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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점짜리 고백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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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은 행사가 많은 달입니다. 1일 국군의 날, 개천절, 추석, 한글날, 15일이 체육의 날, 20일이 문화의 날, 24일이 유엔의 날, 31일이 저축의 날입니다. 그 밖에도 노인의 날, 제향군인의 날, 교정의 날, 종교개혁주일 등이 더 있습니다. 그러면 이달 21 일은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경찰의 날이면서 부부의 날이기도 합니다.

현대백화점에서 부부의 날을 앞두고 배우자에게 가장 듣고 싶은 고백이 무엇인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은 ‘당신을 믿어요’라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했습니다.(71%) 아내가 남편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많이 힘들지요’하는 위로의 말이었습니다.(49.5%) 배우자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 위는 남편과 아내 모두 ‘사랑의 편지’를 꼽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고백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고백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밝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백을 통해서 서로 친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고백에 인색합니다. 고백하는 것을 쑥스러워 합니다. 속내를 쉽게 보이려고 하지 않은 민족성 탓이기 합니다. 그래서 평생 살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듣는 부부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경상도 사나이들이 무뚝뚝합니다. “자기 나 사랑해?” 하고 물으면, ‘되었다’ ‘치아라’ 하면서 고백을 외면합니다. 그런 날은 저녁 밥 제대로 얻어먹기 힘든 거죠.

고백하는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고백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백을 하고 손해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고백에 대한 보상은 놀라우리만치 큽니다. 정직한 고백은 문제를 금방 수습합니다.

하나님도 인격이시기 때문에 고백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고백을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3 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무엇을 배웠을까요? 제자란 무엇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복음을 들었습니다. 즉 복음을 배운 것입니다. 3 년을 배웠으니 복음에 대해서 거의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보셨습니다. 물론 아직 부족합니다. 그러나 남은 부족한 부분은 따로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보내려고 준비하십니다. 최종적으로 제자 수료 테스트가 남아 있습니다. 그 테스트는 딱 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은 주로 천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천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천국은 이런 곳이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 천국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주제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어떤 나라인지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최종 테스트는 그 가르친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가르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보다, 천국을 가르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천국 이야기를 메시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 이야기를 전한 사람 즉 메신저입니다. 메시지보다 메신저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느냐 입니다. 천국이 좋은 곳인지 알면 뭐합니까? 천국을 갈 수 없다면 그것은 그림의 떡입니다. 천국이 좋은 줄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천국을 안다고 해서 천국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을 몰라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주로 천국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천국 이야기인 줄로 알았습니다. 복음이란 글자 그대로 ‘복된 소리’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쁜 뉴스’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 복음은 복음을 전한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즉 복음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죄 값을 치르신 죽음입니다. 그 죄는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죽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아주 특별한 죽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를 위한 희생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증거는 오직 마음의 증거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라고 믿습니까?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던진 질문은 아직 대답하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를 지기 이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제대로 하려면 십자가를 겪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이 지역은 북쪽 끝으로 이스라엘의 경계지역입니다. 예수님은 대중으로부터 벗어서 제자들과 따로 시간을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특히 본문 바로 앞 12 절에 ‘제자들이 ··· 깨달으니라’ 하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어서 깨달음의 결과가 신앙고백으로 이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는지 물었습니다.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인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을 뜻합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는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자신을 인자로 부른 것은 그 안에 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대중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대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선지자입니다. 그만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나 예수님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인기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능력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구약 말라기서에는 세상 끝에 메시아의 전령으로 엘리야가 다시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야처럼 거짓 종교 지도자들과 맞서고, 이적을 나타내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온 엘리야란 소문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탄식과 눈물을 몸으로 보여준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타는 듯 한 민족의 애정을 보면서 예레미야를 떠올렸습니다. 또 모세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를 생각했습니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오길 기대하는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나 대중들의 예수님 고백에는 어디에도 메시아 고백이 없습니다. 모두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는 고백뿐입니다. 이런 고백은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사람들의 고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 기적 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기는 예수님의 관심 밖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는 신나게 잘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를 내어 놓고, 자기 마음을 보여 주는 일은 고통스러워합니다.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은 그만큼 나를 상대에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의 고백을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심장에서 나오는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하는지 대답할 때는 쉬웠습니다. 모든 소문을 들은 대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실 때는 당황했습니다. 막상 이런 질문을 받고 보면 당황스럽습니다.

옆에 앉은 분에게 한 번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묻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정체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사람으로 보입니까?

전에 제가 산타크루즈 복장을 하고 유치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이름을 불러가며 선물을 하나씩 나눠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저를 대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솜으로 만든 수염을 만지면서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어떤 아이는 제 손등을 만지면서 꼬집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동심으로 저를 우주인처럼 여겼습니다.

여러분 혹시 제가 변장한 우주인은 아닐까요? 어떤 새신자는 목사님을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천사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목사님이 화장실 가는 것을 보고 실망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곁에 모시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정체가 뭔지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질문을 받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순발력 있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무척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잘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순간적으로 이런 대답을 하리란 기대를 못했습니다. 너무도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서 베드로에게 세 가지 칭찬과 선물을 주십니다.

첫째는 17 절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둘째는 18 절에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19 절에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 전체를 불러 주셨습니다.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나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깨달은 것을 칭찬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깨우쳐 주셔서 예수님을 정확하게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큰 복입니까?

베드로는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덜렁대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하는 학자 타입이 아닙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노동자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입술에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이 혈육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해 죽으심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특별한 선택과 은총으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때 쉽게 설명해 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복음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까지 지냈지만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은 성령님이 도우실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 뜻에 순종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같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 고백을 붙잡고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놀라운 고백을 붙드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게 된 기도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을 부르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 은혜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드려도 그것은 하나님께 부족합니다.

이사야 40:16 말씀에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짐승을 제물로 드려도 하나님께는 부족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울창한 레바논의 나무를 베어다 제물을 사르는 땔감으로 써도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드려도 광대하신 하나님께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고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최상의 것은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을 줄 때가 있습니다. 선물을 받은 자는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주겠습니까? 받는 자가 갚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그 앞에서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너무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물을 베푸는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기에 너무 가슴 벅찹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에 무엇을 보답하겠습니까? 너무 큰 은혜에 대한 보답은 오직 그 은혜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제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구원의 조건으로 거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자는 구원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고백을 입술로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는 믿는데 입으로 내놓지 못한다면 유감스럽지만 그것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로마서 10:10 말씀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반드시 입술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받으시고 천국 백성으로 우리를 들이십니다.

베드로가 두 번째로 받은 선물은 18 절에 베드로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선물은 19 절에 천국 열쇠를 받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세 번째 선물에 대한 말씀은 다음 주일에 계속 하겠습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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