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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과 칭찬 (눅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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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칭찬

(눅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어느 유모 코너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예배 때마다 핸드폰 소리 때문에 항상 잔소리를 해 대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교를 한창 열심히 하고 계시는데, 또 “삐리리~~~” 하고 핸드폰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울리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도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도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핸드폰은 바로 목사님 주머니 속에서 울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으신 것입니다. 목사님의 그 다음 멘트에 성도들이 뒤집어졌습니다. 핸드폰 폴더를 열고, 목사님 왈, “아~하나님이세요? 제가 지금 예배중이거든요. 예배 끝나는 대로 바로 하늘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이같은 경우를 두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5)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빼리라

1. 본문의 “비판치 말라.”,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은 합당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건전한 판단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라면 반드시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僞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모세의 모든 권위를 물려받은 모세의 법적 계승자로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전체가 바리새인들의 위선(3절),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는 위선을 비판하며 경고하시는 내용들입니다.
(마23: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나아가 이들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준엄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께서는 비판과 정죄하는 대상과 그 내용을 정확하게 분별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판과 정죄에 대해 자신들의 잘못과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예수를 잡아 죽여 없애버릴 궁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 그리고 세리 삭게오 등에 대해서는 그 지은 죄에 대해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시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비판은 건전하고 정당해야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와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판과 정죄를 회개와 새로운 삶의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만하고 거만하여 비판과 정죄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새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살해한 죄를 범하였을 때, 나단 선지자는 왕으로써 다윗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죄인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 것도 없고 딸자식처럼 애지중지 기르고 있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인 가난뱅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행인이 그 부자 집을 방문하자 부자는 자기 집에 양이나 소는 아까워서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잡아가지고 자기 집에 온 사람을 대접했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런 놈은 마땅히 죽이리라. 그리고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게 하겠노라.”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정곡을 찔러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12:1-6)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고합니다.

“(삼하12:9-12)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이같은 하나님 말씀 앞에,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며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밤새도록 통곡하며 금식하며 회개합니다.(삼하12:16) 그리고 마침내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 아들을 얻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통치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겸손히 비판과 정죄를 받아들이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서 잠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9:7-8)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의 잘못과 지은 죄가 비판과 정죄함을 받게 되면 다윗처럼 정직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 있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본문의 “비판”과 “정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테’(χρ?νετε, krinete)는 습관적으로 비판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습관적으로 남의 의견이나 행동을 비방하고 부정하며, 습관적으로 비판을 일삼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남의 잘못이나 약점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어 정죄하려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법정에서 재판하거나 선악을 구별하는 일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재판관으로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금하신 것입니다. 심판이나 판결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한입니다.

(롬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예수께서 성전으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사람들 앞에 세우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요8:4-5)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를 시험해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구부린 채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계속 질문을 퍼붓자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 둘씩 슬그머니 사라지고 오직 예수와 그 여인만 남게 됐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

(요8:10)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이처럼 예수께서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끌려온 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하게 된 이유나 사연을 듣고자 하지도 않으셨고, 율법을 들이대어 죄에 대한 변명을 요구하시거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지은 죄를 더는 문제 삼지 않으시고 다만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역시 남의 잘못이나 약점들을 들어내어 판단, 비판, 정죄하기 보다는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대로 자신을 돌아보는 생활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처럼 상대방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판단을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상대방에 따라서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고, 상대방의 마음을 아주 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남을 비판하는 행위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전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래서 성경 로마서 15:1에서는 믿음이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피터 드러커의 <리더가 되는 길>이라는 책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영국에 R.D 레인이라고 하는 정신분석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의사 레인에게 아주 매력적인 여성 환자가 찾아왔는데 그녀는 ‘경직성 통합 실조증’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증세는 환자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질병입니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마시려고 하다 갑자기 그대로 굳어져버려 오랜 시간 그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여성 환자는 병원에 가도 전기 충격과 여러 가지 약물 요법을 실시할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병원에 가지 않고 치료하고 싶어서 몇 번인가 레인에게 진찰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진찰을 할 때, 레인은 그녀에게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강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지금까지 약점으로 여기고 있던 자신도 모르게 경직되는 병을 어떻게든 강점으로 전환할 수는 없는지, 약점도 관점에 따라서는 강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한 동안 그녀는 레인의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병을 약점으로 생각지 말고 그것을 강점으로 생각해보라는 제안에서 아주 좋은 힌트를 얻었고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은 어떤 곳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다 마침내 그림 모델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굳어진 채로 한 시간 넘게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으니까.》‘경직성 통합 실조증’이라는 질병으로 아무 것도 감히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환자가 의사의 말 한 마디, ‘경직되는 병을 어떻게든 강점으로 전환할 수는 없는지, 약점도 관점에 따라서는 강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 한 마디가 그 여성 환자의 삶을 긍정적이고 성공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좋은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인정과 격려, 그리고 칭찬 한 마디를 듣지 못해 훌륭한 재능과 능력이 사장(死藏)되어버린 안타까운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유명한 화가 로세티에게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스케치한 그림 몇 점을 로세티에게 내어놓으며 한 번 보아주길 부탁했습니다. 그러고는 잘된 점이 있는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라도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 평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로세티는 그것들을 주의깊게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그 그림들은 형편없고 또 예술적인 재능도 깃들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천성이 착한 그는 이러한 사실을 가능한 한 완곡한 말로 그에게 해주었습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실망한 방문자는 시간을 뺏어서 죄송하지만 다른 그림을 몇 점만 더 보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떤 어린 학생이 그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그림 뭉치를 살펴본 그는 그것들에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이 그림들은 참 훌륭하군요. 이것을 그린 어린 학생은 재능이 있습니다. 그 애가 화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애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노인의 얼굴에서 크게 감동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훌륭한 꼬마 예술가는 누군가요? 혹시 당신의 아들입니까?” 그러자 노인은 서글픈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40년 전에 그렸던 그림입니다. 만일 40년 전에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수만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제가 너무나 일찍 실망하고 포기해버린 셈이군요.”》40년 전에, 그 어린 학생에게 칭찬과 용기, 그리고 소망을 주는 격려의 말 한 마디가 못내 아쉬웠던 것입니다.

