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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의 축복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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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축복 (벧전 4:7-11)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서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특별한 본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돕고 사는 존재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 화와를 만들었습니다. 한자에서도 사람은 서로 돕고 사는 존재란 의미에서 ‘사람 인(人)’자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무엇보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 사랑이 우선이요, 사랑이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니(갈(5:22)."  성영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첫째로 사랑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뜨겁게 해야 합니다. 화끈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노래에도 ”사랑하면 예뻐져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남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남편의 허물이 보이고, 아내의 허물이 보이면 이미 사랑이 식은 증거입니다. 사랑할 땐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식은 모두 예쁘게 보이는 법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내 새끼들은 모두 예쁘게만 보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엔 사랑의 샘플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가장 힘든 사랑이 어떤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부간의 사랑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많고, 너무 잘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 고등학교만 졸업시키면 대학부터는 자기의 힘으로 자립하게 만듭니다. 학비도 융자를 얻어서 공부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들이 모두 댑니다. 졸업 후에도 아파트도 사주고 재산도 물려줍니다. 문화의 차이라고 봅니다. 이 고부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것이 ‘룻기’라는 책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유대인으로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흉년이 들자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이방나라 모압 땅으로 갑니다. 남편이 이방 땅에서 병들어 죽어 과부가 되었습니다. 두 아들이 커서 이방 여자들과 결혼시켰는데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한 집안에 과부만 세이 살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외로웠습니다. 고향생각이 났습니다. 두 며느리를 불러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아직 젊었으니 좋은 남편을 만나 재가하라고! 며느리들을 사랑하는 시어머니의 배려였습니다. 큰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떠났으나 둘째 며느리 룻은 말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계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룻의 시어머니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여자를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을 것입니다. 룻은 남의 보리밭에 떨어진 부리이삭을 주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룻의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이 소문으로 퍼져갈 때 베들레헴의 유지요 부자인 보아스가 룻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시어머니 나오미가 알았습니다. 시어머니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남녀의 사랑은 속이지 못합니다. 저도 교회 청년들의 눈빛만 보아도 눈치를 챕니다. 몇 개월이 지나면 주례해달라고 제 사무실에 찾아옵니다. 시어머니의 주선으로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부잣집의 사모님이 됩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와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나님은 룻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룻의 증손자가 왕이 되었는데 그가 곧 다윗 왕입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니 이렇게 복을 받은 것입니다. 옆에 분들에게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시어머니에게 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서로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사람은 모두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을 먼저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마7:12).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도 사랑해주면 주인에게 목숨까지 바쳐 충성합니다. 그러나 귀찮게 하면 개도 그 사람을 싫어합니다. “원망 없이 하라”는 말은 대가를 바라고 대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대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서로 대접하라고 했을까요? 형편상 현재 대접하지 못하면 훗날이라도 대접하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자신이 갚지 못하면 후손이라도 대접할 날이 옵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분들은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집에 웃음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라가 웃었습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여 웃었으나 결국 웃고 사는 여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했다가 웃음이 사라진 가정에 웃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당시에 왕과 황후와 백성이 우상을 숭배했을 때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천지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들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사르밧의 과부도 먹을 것이 없어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주의적 양심과 갈등을 느꼈습니다. 불쌍한 과부를 도와야 할 판에 그것을 얻어먹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대로 요청했더니 과부는 기꺼이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 집에 있는 모든 그릇마다 가루가 다 차고 병의 기름이 가득 차 남은 여생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대접은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시대엔 아람 나라가 쳐들어와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번번이 이겼습니다. 신통한 능력을 가진 선지자 엘리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한 말도 다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몇 겹으로 포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능력의 종 엘리사가 이번에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아람 군인의 눈을 전부 멀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그 포로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그들에게 떡과 물을 먹여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즉 전쟁 포로들을 조건 없이 석방시킨 것입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돌아간 군인들이 자기들의 임금에게 “우리가 포로가 되어 꼭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우리에게 떡과 물을 먹게 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했습니다”라고 말을 하니 엘리사가 살아 있는 동안 아람 군대가 다시는 그 땅을 침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떡과 물로 수많은 생명을 건지고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전에 잘살지는 못했어도 손님대접을 잘하는 국민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엔 채전에 상추를 심고 부추를 심어 먹을 때 우리만 혼자 먹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웃집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이 모두 돈으로 바꾸는 사회가 되니 인심이 사나워졌습니다. 돈맛이 들자 인심이 야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명절이 되면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서로서로 나누는 습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셋째, “서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예수님은 평생 봉사의 모본을 보이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받은 은사가 있습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봉사를 해야 합니다. 여기 “청지기”란 종을 말합니다. 종은 조건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합니다. 1907년 우리나라에서 영적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소위 “날 연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연보돈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날 연보라는 것은 시간을 정해서 교회를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와서 강대상도 닦고, 교실 청소도 하고,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교회가 건축 중인데 건축업자들이 골조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할 일이 없으나 앞으로 공사가 마무리될 때엔 우리가 봉사할 분야가 많습니다. 시간을 내어 봉사하셔야 합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주로 네 가지 목표를 내세웁니다. 예배, 선교, 교육, 봉사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예배, 선교, 교육에서는 미국에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봉사는 우리가 그들에게 크게 뒤떨어진다고 봅니다. 미국에 살다보면 피부로 느낍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섬기던 연회에서 미국 감리사가 한국에서 애들을 입양하여 기르는데 둘은 정상적인 애들을 입양했고, 세 번째 애는 기형아를 데려다 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들의 봉사정신은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합니다. 이민사회에서도 미국인들에게 많이 배워 봉사하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제가 로스엔젤레스 윌셔 감리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들은 얘기입니다. 그 교회에 찬양대원인 김종윤씨가 웨스턴가에 위치한 한국 슈퍼마켓에 갔다가 물건을 사러 온 유대인 할머니를 만나 통역을 해준 일로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루긴이라는 이 할머니는 혼자 사는 분으로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김종윤씨는 그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하고 간호해드리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고마웠던지 할머니는 유산을 정리하면서 김종윤씨에게 60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김종윤씨는 그 돈을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와 의논해서 보람되게 쓰겠다고 했습니다. 고독한 한 노인의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 60만 달러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크나큰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고독한 노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를 둔 노인들 가운데서도 외롭게 방치되어 혼자 삽니다. 외로운 자를 봉사합시다. 봉사하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봉사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려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말할 때 성경말씀처럼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갈 5:20).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표본 삼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누가 그러는데요”라고 남을 인용해서 말하는데 대부분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말입니다. 남을 팔아서 자기의 말을 하면 신실한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칭찬받으려는 자세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봉사는 변덕이 없고, 변함이 없고, 시험에 들지 않고, 봉사하면 할수록 기쁨이 넘치고 보람이 가득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고, 서로 봉사하고 삽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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