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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손가락이 몇 개냐? (삼상 17: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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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가락이 몇 개냐? (사무엘상 17:31~40)

여러분, 모두 한가위 보름달은 보셨습니까?
일 년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달이 8월 한가위 보름달입니다. 큰 쟁반 만큼 둥글고 환한 보름달 처럼, 한가위는 모든 것이 푸짐한 명절입니다. 우리 민족 백성들에게 가장 기쁜 잔치입니다. 온갖 종류의 먹을 것들이 차려집니다. 솔잎 냄새 가득한 송편, 아삭거리는 햇밤, 종류를 다 셀 수 없는 부침들, 고기들과 생선들, 아이들 머리통 만한 사과와 배들.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먹거리만 풍성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습니까? 꼬마 아이들은 명절이면 여간 피곤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친척들에게 연신 인사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방 저 방, 남자들로 가득하고, 부엌에는 여자들로, 또 거실이나 마당에는 꼬마 아이들로, 현관에는 신발이 켜켜이 쌓여 있을 지경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당연히 말도 많아집니다. 여자들이 모여서 자기 아이들 자랑으로 접시들이 깨집니다. 남자들은 사업 이야기, 직장 이야기, 게다가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사랑 방에서 세워졌다 허물어졌다 합니다. 꼬마들은 어른들은 이해할 수 컴퓨터 게임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말의 잔치"라고 하는데, 이번 추석에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무엇일까요? 아마 "어렵다", "힘들다"는 말일 것입니다. 직장도 어렵고, 사업도 어렵고, 가정도 어렵고, 취업도 어렵고, 진학도 어렵고, 경제가 어렵습니다. 어렵고 힘들어서, 한가위의 풍성함과 넉넉함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넘쳐야 할 먹을 거리들도 없어지고, 시골 부모님과 조카들 주머니에 넣어 주던 용돈 인심도 줄어 들고, 보여야 할 친척들 얼굴도 보이지 않는 그런 한가위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최근 어느 신문에서는 이라는 제목으로 안타까운 우리 이웃들의 현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기사 중에 "오빠, 이번 추석에는 엄마 올까?"라는 내용이 마음에 오래 앙금처럼 남았습니다. 추석이면 으레 있어야 할 푸짐한 음식이나 선물, 많은 친척들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였습니다.
이들 남매들에게 세상과 현실은 도저히 헤쳐 나가기 어려울 것 같은 커다란 장벽입니다.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상대하기 벅찬 거인 처럼 느껴집니다. 미래를 꿈꾸기에는 현실의 벽 자체가 너무나 높아만 보입니다.
사실 모든 사물은 보는 관점에 따라 너무나도 다릅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어떤 태도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상황도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똑 같은 1시간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 있는 차 안에서 보내는 1시간은 왜 이리 길게만 느껴집니까? 그늘도 없는 사막 위에서 1킬로미터는 멀고먼 거리입니다. 시원한 해변을 산책하는 1킬로미터는 잠깐 사이에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모든 현실은 이처럼 어떤 관점과 태도로 보느냐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른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대부분은 현실과 환경에 짓눌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황이 우리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포위되어 버리면, 이제 우리 삶은 염려, 근심, 두려움이 지배하게 됩니다. 현실이라는 거인이 우리 앞에 버티고 서서, 우리의 앞길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십시다. 성경은 31절부터 40절까지 읽었지만, 17장 전체를 살펴 보겠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경사지에 군대를 집결시켰습니다. 계곡 아래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양 옆으로는 넓은 경사면이 있어서 병사들이 서로 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 속에 특이한 인물이 하나보입니다. 골리앗이라는 거인입니다. 이 거인은 키가 3미터나 됩니다. 몸에 두른 철갑이 80킬로그램이 되고, 창날 만 9킬로그램이 넘습니다. 이 거인이 블레셋 군대 앞에 서서 싸움을 이끄는데, 이스라엘 병사들의 반응은 어떠했겠습니까? 본문 11절에 보면,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했습니다. "놀라서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또 24절에는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거인이 전쟁터를 압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과 모든 병사들을 두려움으로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주는 근심과 두려움은 특성이 있습니다. 우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힙니다. 거인 골리앗은 전쟁에서 40일을 쉬지 않고 나와서 이스라엘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우리가 한 번 현실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염려와 근심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하고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 갑니다. 근심이 우리의 뼈를 녹아내리게 합니다. 현실과 맞설 수 있는 기력을 소진시켜서 다시는 일어 설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비관적으로 만들어서 어떤 시도도 실패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게 합니다. 최선이 무엇인지, 지혜로운 태도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사울 왕과 병사들은 거인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잊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쟁의 주관자가 누구인지, 지금 이 어려운 현실에서 누구를 바라 보아야 할지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현실에 겁먹기 시작하면, 우리 주변을 포위하던 현실은 이제 우리 안마당으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처음에 골리앗은 계곡 건너편 블레셋 진영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차츰 계곡 아래로 내려 오더니, 나중에는 계곡을 건너서 이스라엘 진영 아래까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골리앗이 올라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감히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니까, 조금씩 경계를 허물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현실 앞에 좌절하기 시작하면, 차츰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분별력도 잃어 버립니다. 