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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고전 14: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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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하반부는, 전반부와 사실은 똑같은 내용입니다. 교회 모임에서 방언과 예언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방언과 예언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론적 지침을 가르쳐 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방언과 예언 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일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26절> 시작하면서 “그러면 형제 자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원리적 답변으로서, 세 구절이 중요합니다.

첫째는, <26절하> “모든 일을 남에게 덕이 되게 하십시오.”

둘째는, <33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는, <40절>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고 질서있게 해야 합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적절하게 질서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론에 따라 각론, 방언과 예언은 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방언은 한번 모일 때 둘 내지는 세 사람 정도가 하고 한 사람씩 차례로 하며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합니다.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 모임에서는 방언은 하지 마십시오. 예언도 한번 모일 때 둘 내지는 세 사람 정도가 하고 한 사람씩 차례로 하십시오. 방언은 통역을 하고 예언은 분별을 하십시오. 그리고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나서지 말고 잠자코 있으며 복종만 하십시오.

제 가르침이 마음 속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나도 예언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받은 예언으로는 그런 것이 아닌 것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런 사람은 이 가르침은 주님의 명령임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소리 말고 모든 일을 품위있고 적절하게 하고 질서있게 하기를 힘쓰십시오.” 이런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모든 일을 품위있고 적절하고 질서있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혼돈, 무질서를 싫어하시고 평화와 질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혹시 모를까 절대자, 주님, 메시야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면, 예수를 진정으로 주님이라 고백하는 사람은 그 분의 뜻을 따르는 데에는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얼마나 질서의 하나님이신지 아십니까? 과학자들은 인간의 DNA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더 조직적으로 정보를 담고 있고, 물리학은 지구에 박힌 창조주의 지문(指紋)이라고 합니다.

폴 데이비스라는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작은 수치 변화에도 너무나 민감한 우주의 구조를 보면 누군가의 세심한 주의와 통찰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이 수치들이 이루어 내는 기적에 가까운 현상은 우주가 설계되었다는 걸 증명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다.”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솜씨를 보면, 질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세상에 새겨 놓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또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인도해 내시고 “자, 이제 내가 너희를 구출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그냥 너희들 마음대로 살아라” 하시며 무작위로 살라고 내버려 두셨습니까?

아니지요? 진(陣)을 칠 때에도 진행(進行)을 할 때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조직과 대형으로 움직이도록 하나씩 하나씩 세세하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질서있게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나아가 그 적지 않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질서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그로 말미암아 개개인이 행복을 누리며 공동체가 아름다움으로 존속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질서는 공동체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약교회의 모습도 품위있고 질서있는 모습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몇 달 전에 우리나라 통계청에서 최근 5년동안 종교인구의 변화 조사를 발표한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2001년에서 2005년까지 5년동안 카톨릭은 74.1% 성장한 데 비하여 개신교는 오히려 1.4% 감소하였습니다. 왜 이런 대조적인 차이를 보이겠습니까?

개신교회가 전도를 열심히 안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극성 전도자가 제일 많고 또 제일 많이 양성(?)하는 곳은 개신교회입니다. 개신교회가 현대인들의 변화흐름에 잘 대응하지 못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변화에 제일 민첩하게 대처하는 종교는 단연 개신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회의 감소와 천주교회의 급증의 대조를 보이는 이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이런 것에도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1980년대에 똑같은 장소인 여의도광장에서 개신교회와 카톨릭이 대규모 집회를 하였었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최대 규모로 대규모 집회를 한 것이 1980년의 ‘민족복음화대성회’ 였습니다. 여의도광장에 연인원 560만명, 하루 동원최다 인원 110만명을 기록한 기적같은 집회였습니다.

반면, 카톨릭은 그렇게 대규모 집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똑같은 여의도 광장에서 50만명을 동원하여 모였습니다.

두 집회의 광경을 찍은 사진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두 집회에서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무질서와 질서의 차이가 현저하게 보입니다. 개신교 집회에서는 중간에 사람들 다니라고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전혀 안 보입니다. 반면, 카톨릭 집회 때에는 군인들이 모여있는 것처럼 중간에 통로들이 바둑판 그어져 있듯이 잘 보전이 되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80년에 민족복음화 대성회할 때에는, 환경미화원 아저씨 아줌마들이 혀들 내둘렀습니다. 산더미처럼 많은 쓰레기에 치여서 신문에서 비판성 기사를 낼 정도였습니다. 반면 카톨릭교회의 대집회 때에는 당시 신문기사의 표현으로는 휴지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카톨릭 교회에서 그 면에서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을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차이가 오늘날 복음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귀를 열리게 하는 한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조직과 질서능력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질서는 좋은 것, 편한 것, 아름다운 것” 도로교통안전협회에서 광고하는 카피문구입니다. 사실, 질서가 오히려 편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임을 누구나 다 압니다. 이번에 우리 수련회 갔다와서 앙케이트를 했을 때, 다들 좋았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음에는 좀 더 깨끗하고 시설이 괜찮은 곳으로 가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질서가 아름답게 잡혀있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 사회에서 질서를 거부하고 무시합니까?

