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흥 (느 8:1-12)

  • 잡초 잡초
  • 188
  • 0

첨부 1


내년이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은 원산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원산은 오랫동안 동북아의 요충으로 일본 러시아 중국 등이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했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디 선교사가 선교하였는데 교회가 영적으로 폐허화되어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성적으로 방종하였고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많았답니다.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이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하였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제명하기도 하였답니다. 원산에서 약 30㎞ 떨어진 학익동의 집회소를 하디가 불시에 방문하였을 때 놀랍게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당굿을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당시 기독교인인 중에는 19세기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교회를 피난처로 삼기 위해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를 통해 도움을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94년 동학운동 이후 교회 건물에는 깃대가 세워졌는데 교회가 선교사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치외법권지역으로 생각하여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장소라는 표시였답니다. 꼭 무당집이 깃발을 세워놓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디는 교회의 깃대를 제거하였답니다. 선교사들은 평양에 모여 집회를 하였답니다. 처음에는 냉냉하였는데 1907년 1월 첫 주 평양 장대현 교회에 주일 저녁부터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약 1500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날 길선주 장로님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임종을 앞둔 한 나의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나는 '걱정마오, 내 그렇게 해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나는 미망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방해했으며, 100달러를 내일 아침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때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죄에 대한 통회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예배는 주일저녁 7시에 시작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그 시간 동안에 약 12명이 죄를 고백하였답니다.
한 의료 선교사의 요리사는 '나는 매번 의료 선교사를 속여 왔으며, 내 집과 재산이 의사를 속여 확보한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요리사는 자신의 집을 팔아 그 선교사에게 그것을 모두 갚았습니다. 한 선생은 선교회를 위해 500달러의 돈을 선교사로부터 받아 80달라의 땅을 사고 420달러를 자신이 가졌다고 고백하고 그가 갖고 있는 전 재산을 팔아 선교회로부터 사취한 420달러를 다 갚았습니다.

평북 의주에 아내와 한 자녀를 둔 남자가 가족을 떠나 부자가 되어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는데 회개하고 본 처에게 돌아갔습니다. 수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통과한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어느 저녁에 공공집회에서 간음죄를 고백했습니다.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간음죄를 범한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해주었습니다. 빈둥거리는 호기심으로 교회에 찾아온 한 갱단의 두목이 죄를 깨닫고 회심했습니다. 2개월 남짓한 동안에 2000명 이상이 회심했습니다." 1907년 중간까지 평양 지역과 관련하여서 3만 명이 회심했다고 합니다. 장대현교회는 앉을 자리가 없어 여인들이 먼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난 후 남자들이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910년 10월에는 4천명이 한 주에 세례를 받았답니다. 부흥의 결과 사도행전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깊어졌습니다. 죄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죄용서의 기쁨과 평화가 넘쳤습니다.

인간관계의 회복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이유로 쌀과 설탕 및 약을 얻기 위해서,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던 사람이 이제 순수한 동기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평양은 어디에가나 기도 소리 찬양 소리가 울려 퍼졌고 전국에 걸쳐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1910년 백만구령운동을 하게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보내고 중국과 사할린, 연해주, 하와이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였고 강력한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정치, 문화,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희망을 제시하였습니다.

부흥 운동은 개인과 교회, 가정과 사회를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충만은 받은 사람들의 부흥 운동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 사회가 실현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영적 각성이 이루어집니다. 부흥이란 용어는 리바이벌, 영적 각성이라는 말로 죽었던 심령을 살리는 것입니다. 성도답지 못한 사람이 성도답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거룩을 새롭게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무감각하게 살던 신자들이 죄악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며,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구령의 열정이 불붙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심령이 되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불타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여 우리의 심령과 공동체가 새로워지고 마음과 몸이 치유되고 변화되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침체된 심령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삶의 비전과 환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부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느헤미야 시대 때의 부흥 운동도 그랬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유다인들이 본성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나팔절이 되었습니다. 종교력으로 나팔절은 나팔을 크게 불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 주시고 광야에서 인도해 주신 것을 기념하였습니다. 민간력으로는 1월 1일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드리는 새해 첫날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100여년 동안 이루지 못한 성벽을 재건하고 포로에서 돌아와 고국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이제 성벽까지 완공되었으니 외형적으로는 과거 예루살렘의 영광을 회복하였는데 아직 내부적으로는 참된 복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주전 536년에 바사 왕 고레스가 스룹바벨을 통하여 1차 귀환하였습니다. 이들은 고레스 왕으로부터 성전 재건을 허락받아 25년 만에 주전 515년에 완공을 하였습니다. 주전 445년에 3차로 귀환한 느헤미야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성전이 더러워져 있었습니다(13:4-9),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13:15-22), 유대인의 공동체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결혼 제도가 무너져 있었습니다(13:23-28). 느헤미야와 동시대의 사람 말라기가 기록한 말라기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제사장들을 자기 직무에 싫증이 났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귀찮았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여호와께 병들고 흠 있는 짐승들을 바치면서도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말1:6-14). 성직의 품위는 실추되었습니다.(말2:1-9) 백성들은 안식일을 무시하고 버젓이 장사를 하였습니다. 믿음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 족속인 레위인들은 생계 마련을 위해 자신의 직무를 버려야 했습니다.(느13:10) 이러한 영성의 약화는 사회의 윤리와 개인의 도덕적 문란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혼이 성행하였으며(말2:13-16), 부자들은 임금을 착취하고 약한 자들을 이용하였습니다(말3:5) 그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차라리 성전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릇은 좋은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그릇 속에 오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제 부흥 운동을 통해 민족이 새로워졌습니다. 어떻게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까?

