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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통신 두절 (사 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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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 집중 호우로 전국이 물난리를 겪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강원도 일부 지역이 고립되었습니다. 도로가 끊기고, 전기도 수돗물도 끊기고, 모든 생필품의 공급도 끊겼습니다. 주민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런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었겠습니까? 통신 두절이었습니다. 전화가 끊겼습니다. 유선전화도 무선전화도 온통 불통이 되어 외부와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통신이 두절된 여러 날 동안 한 마디로 공포의 도가니였습니다. 만일 모든 게 끊겼다고 하더라도 가족이나 친지들과 연락만 되었다면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외부의 도움을 기다리며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전쟁터에서도 벌어집니다. 적군의 포위로 고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만일 통신이 두절되지 않으면 희망이 있을 겁니다. 연락을 취해서 보급품을 공수 받을 수 있고, 퇴로를 안내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통신이 두절되면 완전히 고립된 채 패잔병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런 예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삶 속에서 통신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란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통신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기도하고 서로 연락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 기쁨과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통신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과 통신이 두절되어 있다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최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로부터 단절되는 것이고, 결국 ‘최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고 있는가? 아니면, 통신 두절의 상태인가? 그래서 모쪼록 하나님과 좋은 관계, 친밀한 관계를 이어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이스라엘의 불행 : 하나님과의 통신 두절

  본문 이사야서는 BC 7세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남 유다)의 비극적 상황을 지적하며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이랬습니다. 국력이 쇠퇴하여 내부적으로 몹시 어려웠습니다.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외부적으로도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등 강대국의 위협을 받으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은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이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립무원입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나머지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능력이 많다는 게 사실이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이 사실이냐?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해 주시지 않는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불평이 합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가까이 계십니다. 편재하시는 하나님!(Omnipresent God)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맞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맞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맞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공간적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거리 즉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통신이 두절된 상태가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정치 문제, 경제 문제, 국가 안보 문제, ... 이런 것들은 사실 표면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채 헛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발버둥을 쳐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헛수고입니다. 곱하기와 더하기를 거듭해도 괄호를 치고 마이너스를 붙이면 전체는 마이너스입니다. 그러므로 괄호 밖이 중요합니다. 괄호를 묶고 그 앞에 플러스를 붙여야 곱하기와 더하기가 고스란히 플러스로 남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과 하나님 밖에서 사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사랑. 축복으로부터 소외된 것,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약1:17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씀합니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이 모든 축복으로부터 소외되고, 그 대신 저주에 노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이스라엘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물질 문제, 건강 문제, 가정 문제, 자녀 문제, 사업 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2] 하나님과 통신 두절된 원인 : 죄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까? 하나님이 왜 그들과 함께 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본문 1절~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1절에 보면 여호와의 손, 여호와의 귀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처럼 묘사합니다. 이런 표현을 가리켜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 神人同形同性論)이라 부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인간에 비유해서 표현하는 일종의 의인법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입니다. 하나님의 귀는 기도를 들어주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귀는 어둡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게 아닙니다. 백성들의 죄악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낸 겁니다. ‘사이를 낸다’는 말은 관계를 끊어놓는다, 단절시킨다(separate)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죄악상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3절에 그 손에 피가 묻었다는 것은 포행을 가리킵니다. 또 입술은 거짓을 말합니다. 즉 언행이 악했다는 겁니다. 5절 보면, 독사가 알을 품고 거미줄을 짠다는 것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독사의 알에서 독사 새끼가 나오는 것처럼 온갖 악행을 자아냅니다. 