우리를 지탱하던 신앙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현실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처럼 보이게 됩니다. 믿음이 우리 삶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현실의 높은 장벽이, 무시무시한 거인 같은 두려움이,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은 부정적 생각이, 미래와 꿈과 비전을 향해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이, 내일을 짐작할 수 없는 염려가 우리의 삶 전체를 완전히 제압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우리의 삶을 둘러 막고 있는 현실이라는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현실이라는 껍질이 아니라, 상황과 환경이라는 신기루가 아니라, 내게 주어져 있는 상황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바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짓누르는 현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나를 속여서 좌절하고 주저 앉게 만드려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두려움으로 오그라 들고 도망가지 않아도 나를 공격할 아무런 힘도 없는 껍질이라는 것, 사단이 내 눈을 가려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내 시야를 흐리게 하여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내 심령을 흔들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수 없게 만드는 사단의 속임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에 참전한 형들의 안부를 물어보기 위해서 온 다윗은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산 언덕 위에서 계곡 아래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다윗은 믿음과 신앙과 약속의 눈으로 현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다윗처럼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우리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를 현혹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바르지 못한 방법과 수단에 호소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은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겉보기에 경건한 것 처럼 보이는 주변 사람들입니다. 다윗에게는 엘리압이라는 제일 큰형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예전에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집을 방문해서 그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기름부어 사울 대신에 왕이 될 사람을 세우고자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맏아들인 엘리압을 보고는 사무엘은 그가 왕이 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겉보기에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 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압은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 쓰고 아버지 심부름 온 막내 동생 다윗을반갑게 맞이하기 보다는 오히려 핀잔을 주었습니다. 다윗이 양을 돌보는 책임도 팽개 친 채로 전쟁터에 와서 구경 온 것 처럼 말했습니다. 병사들이 다윗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 부은 사람"이라고 말할텐데,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왔다고 비난했습니다. 같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막내 동생의 안전을 염려하기 보다는, 동생을 시기하고, 교만하고 완악한 사람으로 창피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환경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때, 진실로 신앙의 눈으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돕기 보다는, 인간적으로 시기하고 질투하여서, 도리어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기 보다는 넘어 뜨리려 하고, 돕고 힘을 보태서 잘 되도록 하기 보다는, 않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고, 사람에게서 지혜를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이 아니라, 지혜와 도움을 찾아 옆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서, 참된 도움과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울 왕은 많은 상금과 자기 딸을 포상으로 걸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현실을 해결해야할 책임을 진 왕입니다. 그동안 전쟁에서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선포하고는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포상금을 걸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도, 많은 인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귀가 솔깃한 방법들도 있습니다. 당장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가림에 불과합니다.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듯 하지만, 더 큰 문제를 숨겨 두고 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 모든 현실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는 처음부터 문제도 아니였습니다. 이런 문제와 환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은, 현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 보이든지 또는 아무리 쉬워 보이든지, 현실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방법과 지혜로 풀어서는 문제를 만드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어야 그 문제를 통해 뜻과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 볼 때,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 볼 때, 현실은 그 실체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사울 왕과 모든 병사들의 눈에 어마어마한 거인으로 보였던 골리앗이 다윗의 눈에는 작은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다윗에게 거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었습니다. 천하의 거인 야훼 하나님 앞에서 무모하게 소리치는 작은 난장이를 다윗은 보았을 뿐입니다.