1. 말씀을 들음과 반응(1-6)/기록된 말씀
이 때 백성들이 무엇을 요구합니까?(1)
제사장이며 학사인 에스라에게 율법을 가져오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율법책은 어떤 책입니까? 여호와께서 이슬라엘에게 명하신 율법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김집사님에게 이집사님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소설책이나 교양나 참고서가 아닙니다.

그러자 에스라가 어떻게 합니까?(2)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무엇을 합니까? 새벽부터 오정까지 한 6시간을 읽었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3)
알아들을 만한 뭇백성들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때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백성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보다 더 잘 볼 수 있게 하고 보다 더 잘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좌우 편에 제사장들이 섰습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성경책을 폈습니다. 이 때 모든 백성들이 일어섰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앉아서 들었고 기도할 때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일어 섰습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며 전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의 태도이고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일어서는 백성들을 보고 에스라는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며, 하나님의 통치권이 온 세상에 미침을 찬양하였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6)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삼중적 응답니다. '손을 들고'는 '광대하신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을 만큼 부족함을 시인하는 외적 표현입니다.
'아멘 아멘 응답하고'는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에스라의 말에 백성들이 온전히 동감했었음을 말해줍니다. '아멘'이라는 표현은 집회시 회중들의 응답으로 다윗 시대 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대상16:36).
'몸을 굽혀...경배하였느니라'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의 외적인 표현입니다(대하7:3).

말씀을 듣고 말씀에 반응함으로 부흥 운동은 일어났습니다.
말씀듣기를 원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가? 경제학자가 무엇을 말하는가? 언론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30분 귀기울이는 것도 지루해 하며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6시간을 경청하였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받겠다는 순종의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아멘을 소리 높이 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어 영혼을 구원하게 합니다.
요20:31에 성경을 기록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됩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믿음은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텔레비전을 감상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탐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했습니다. 물은 곧 말씀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게 되는 객관적인 요소는 성경이고 믿음을 갖게 되는 주관적인 요소는 성령님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벤허를 지은 웰레스는 성경 공허와 황당무계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기독교 불필요성과 모순,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벤허를 지었습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전직 육군 군의관이었으나 난폭한데다 알콜중독자였습니니다. 툴라라는 지방에 작은 농토를 구입했지만 농노들과 심히 다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6살 때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이 무서운 충격으로 인해 간질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28살 때 반역죄로 사형수가 되었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시베리아 열차에서 장교 부인이 건네 준 신약성경을 움츠크 감옥 속에서 읽은 중에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나는 진리보다도 차라리 예수와 함께 있고 싶다”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그는 총살 2분 전에 황제의 사면령이 내려져 기적적으로 살아나 위대한 기독교 작가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 2의 인생이 탄생됩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맛봅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과 위로를 누리게 됩니다.
진정 부흥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아이들의 인생에 부흥이 있길 원하십니까? 성경을 읽게 하십시오. 성경의 말씀을 듣게 하십시오. 성경을 묵상하게 하십시오. 성경을 암송하게 하십시오. 성경을 기록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십시오.

2. 말씀의 깨달음과 반응(7-12)/ 해석되는 말씀

에스라가 강단 위에서 율법책을 낭독하면 회중들의 중간 중간에 끼어있던 레위 사람들이 그 주변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다시 낭독한 후 그 의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7). 그들은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한 사람들이고 포로 2세 3세들입니다. 대부분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세 오경을 아람어로 그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율법을 깨달았습니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 때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9) 말씀을 깨달으면 정서적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울었습니다. 감격의 눈물이고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 때 울고 있는 백성을 향하여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9)
눌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팔절은 그 성격상 마땅히 기뻐하며 즐거워 해야 할 절기이기 때문입니다(레 23:24, 25;민 29:1-6;신 12:7, 12). 노예에서 해방된 날, 하나님의 인도를 즐거워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울지 말라고 당부한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10)
진미를 먹으라고 합니다.
잔치 분위기가 충분히 날 수 있도록 흥을 돋울만한 진미(珍味)들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예비치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 나그네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즐거운 날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들을 돌아보아 필요한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함께 즐거움에 동참토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습니다(삼하 6:19;에 9:22). 이 축제를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풂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며 기뻐할 수 있게하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말씀합니다.
레위 사람들이 다시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11)
이 때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12)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읽어 들린 말씀을 밝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말씀을 듣고 지성적 반응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깨닫고 정서가 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나타난 정서적 변화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슬픔과 기쁨입니다.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없는 부흥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29)"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말씀을 깨달을 때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교만이 드러납니다. 잘못이 드러납니다. 나의 영적 질병이 무엇인지 들어납니다. 내가 감추고 포장하고자 하는 위선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 것처럼 우리 마음에 견딜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평양 대 부흥회는 말씀을 들으면서 회하는 회개 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님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임종을 앞둔 한 나의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사취한 100달러를 미망인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이 때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죄에 대한 통회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주일저녁 7시에 시작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회개하였습니다. 부흥 운동에는 회개 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시야왕이 그러하였고(왕하 22:11), 오순절 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였습니다(행2:37).