  이렇게 죄악으로 가득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이스라엘은 점점 망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10절~11절은 뭐라고 묘사합니까? 소경이 담을 더듬듯이 낮에도 넘어집니다. 육신이 멀쩡하고 건장해도 죽은 자 같습니다. 망해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다 곰같이, 비둘기같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하나님! 그것은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가득한 이스라엘은 돕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를 막아놓고 말았습니다.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렘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한번은 TV에서 노후한 수도관에 관한 보도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10년 지난 수도관  이 거의 절반이 시뻘건 녹과 찌꺼기로 막혀 있었습니다. 20년 넘은 것은 파이프가 시뻘건  녹으로 거의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퀄퀄 나오지 않고 녹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이럴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꽉 막혀 버린 인간의 모습이 마치 녹으로 막힌 수도관과 같은 것입니다.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믿노라 하는 신자들 중에도 형식적인 신앙으로 일관하면서 죄악을 품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올바릅니까? 원활합니까? 친밀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3] 통신 두절의 문제 해결 : 회개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즉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엉킨 실타래를 풀 때 실마리를 찾으면 다 풀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온갖 문제로 꼬인 현실이라도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므로 죄를 회개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면 정말 우리 죄가 사해짐을 믿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덥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냥 말로 잘못을 고한다고 척척 용서가 되면 너무 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범죄했는데,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다 용서할 테니까 그냥 가라고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 참작은 할지 모르나 아무리 자수했다고 하더라도 죄 값은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대속해 주셨으므로 회개하면 얼마든지 사해 주십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받아주십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게다가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때로는 반복되는 죄악이 있어도 반복해서 회개하다 보면 우리가 점점 변화되어 갑니다. 그것이 곧 성화(聖化)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의로울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십자가 은혜로 용서받고 의인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죄와 죄책에서 구원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기 전까지 육체를 갖고 사는 한 그렇습니다. 늘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더러워집니다.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 그럴 때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의 거울에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마치 아무리 몸을 깨끗이 씻어도 외출 후 돌아오면 몸을 씻어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집니다. 영적인 통신이 활발해 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도 원활해집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은혜의 물꼬, 축복의 물꼬를 트는 겁니다.

[4] 하나님과 통신이 원활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 : 형통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영적으로 통신이 원활해지면 모든 은혜와 축복이 풍성히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흐르고 넘쳐 삶의 전반에 형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요삼2 이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러므로 가장 근본적인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뭐라고 고백합니까?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예수님도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과 우리들과의 관계가 친밀해야 됨을 역설하십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형통한 삶을 추구하지만 엉뚱한 방법으로 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게 아니면 헛된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회개하고 기도하는 게 형통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풍성한 것을 예비해 두었다가 부어주십니다. 눅15:11 이하를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오죠. 탕자는 아버지 재산을 챙겨서 가출합니다.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쫄딱 망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자 그를 영접합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그가 무얼 잘했다고 그렇게 합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그를 받아들였고, 모든 게 회복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문제들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인간관계, 물질 문제, 사업 문제, 자녀 문제 등 모든 면에서 생각지도 못한 축복과 꿈꾸지도 못했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옛날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난한 여류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고아 출신으로 고학을 하면서 피아노를 익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독주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연주회를 열려고 하니까 자기 같은 무명의 피아니스트 독주회에 누가 올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중을 많이 모을 욕심으로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던 리스트의 제자라고 거짓 선전을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독주회 전날 리스트가 그 마을에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큰일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 앞으로 달려가 무릎 꿇고 사죄합니다. 그랬더니 리스트가 정색을 하며 야단을 칩니다. “정말 당신이 큰 잘못을 했군.”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자에게 리스트는 이내 미소를 띠더니 말합니다. “자, 내 앞에서 연주해 부시오.” 여자는 벌벌 떨면서 연주합니다. 리스트가 몇 군데 고쳐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당신은 내 제자요. 마지막 곡은 선생인 리스트가 직접 연주한다고 소개하시오!” 자기는 잘한 게 없는데, 다만 회개했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수지맞은 겁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일이 있는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문제들에 당면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틈이나 간격이 생기지 않도록,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통신이 두절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통신이 이뤄지고 있는 한  염려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고, 작은 죄라도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로 범사에 형통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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