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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스러운 교회 (엡 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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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신앙공동체입니다. 가정이나 국가나 민족 공동체는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교회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행할 때 교회의 거룩함과 화평과 사랑스러움을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 교회의 창립 10주년 감사 예배를 한 주 앞 둔 시점에서, 교회의 영광스러움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영광스럽습니다.

우리가 알아 둘 점은,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머리와 몸에 비유합니다. 에베소서 1장 22-23절에 이르기를 “22)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머리와 몸은 하나로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이처럼 귀히 여겨주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처럼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잘 나타낸 비유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머리와 몸은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고 누리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공동 운명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시므로 교회 역시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므로 교회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왕 노릇하시듯이, 교회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듯이, 교회 역시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들은 약점을 지닌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합니다. 때로 다툼과 분쟁이 생기기도 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교회도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약점을 지닌 지상의 교회들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만일에 아무런 약점도 없어야만 교회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지상 교회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보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신자들이 파당을 짓고  분쟁하였고 도덕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으나 사도는 그 교회를 일컬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고전 1:2). 여러 가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적인 약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로 인정받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교회를 사셔서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성도들의 영광스러움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교회도 각기 직분을 가진 많은 성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4-5절에 이르기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2장 12-13절에는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각 지체들이 몸을 통해서 머리와 연결되듯이, 성도들은 몸인 교회를 통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떠난 지체가 살 수 없듯이, 우리가 교회를 떠나서는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교회는 참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 4절에 보면,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선민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이방인들은 외인에 불과했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의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의미가 없고, 인종이나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교회 말고는 이 같은 성격을 가진 공동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면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한 형제로서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자격으로 신앙생활을 할 뿐 아니라 동시에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이 같은 올바른 교회관을 가지고 항상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교회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 받았으므로 영광스럽습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 주님께서 가장 힘쓰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파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는 것이었으며, 공생애 내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 인생들에게 죄 사함의 길, 영생의 길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니 기쁘고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죄로 인해 영벌을 받을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말해 주는 것이 어찌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복음이 말하는 구원의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의인이 되려고 한다면, 이 땅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평생 동안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드러낼 따름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7장 9-10절에 이 같은 탄식이 나옵니다. “9)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얻는 방편으로 율법을 주셨건만, 이 율법이 오히려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우리를 죽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로마서 7장 13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감추어 있던 죄의 본색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시름시름 앓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피도 뽑고, 초음파도 하고, 내시경도 하고, C-T 촬영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여러 종류의 검사를 번거롭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병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의사는 위에서 암세포를 발견해 냅니다. 그리고 나서 환자에게 “검진한 결과, 당신의 위에서 암세포를 발견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신은 암환자입니다.”라는 선고와 같습니다.

그러자 환자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다고 괜히 검진을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의사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암의 정체를 드러낸 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칭찬 받아야 할 일입니다. 율법의 역할이 이와 같습니다. 율법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자기 몸에 암이 있음을 알게 된 환자가 취하는 방법과 비슷합니다. 환자는 그 다음 단계로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에 의해 자기가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가 죄인이며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반면에, 자기를 의로운 자로 여기는 사람이나,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교회가 할 일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적해 주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는 말씀이었습니다.

마가는 이 같이 증언합니다. “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감람산에 모였습니다. 제자들은 이제야 말로 예수님이 유대나라의 임금이 되실 때가 되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 각 자에게 뿐 아니라 전체 교회에게 주신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복음 전파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티비에 나오는 사극을 보면, 금부도사가 왕명에 따라서 사약을 가지고 왕에게 죄를 범한 신하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죄인 아무개는 나와서 어명을 받들라”고 외치는 의금부 관리의 태도는 얼마나 근엄하고 당당한지 모릅니다. 그 관리는 사람의 목숨을 끊는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그처럼 당당합니다.

그렇다면 죽을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더욱 당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고 했습니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복음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며, 영원한 멸망에 처할 죄인들을 거룩케 된 무리 곧 성도가 되게 합니다(행 26:).

초대교회 당시에 안디옥 교회는 복음 전파의 열정이 강한 교회였습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하려 할 때 맨 먼저 비용을 계산합니다 마는, 정작 시급한 것은 비용이 아니라 선교에 헌신할 일꾼입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선교의 열정에 불타는 바나바와 바울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다 목회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복음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멀리 이국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는 못할지라도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 가족과 친지들, 이웃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복음 전파에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역 사회에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제 3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에 동참하므로 영광스럽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에 동참하기에 영광스럽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보세요.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대단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고, 복음을 전하자 하루에 삼천 명, 또는 오천 명이나 회개하고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도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이 복음에 의해 정복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대적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대제사장들과 공회의 권세를 등에 업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왔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당시의 형편을 이 같이 증언합니다. “1)…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놀랍게 부흥하던 교회가 그만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신자들이 다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교회에게 너무나 가혹한 시련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4절에 보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라고 했습니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처에 노란 민들레 밭을 만들듯이, 핍박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유대인들이 이방인 취급을 하던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유대 땅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팔레스틴의 경계를 벗어나서 이방 지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핍박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안주하고 있던 교회를 분발시키셔서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핍박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로마의 네로 황제를 비롯한 열 명의 황제에 의해서 근 250년 동안이나 교회가 극심한 핍박을 받은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체포되어 옥에 갇히고, 정당한 재판도 없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칼에 목 베임을 당하기도 하고,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하고, 기둥에 묶여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약 250년 동안이나 핍박이 지속되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토록 혹독한 핍박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사는 기독교 역사상 그 때가 가장 신앙이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 당국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날로 늘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는 핍박 때문에 없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통해서 신앙이 더 순수해지고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가 고난을 기뻐하는 이유는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7-18절에 이르기를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장차 주와 함께 영광을 받는 것이지, 고난을 기피하면 장차 주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핍박 중에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의 승리에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서 핍박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대제사장들이 공회를 소집하고 사도들을 소환해서 심문하고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석방했을 때,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므로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충성스럽게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 생명과 은사와 능력으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형통할 때나 역경의 때를 막론하고 변함없이 교회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습니다(딤전 3:14-15).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성경은 장차 교회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웬 일인지, 웬 은혜인지, 하나님께서 저와 성도님들을 불러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런즉 이 설교를 경청하신 여러분께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의 영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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