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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와 영광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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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생각하지도 않았던 어려움이 일어나고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고난을 사람들은 시험이라 말하고 십자가라 말하고 가시라고도 말합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 고난을 가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이 가시가 다 있습니다. 이 가시는 삶이 주기도 하고 환경이 주기도 하고 이웃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자식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천재지변이 제공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끊임없는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이 대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도성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사도이지 예수 사후 제자된 사람이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느냐고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서신서를 기록하면서 첫머리에 반드시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썼습니다. 그것은 사도성에 대한 시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단들의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이단은 두 가지 부류였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였습니다. 이 유대주의는 부활의 복음이 이미 주어져서 은혜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익숙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고 또 그 율법주의가 복음을 희석시키는 일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강력하게 견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신비주의자들이나 거짓 사도들이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신비적인 황홀경에 자꾸만 유혹을 받았고 그래서 신비주의에 쏠리게 되고 유혹을 받았습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황홀경도 있고 환상도 계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신비주의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건전한 신앙에서 이탈하게 되고 그래서 이단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이 두 문제를 풀기 위해서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러 갔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셋째 하늘이라는 말은 낙원을 말하고 천국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경험하는 엄청난 영적체험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고도 바울은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그것을 말하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으니까 혹 오해해서 신비주의자로 몰아붙일 염려도 있어서 일체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나서 신비와 계시와 황홀경을 강조하니까 신자들이 현혹되고 유혹받는 일이 발생하자 부득불 이야기 안할 수 없어서 14년 만에 입을 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참 우둔합니다. 조금만 이상한 말을 하거나 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면 그냥 좇아갑니다. 그리고 집에서 집회하고 안수하고 계시 받는다고 야단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그 후에는 일반적인 신앙생활이 무료해져서 자꾸만 산으로 기도원으로 은사집회를 찾아다니게 되고 그러다가 결국 이상한 신앙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 가시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몸에 가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가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가시는 반대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안질, 편두통, 간질일 것이라고도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계속되는 반대파들의 박해라고 해석하였고 또 성적본능을 억누르는 육신적인 고통일 것이라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만성적인 질병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을 주신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가시에 대해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은 자신이 너무 신비한 내용들을 목격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혹시 교만할까 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가시가 너무 괴로웠던지 세 번 없애달라고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상태로 만족하라는 계시를 받고는 다시는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몸이 괴로울 때 마다 더 감사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가시에 찔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시가 주어져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가시가 나쁜 것만 아닙니다. 그 가시가 때로 많이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고 눈을 뜨게 하는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자기 우상을 깨트리는 일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이 욕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 이 우상이 들어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것도 “하늘까지 쌓아 우리의 이름 내자“는 동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14를 보면 사탄 루시퍼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하고 호언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자기우상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때로 교만하고 자만하기도 하고 우쭐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때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그 우상이 깨지고 눈이 뜨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나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것이 가시가 주는 은혜입니다.

가시는 욕망을 깨트리는 역할을 합니다.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 가시가 많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남편이 가시일 때가 있습니다. 남편들이 술에 취하고 중독되어서 깐죽거리고 빈정대고 때로는 사탄노릇도 합니다. 그래서 함께 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웃에 사는 교우가 가시일 때가 있습니다. 또 친척이 가시일 때가 있고 자식이 가시일 때가 있습니다. 그 가시들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을 통해서 뭔가 또 새로운 유익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해서 유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불면 바다를 정화시키고 자연을 존중하게 하고 인간의 무력함을 실감하게 하는 교훈이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암이 무서운 것이지만 그러기에 모두 조심하고 만용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유익도 있습니다. 실패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한사람의 실패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그래서 가시는 때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자기 우상을 깨트리게 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하나님 찾음

가시에 찔리면 참 아픕니다. 마음도 아프고 정신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인생도 아픕니다. 그런데 이 아픔이 참 좋은 것입니다. 그 아픔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바울이 몸에 있는 그 가시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기도를 안 하게 됩니다. 아침잠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시가 생기면 어디라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런 면에서 아침잠이 많은 분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사업이 기우뚱 합니다. 아이들이 사고를 쳤습니다. 회사에서 자리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어떻게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내 몸에 가시가 있어서 없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상태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서운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그 일로 하나님께 더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련 없는 평안은 참 위험한 삶입니다. 가시는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줍니다.