그 첫 번째 원인은 단연 인간의 치유되지 않은 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조화로운 공동체를 위하여 질서있게 창조하시고 질서를 잘 잡아놓으셨는데, 왜 망가졌습니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 죄 때문입니다. 죄를 다르게 표현하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의 유혹처럼,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리고 그 생뚱맞은 자기 욕구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일들이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죄의 본성입니다.

우리 민족은 종자(種子)가 우수합니다. 탁월한 자질을 가진 민족이 우리들, 한민족입니다. 고대 중국의 문헌에도 보면 한반도의 사람들은 문화민족이라고 지칭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이 이웃나라 일본과의 비교에서 전체적인 열세인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조직사회, 질서있는 사회에 심한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보듯, 조직력이 항상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잘 나타나는 단면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의(會議)할 때 나타납니다. 자기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심히 불쾌해하고, 자기 의견이 관철될 것같지 않으면 아예 저만치 꽁무니 빼고 있기 잘하는 것이 우리 한국인의 보편적인 자화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회의(會議)를 하면 회의(懷疑)가 드는 모습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익과 좌익이 극단적 대립을 하고 해방 이후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싸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내가 대빵을 하면 해도 다른 사람 말은 죽어도 안들을려고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 심뽀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뭘 잘합니까? “개기는 것”을 잘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민족은 종자는 좋지만, 죄성이 뿌리깊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많은 민족이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더욱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입었구요.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심은 의를 배우라는 뜻입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사26: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당신의 삶에서도 질서있게 사십시오. 질서를 따르기를 힘쓰십시오. 죄성을 회개하고 기꺼이 질서를 따르는 삶을 사모하십시오. 조직의 쓴 맛을 보기 전에, 개기지 말고 조직에 잘 적응하십시오. (오늘 설교가 너무 노골적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내 삶의 질서를 세우는 것을 성령을 거스리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흥적이고 아무 준비없었는데 우연히 일이 딱 들어맞으면, 이런 것을 성령의 역사(役事)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습니다.

혹은 ‘조직이 사기를 저하시킨다’라는 책 제목처럼 조직사회에 순응하면 자신이 위축되고 기를 못펴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도 왕왕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향은 우리 시대의 자아표현의 사조의 영향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회에 만연해 있는 군사문화의 후유증, 강압적 문화에 대한 반작용도 한 원인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성령님의 인도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순전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기가막힌 도우심을 내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또 ‘조직이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명제는 일면 맞습니다. 특별히 조직을 위한 조직, 생산성이 결여된 조직이거나 혹은 감시, 통제를 위한 조직일 때에는 정말 그렇습니다. 마치 다윗의 몸에 사울의 옷을 입혀 놓듯이, 방만한 조직은 역동성을 제한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적인 진실로서 보편적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어리석음입니다. 미국 아마존에서 2년 연속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도널드 밀러의 『재즈처럼 하나님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도널드 밀러가 흥미로운 만화를 하나 그려 놓았습니다.

어떤 늑대 한 마리가 숲길을 가다가 우연히 나무 위에서 토끼가 한 마리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 늑대는 로또에 당첨되었습니다. 사냥하느라 땀흘리지않고 그날의 식사를 맛있게 포식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이 늑대는 사냥을 포기했습니다. 그 숲길에서 토끼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오늘날의 미국 교인들, 은혜의 이름으로, 게으름의 죄악에 쳐박힌 교인들을 풍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것, 아니지요? 

또 여러분, 조직 훈련없이 개인훈련만 한 선수들이 모여서 온 축구팀이 조직력 훈련을 탄탄히 한 축구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자기 하고싶은대로 하는 공동체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예를 들지 않아도 이것은 자명한 진리임을 다 아실 것입니다.

문제는, 사실 많은 사람들은 질서를 안지키는 것이 아니라 못지킵니다. 왜요?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라고 호탕하게 내세우고 싶지만, 그러나 사실은 얽매인 종이기 때문에 작은 규칙 하나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군대생활에도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이 자유인입니까, 군대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는 사람이 자유인입니까?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고 심기가 몹시도 불편해지고 그래서 자신이 운신할 곳이 굉장히 제한적이 되는 사람, 그 심성이 노예 아닙니가? 질서가 주어지면, 규칙이 주어지면, 평안을 잃어버리고 견디지 못하는 심령이 얽매인 종입니다.

반면, 솔제니친이 시베리아의 감옥에서도 “나는 자유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웃을 수 있듯이, 질서의 사회, 공동체 가운데서도 유연성있게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여러분은 내 자신이 죄와 자아의 욕망에 얽매인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역설적이게도, 내 자신이 죄성에 얽매인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는, 나는 내 스스로 얼마든지 자유인이라고 장담하고 있는 동안에는, 종의 멍에를 벗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질서를 잘 따르며 그 가운데서도 행복하며 기뻐할 줄 아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멍에를 매십시오<마11:28>. 그리고 둘째는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요8:31,32>. 이 두 말씀 노골적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당신의 쫀심을 내려놓으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혼자서 잘난 생각과 판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의 멍에가 무지하게 아플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헌신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맛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죄성에 얽매인 종일수록 예수님의 멍에를 매는 것에 거부감을 갖습니다. 아직 자기 욕망대로 하고 싶은, 내 멋대로 살고 싶은 죄성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멍에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나의 고집을 주장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내려놓으며 예수님의 멍에를 맬 때에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거할수록 더욱 힘있게, 행복하게 누려집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의 멍에를 매셨습니까?