전체 군대가 함께 싸우면 전투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자기의 신체적인 장점을 이용해서 일대일로 싸우기만을 고집하는 겁쟁이가 바로 골리앗입니다. 자신감으로 가득차서 전쟁터를 지휘하는 용맹스런 장수가 아니였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죽기를 무릎쓰고 적진을 돌파하여 상황을 역전시키는 불사신 같은 투사가 아니였습니다. 놋으로 투구를 쓰고, 엄청난 무게의  비늘 갑옷을 입고, 다리에도 놋으로 보호대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 키만한 방패를 다른 병사에게 들게 하고 나서야, 겨우 이스라엘 병사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소심하고 비겁한 꼬맹이였습니다.

40일 동안이나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짓눌렀던 두려움의 대상이 다윗에게는 한낱 비겁하고 겁 많은 허풍쟁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눈을 가리는 사단의 먹구름을 벗겨버리면,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의 신뢰하는 확신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면, 거대한 현실의 장애물과 삶을 둘러싼 환경의 장벽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전능하시는 하나님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 없는 것들이 그동안 우리를 괴롭혔는지 깨닫데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다윗은 병사들을 짓누르는 거인과 자신이 맞서 싸우기로 결단합니다. 물론 다윗은 병사가 아닙니다. 아직 전쟁터에서 싸우기에는 어린 나이입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난장이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은 병사들 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명인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현실이 맞서는 것이 여러분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상황이 나 자신만 감당할 사명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 보다 더 능력있고, 더 적절하고, 더 타당해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엘라 골짜기에 서 있는 모든 병사들 중에서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필요가 없는 첫째 사람이였습니다. 애써 생명을 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앉아서 전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경하다가, 적당히 위험한 상황이 되기 전에 얼른 안전한 곳으로 가버리면 그만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다윗은 책임도 사명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막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어느 누구보다도 다윗이 해야 할 일이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과 맞서는 일이 우리 모두의 사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백성들이 현실에 굴복하고 환경에 패배하여 좌절하는 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두려움과 근심으로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껍데기 같은 현실을 깨뜨리고, 환경의 장벽을 넘어 약속을 성취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의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고, 야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현실, 여러분의 가로 막는 장벽, 여러분을 주눅들게 하는 환경! 바로 여러분 자신의 맞서야할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맞서야 하겠습니까?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투구와 갑옷과 칼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무기를 준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병사들 대부분은 아무도 철로 만든 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왕의 칼과 갑옷을 갖추는 것은 거인과 맞서기 위한 최고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는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양 떼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풀을 뜯고 있을 때, 한 쪽 구석에 몰래 늑대가 다가 옵니다. 칼을 들고 뛰어가서는 이미 늦습니다. 달려 가는 사이에 늑대는 양을 물고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돌을 던지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직 총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늑대가 양에게 다가오기 전에 늑대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제나 물매로 돌맹이를 던지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마음 먹은 목표를 정확하게 맞힐 수 있을 정도까지 훈련했습니다. 비록 볼품 없는 돌맹이지만, 다윗은 이것으로 어떤 짐승이든지 맞추어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최고의 전투 장비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맞서고 현실의 거인과 싸울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바로 지금의 환경과 싸울 수 있는 최고의 상태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바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자신이 평생 동안 익숙하던 그 모습으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쓸모 없는 것 처럼 보였던 것들이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알지 못한 채 애굽의 궁궐에서 보낸 세월이 모세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데 가장 소중한 힘이였습니다. 에스더에게 압제자 페르시아 왕의 아내가 된 것이 결국에는 자기 민족을 살리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유대 율법과 헬라 교육을 받은 것이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선교하고, 기독교의 기초를 놓는데 사용될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장 익숙한 것,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믿음의 이름으로 하나님 손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볼품 없는 무기는 골리앗을 단박에 쓰러뜨렸습니다. 엘라 골짜기를 40일 동안 호령하던 거인을 꺼꾸러지게 만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익숙한 현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한 조건은 한 가지 뿐입니다. 높은 학력도, 뛰어난 지식도, 출중한 체격도, 아름다운 외모도, 유창한 언변도, 전문적인 기술도, 구체적인 계획도, 하나님의 능력을 위한 우선 조건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향한 믿음 뿐입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자신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형이 무시하고, 골리앗이 비웃어도, 자신을 사용하셔서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시고,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최고의 갑옷과 무기도, 다른 병사들의 지원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김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 뿐이였습니다.