3. 사람은 책망이나 비판보다 칭찬을 통해 변화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책망이나 비판보다 칭찬의 힘이 더욱 큰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책망과 비판은 긍정적인 칭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공으로 가는 <칭찬 십계명>이라는 글에 보면, 《첫째,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이다. 둘째, 비판도 칭찬처럼 하라...여섯째, 한번 비판하면 아홉 번 칭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어 본 <정상에서 만납시다. See you at the top>라는 책으로 유명한 지그 지글러의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미개 부족의 하나인 바벰마 족(babema tribe) 사회에는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물론 순박하고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기 때문에 큰 죄라고 할 것까지 없지만 어쩌다 죄 짓는 사람이 생기면 기발한 방법으로 그 죄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먼저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를 마을 한복판 광장에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광장에 모여 죄를 지은 사람 중심으로 빙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한마디씩 외칩니다. 내용은 죄 지은 사람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이나 칭찬이어야 합니다. 그때 죄지은 사람의 장점, 선행, 감사, 미담들이 하나하나 열거됩니다. “넌 원래 착한아이야.” “작년에 비가 많이 왔을 때 떠내려가는 돼지를 잡아줘서 고마워!” “넌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해!” 하지만 의도된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 금지되며 심각하고 진지하게 칭찬해야만 합니다. 칭찬이 한 바퀴 돌면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던 사람이 서서히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분위기는 절정에 도달하고, 사람들은 한 명씩 나가 껴안아주며 위로와 격려로 죄를 용서해 줍니다. 행사가 끝나면 죄를 지었던 사람은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세상에 죄를 단죄하는 방법은 많지만 칭찬은 그 죄를 씻을 뿐만 아니라 용서하고 격려하는 강력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8:5-13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찾아와 간청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에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이같은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마8:10-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고 말씀하시자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칭찬하신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백부장은 비록 자신의 노예에 불과하지만 그가 병들어 몹시 고통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병든 하인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 하인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하인을 위해 자기 체면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도 능히 병을 고치시리라는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칭찬받을 만한 사람에 대해 반드시 칭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는 사람의 눈에는 보잘 것 없이 작은 교회였지만 칭찬만 받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습니다. 이로 인해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는 많은 환난과 궁핍한 가운데도 온갖 시험을 물리치고 죽도록 충성을 다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이로 인해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두 교회처럼 하나님의 칭찬만을 받을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 받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계2:8-11, 3:7-13)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세상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괄시받으며 살아가는 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과부가 받는 칭찬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과부에 대해 칭찬하신 내용은 이렇습니다.

(눅21:2-4)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비록 가난한 과부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 눈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보잘 것 없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것 하나일지라도 칭찬받을 만한 신앙과 생활은 결코 놓치지 않고 칭찬하시고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한 것에 대해 반드시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일 하나에도 칭찬할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판과 정죄하기보다는 남의 약점과 단점을 담당하며, 남의 좋은 점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여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며 뭇 영혼을 구원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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