다시 확인하면, 우리가 왜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고 질서있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곧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는 것이며 곧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아라 라고 명확히 가르쳐 주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적절하게 질서있게 하는 것이 왜 이웃사랑인가? 이런 예를 들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0여년 전에 나와서 한동안 베스트셀러였던 책, 로버트 풀검의『내가 정말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에서 무엇을 지적하였습니까? 인생을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원리는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는 것을 강조하였지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1. 모든 것을 나눠 가져라.

2. 정정당당하게 겨뤄라.

3. 남을 때리지 마라.

4. 물건을 사용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제자리에 갖다 놓아라.

5. 자기가 어지른 것은 자기가 치워라.

6. 남의 것을 빼앗지 마라.

7.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용서를 구하라.

8. 식사하기 전에는 손을 씻어라.

9. 용변을 본 뒤에는 반드시 변기 물을 내려라.

10. 따뜻한 쿠키와 찬 우유는 몸에 좋다.

11. 균형 잡힌 생활을 해라.
  매일 무언가를 조금씩 배우고, 생각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고, 공부해라.

12. 매일 오후에는 낮잠을 자라.

13. 집 밖을 나설 때는 차를 조심하고, 손을 꼭 잡고 함께 다녀라.

14. 경이로움을 느껴라. 스티로폼 컵에 심은 씨앗을 기억하라. 거기서도 뿌리를 내리고 식물이    자란다.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삶도 그와 같다.

15. 물고기, 햄스터, 흰쥐, 스티로폼 컵에 심은 씨앗까지 모두 죽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16. 그림동화와 맨 처음 배운 '이것 좀 봐!' 라는 단어를 기억하라.

이 16가지 중에 사람들에게 제일 기억에 오래 남게 하는 것,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가 “물건을 사용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제 자리에 갖다 두어라.” 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생활 가운데 물건 사용하고 제일 제자리에 안갖다 두는 품목이 제 느낌에는, 약상자 같습니다. 거의 매 주일마다 약상자가 항상 뚜껑이 닫히지 않은채로 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참 희한해요.

왜 사람들이 물건을 왜 제 자리에 안두고 아무데나 팽개쳐 놓습니까? 내가 쓴 물건 제자리에 둬야하는데 생각하면서도 꼼지락거리기 싫어서 고의적으로 안하는 게으름은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는 그냥 그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랑 준성형제랑 수고 좀 해 봐라 해서 일부러 예배당 집기들 아무데에나 놔 두고 이렇게 못된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가르쳐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고 일부러 어질러 놓는, 장난기가 가득한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는 많지만요.

왜 물건을 제 자리에 안 두냐면요, 그 사람이 특별히 못되서,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mentality가 자기중심적인 것을 넘어서 자기 밖에 생각을 안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필요로 할 때는 부지런히 찾습니다. 가끔은 쉽게 못찾으면, “에이 사람들이 물건을 쓰면 제 자리에 둘 것이지, 기본이 안됐어, 기본이...” 이렇게 투덜댑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다 쓰고 나면 그 다음은 아무 생각안합니다. 그 다음엔 자기도 어디에 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나의 이웃이 어떻게 찾을까 이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배려하는 사람이라면, 물건을 쓰고 나서 아무데나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나의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안합니다.

여러분, 왜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안중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기만 신나면 되거든요. 아마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별 걸 다 참견야~” 하면서 더 오기로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난리일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고대 수도원생활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훈련을 하는 공동체마다 필수적으로 무엇을 강조하였습니까? 항상 청소와 정리를 중시하는, 생활훈련을 합니다. 그것이 나의 가까운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많이 자유스러운 교회입니다. 목사 앞이라고 할 말 못하고 하는 교회도 아니구, 예배당이라고 체면 차리고 그런 문화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권위주의적 위선의 숨막히는 종교문화를 깨뜨려서 자유로운 소통의 기쁨을 누리는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워함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기뻐함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 은혜에 더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질서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자유를 오도하여, 질서를 무시하는 어지러움으로 미끄러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진정한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모든 일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질서를 세우고 존중하며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감동을 누리는 것이 우리 교회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방종을 회개하고, 진정한 자유의 심령으로 질서있는 교회를 세워갈 때에, 비로소 우리 교회가 좋음을 넘어서 힘이 있을 것입니다. 비로소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공동체로서, 세상에 “맑은 물”을 흘러내는 샘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안에서부터, 당신의 생활소품들에서부터 그리고 당신의 삶의 태도와 행동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질서를 세워가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교회생활도, 평화의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고 질서있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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