어질 때, 모든 부분적인 것이 물러가고 온전한 것이 올 때,
그동안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게 알아오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또렷이 아는 그 날이 올 때, 그 때에도 여전히 남는 최후의 덕은 무엇일까요?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다른 은사들보다 믿음과 소망이 더 귀하고
더 본질적인 은사요 덕이지만 결코 사랑에는 못 미칩니다. 
생각해보세요.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오직 이 땅위에 있을 때에만 필요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밝히 아는 날에 우리가 믿었던 것이 다 진실로
밝혀질 터이고 우리가 소망했던 것이 다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기에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사랑 하나 만이 지상에서나 천국에서나 변함 없이 존재할 유일한 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참 귀하고 아름다운 덕이지만 사랑에 비하면 부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오직 사랑 하나만이 지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온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러기에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도 남는 것은 사랑>
저는 오늘까지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수많은 이웃들을 만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부자들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고 무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든지 간에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들은 사랑을 함께 나눈 분들입니다.
사랑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오래 오래 갑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983년에 목회를 시작하여 여러 교회들을 섬겨오고 있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제가 옛날에 어떤 설교를 했는지, 어떤 프로그램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따뜻한 사랑을 주고받은 사람들, 사랑이 넘쳤던 사건들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이 힘들었을 때의 따뜻한 격려 한 마디,
정성을 다한 중보기도, 아름다운 미소, 사랑이 오래 갑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일도 사랑의 동기로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하고 회의를 하고
어떤 행사를 하더라고 사랑의 정신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지만
오직 사랑만이 온전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지상과 천국 모두에 두루 남는 유일한 덕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모든 것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덧없이 사라지지만 그래도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후회스러운 것은 돈을 많이 못 번 것도 아니고
진급을 못 한 것도 아니고 높은 명예를 누리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충분히 사랑할 수 있었음에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현대가의 유명한 대재벌 총수가 유서 세 통만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대북 사업을 계속해 달라, 자신의 유골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
그리고 아꼈던 부하 직원에게 "당신 윙크하는 버릇 고치시오."라는 허탈한 농담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가장 슬픈 메시지는 아들에게 남긴 유서였습니다.
"아들아, 너하고 사랑을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만 같았던 대재벌 왕회장이 죽으면서
가장 괴로워했던 것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는 회한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 부족한 것을 탄식해야 할 것이고
사랑을 더 많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요한 1서 4: 7-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기다리는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더디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빠르고,
슬픈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길고,
기쁜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짧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저희에게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빠 사랑해요."
― 마흔 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判事 한기택」을 추모하는 딸의 글 중에서           
(김승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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