교만하지 않게 하심

실패나 가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게 합니다. 일찍이 실패를 경험하고 시련을 겪어본 사람은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실패 없이 승승장구한 사람, 일찍 성공한 사람,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 평생 병원 한번 가보지 않았다고 호언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위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때로 자만하기 쉽고 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한번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은 그렇게 자만하지 않습니다. 쉽게 성공한 사람은 세상의 깊이를 모릅니다. 인생의 심오함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만하고 만용을 부리고 하나님의 경륜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만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러시아까지 진격하려고 했습니다. 전날 밤 사람들을 모아놓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자신감이 넘쳐 과신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귀부인이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나폴레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인, 전쟁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깁니다.”  이것이 자만이고 교만입니다. 아주 지독한 자기 과신입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들도 싫어하지만 하나님도 싫어하십니다. 모세가 그렇게 오만한 자세로 공사장에 나갔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무술로 연단된 주먹으로 한번 치니까 그만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동족들로부터 칭찬을 기대했는데 그만 고발을 당해서 도망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지 않았습니까. 골리앗이 그렇게 거드름을 떨다가 망했습니다. 세상에 누가 나를 당할 것이냐 하고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렇게 실패한 후 광야생활 하는 동안 자신을 발견하고 비로소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심으로 지도자로 나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경거망동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먼저 그 자만함과 교만함과 우쭐대는 것부터 꺾고 부수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 달나라 탐사위해 아폴로 11호에 탑승시킬 우주 비행사를 선발할 때 먼저 1단계로 경력과 이력을 보고 2단계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심각한 위기를 겪은 경험이나 실패를 경험했는가를 본다고 합니다. 이 경험이 없으면 우주 비행 중 돌발 상황 때에 대처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인류문명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눈을 뜨게 되고 발견하고 길을 찾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시 90:5절을 보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버리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시 127: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것도 헛수고요 성을 지키는 자의 수고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과 형통만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아픔도 주시고 고난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르고 가시라고 부릅니다. 바울에게도 그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몸속에 그를 괴롭게 하는 질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9)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서운해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또 몸이 아플 때는 그 아픔을 오히려 기뻐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유를 알고 나니까 그 깊은 섭리와 뜻이 너무 고마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가 약할 때 그때가 내가 강해지는 때”(1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건강하고 복되고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알고 웃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주어진 가시에 찔려 철저하게 약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 깊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건강하고 자신이 강할 때 일의 성과가 나타나고 힘이 솟았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강해지고 힘이 솟을 때는 나에게 가까이 오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한없이 약해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경험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바울 역시 가시로 인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약한데서 오고 주어지고 나타나는 비밀을 체험하고 고백하기를 “내가 약할 때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고백합니다.

때로 태풍이 유익하듯이, 소낙비가 유익하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가시도, 질병도, 실패도 다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또 다른 유익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발견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허점을 활용하십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서 말을 타고 이웃 마을까지 의사를 부르러 갔습니다. 마음은 급한데 말이 잘 뛰지를 못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았습니다. 다급하게 가서 간신히 의사를 모시고 와 보니까 그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면서 세상에 이런 불행한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 보다 더 빠른 수단이 없을까 하고 연구하다가 자동차를 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경험이 새로운 질서를 발명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실 때 이렇게 축복하시고 길을 여십니다. 

1950년 미국 사업가 프랭크 맥나마라라는 사람이 주요 고객들을 초청하여 뉴욕에 있는 큰 음식점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만찬이 종료되고 계산하려고 하는데 지갑을 안 가져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생각하기를 선 결재 후 지불방법이 없을까 하고 연구하다 고안해 낸 것이 세계 최초의 신용카드인 다이너스 카드라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와 실수를 인생의 교훈으로 삼습니다. 12제자들도 보면 모두 실수투성이의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허점투성이의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유익을 줍니다. 내게 원치 않는 가시가 주어지고 고난이 주어져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또 뭔가를 계획하시고 합동해서 유익하게 일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그분의 뜻에 내 인생을 맡기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그렇게 외칩니다. “내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아주 성숙한 신앙의 해석과 신앙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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