믿음의 물매를 들고,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돌맹이를 날릴 때, 작은 돌맹이는 거인 골리앗을 무너 뜨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모자람을 주님의 손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신뢰와 믿음의 물매를 들고, 우리를 주님의 손에 맡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현실과 환경을 격파하고, 믿음과 약속으로 나아 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주인공이 자살 소동을 벌이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병원 건물에 막 들어서는데, 환자 처럼 보이는 한 노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 손가락이 몇 개냐?" 그래서 주인공은 "네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 환자가 "네 개?" "네 개?" "바보 또 한명."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에 주인공이 그 노인 환자가 사용하는 방에 찾아 갔습니다. 뭔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 곁에서 가만 지켜 보기만 합니다. 그런데 노인 책상에 놓인 종이컵이 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테이프를 하나 떼어서 새는 곳을 막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손가락 답이 뭐냐고 물어 봅니다. 그 노인이 다시 네 개의 손가락을 펴고 주인공에게 물었습니다. "이 손가락이 몇 개로 보여?" "손가락 네 개?" "손가락을 보지 말고 나를 봐."
"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해결책을 볼 수 없어. 절대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마.
"손가락을 넘어서 나를 봐. 몇 개로 보여?"
"여덟 개?" "여덟 개. 좋은 답이야."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봐. 두려움과 게으름과 현실에 굴복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
그리고 나서 노인은 주인공이 컵을 고쳐 준 것을 고마워 하면서, 주인공에게 "뭔가를 고쳐 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팻치"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주인공은 원래 이름을 버리고, 팻치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꿰뚫고, 현실 뒤에, 현실 넘어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과 아픔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병의 증세를 치유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의 마음 속의 병을 치유합니다. 환자가 눈 앞에 보이는 자신의 병을 보지 않고, 환자라는 현실을 뚫고, 질병과 죽음의 장벽을 뛰어 넘어 소망과 희망을 보도록 인도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 앞에 있는 현실을 보지 마십시오. 현실을 꿰뚫고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을 보십시오.
눈을 옆과 아래로 향해서 세상과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눈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일을 향해 전진하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믿음의 물매를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돌맹이를 날리시기 바랍니다. 승리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믿음의 자녀가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울 왕 처럼, 게으르고,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지레 겁먹고, 자기 합리화하며 주저 않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통해 사용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장애물을 도약대로 삼아, 하나님의 능력을 지렛대 삼아서, 현실 너머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차기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사울 왕은 핍박"이라는 현실을 뛰어 넘어 다윗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작은 돌맹이 하나가 믿음의 물매를 통해 현실의 거인을 쓰러 뜨렸습니다. 보잘 것 없고, 아무 소용 없는 것 같은 여러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거인을 쓰러뜨리고 기적 같은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현실을 넘어 저 멀리 약속을 바라 보며, 힘차게 나아가는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가 현실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가려 주저 앉지 말게 하시고, 믿음의 눈으로 현실의 꿰뚫어 보며,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믿음의 물매를 들고 달음박질 하여,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인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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