회개하고 나면 영적 기쁨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닙니다. 느 8: 12,17에 크게 즐거워하였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즐거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즐거움, 하나님을 기대하는 즐거움, 삶이 회복되는 즐거움이 임하는 것입니다. 영육이 치유되는 즐거움이 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렘15:16에서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입니다.

3. 말씀을 밝히 앎과 반응(13-18)/ 적용되는 말씀

축제의 날이 끝난 다음 날 종교력으로는 7월 2일. 민간력으로는 1월 2일이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도급 인사들은 계속 에스라 곁에 남아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배우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신 6:6, 7) 여타 백성들을 지도하고 교육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밝히 알고자 하여'라는 말은 배움을 통하여 어떤 지식에 통달하고 그 결과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을 가리킬때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삼상 18:14;대하 30:22;시 32:8).
이들이 말씀을 통하여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14-15)
율법 말씀을 연구하던 중 초막절에 관한 가르침을 발견하였습니다. 칠월 절기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말씀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 인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기억하며, 토지 소산의 추수를 마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여호와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나무 가지지를 가지고 초막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16-18)
백성들이 나아가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하였습니다. 여호수아 이후 최대의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에 그들은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7일 동안 율법책을 낭독하였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을 밝히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식에 변화가 옵니다. 그 말씀을 깨닫고 정서가 바뀝니다. 그러나 행동이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부흥이 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과 같습니다. 말씀을 밝히 깨달으면 순종으로 삶의 부흥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식의 부흥, 정서의 부흥에서 끝내서는 안됩니다. 삶의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에 의한 개혁 운동입니다. 말씀으로 지난날의 죄를 회개한 그들은 과거에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고치었습니다. 일시적 감정의 흥분이 아니라 삶으로 정착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은 들음으로 끝나서는 아니됩니다. 사모함으로 끝내서는 아니됩니다. 내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나눕니다. 말씀을 듣고 이방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재물관이 달라집니다. 실제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면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용서하라하면 용서하고 나누라면 나누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밝히 알면 인생이 변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존 번연은 말씀을 밝히 알게 되자 천로역정을 지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밝히 알자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마태복음 28:19,20절을 발히 알고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를 변화시켰고 윌리암 캐리는 사54:2 말씀을 밝히 알고 세계를 향한 선교의 비전을 가졌습니다.
일명 큰 바위얼굴로도 알려진 유명한 미국 블랙힐의 러시모어산 화감암 벽에는 미국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네명의 대통령 흉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워싱턴,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의 대통령입니다. 이들은 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말씀을 밝히 안 사람입니다.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라고 말하며 전쟁터에서도 애독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어떤 방면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그가 자신의 생을 참되게 가꾸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고향에서 대통령 탄생을 기념하여 세운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답니다. 대통령이 고향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답니다.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것은 아이들이었답니다. 아이들은 몰려들어 대통령에게 물었답니다. “대통령 아저씨는 우리만 할 때 무엇을 했나요, 반장을 했나요” “아니다, 나는 너희만 할 때 아주 볼품이 없었단다. 운동도 못하고 안경을 벗으면 책도 보지 못했단다” “그러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요” “나는 매일같이 성경을 읽었단다. 그리고 내 뒤에서 밀어주시는 하나님의 힘을 믿었지. 또 나는 빌립보서 4장 1절 말씀을 굳게 믿었단다. 그리고 일단 믿기 시작하면 밀고 나갔단다”

돈에 한을 품고 오직 인생철학은 `나를 위해, 돈을 위해'로 살았던 록펠러가 말씀을 밝히 알자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로 인생철학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밝히 알기 까지면 진정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고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드렸다고합니다. 강철왕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가 말씀을 밝히 알자 전재산에 해당하는 45억달러를 드려 3천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부흥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한 사람 한사람이 말씀을 품은 열정을 가지고 결단할 때 부흥이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열정을 품은 한 사람 에스라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에스라7:10). 에스라7: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스 7:10)"
우리 모두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일 때 부흥이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든 백성이 다 한자리에 모였다(1) 말씀을 뜨겁게 사모합니다(3) 말씀 앞에 일어서서 아멘 아멘으로 응답합니다(6).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했습니다(잠 29:18) 이시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닙니다. 오늘의 위기는 정치, 경제적인 것보다도 도덕적인 위기이며 신앙적인 위기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라고 했습니다.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민족 위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