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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내 생각의 차이(말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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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라기 1 : 1 - 6
제목  하나님과 내 생각의 차이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관계가 부부인 것 같아요.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 부부가 되면 둘인 것 같으나 하나이고, 하나인 것 같으나 둘인 관계가 되지요.  부부싸움을 할 때면 전혀 하나가 아니예요.  합치 될 수 없는 둘입니다.  그러나 관계가 좋을라치면 하나지요.  부모보다 형제보다 더 가까우니까요.  그래 무촌이라 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결혼을 탁구에서 복식경기로 비유하는 사람이 있어요.  둘이 한 팀이 되어서 하는 탁구시합 말이예요.  혼자 시합할 때는 개인기가 중요해요.  그런데 둘이 하는 복식 경기에서는 개인기도 중요하지만 팀웍이 중요해요.  테니스나 탁구를 쳐보면 나와 나의 파트너 사이가 중요해요.  서로 상대방에게 미루기도 하고,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 실패하게 되지요.  복식 경기는 항상 의사소통을 해야 하고, 혼자서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 복식 경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다는 말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고, 믿지 않았던 하나님을 지금부터는 믿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아니예요.  지금까지는 나 혼자 살아 왔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내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파트너가 되어서, 콤비 플레이를 이루어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생활이란 지금까지 나 혼자 살아왔던 방식대로 그냥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알고 있어요.  언제나 자기 본위인 사람이 있어요.  자기만 좋으면 되고, 자기만 편하면 돼.  그런데 이 사람이 결혼을 했어요.  결혼해도 똑 같아.  자기만 좋으면 되고, 자기만 편하면 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어.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원할까?  생각하지도 않아.  그러니 이 가정이 행복하겠어요?  불행해.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여자는 불행한데, 남자는 여자가 왜 불행한지 모른다는 거야. 
참된 신앙생활이란 지금까지 나 혼자 살아왔던 방식대로 그냥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대화가 중단되고 일주일에 한번씩 예배 드려 주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뭐예요?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에 나를 맞추어서 사는 것이지요.  이게 신앙이예요. 

말라기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의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제사 행위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물이나 바치는 예물들은 형식적으로는 맞아요.  그러나 내용면에서 보면, 속을 들여다 보면 전혀 성의가 없고 중심이 없는 것이었어요.  바로 이 때 말라기 선지자가 바른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해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가 왜 이렇게 타락하게 되었냐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예요.  자기는 하나님께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래 예배가 타락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을 해 주는 사랑이 아니라 그냥 함께 계셔 주시는 사랑입니다.
2절 上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과 유다 백성들의 생각하는 바가 달라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되묻는거예요.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러는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성전, 유다 백성들이 고생 고생해서 완공을 했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렸으면 하나님께서도 무엇인가 유다 백성들에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게 오는 정 가는 정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독립이 오거나 영광이 와야 하는데 오질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지도 아니하셨고 우리를 고생만 실컷 하게 하셨으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겁니다.  그래 속상한 것입니다.  속된 말로 열받는 것이지요. 
여기에 하나님과 유다 백성,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상당한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사랑하신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는 하나님이나 유다가 따로 따로가 아니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사랑하신 다는 말을 물질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부를 주시고, 땅을 주시고, 권력을 주시고, 독립을 주시고, 군사적인 힘을 주시고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단지 과거에 비해 집이 얼마나 커졌으며, 재산이 얼마나 많아졌는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했던 것이지요.  그래 하나님으로부터 속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그러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뭐예요?  하나님과의 동행이예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아는 목사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 말씀.  그래요 부모와 나의 관계가 그런거지요.  부모님이 유산을 많이 물려주면 훌륭한 부모이고, 유산이 없으면 별로 안 훌륭한 부모인가요?  저는 물려 받은 것은 결혼할 때 전세자금 2000만원 밖에 없지만 부모님께서 계신 것만으로도 좋아요.  의지되니까.  매일 만나서가 아니예요.  매일 목소리를 들어서가 아니야.  그냥 계심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지요.  의지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러시다는 것이예요.  우리를 부자 만들어 주셔서가 아니예요.  그냥 하나님께서 계심으로 나에게 힘이 되고, 나에게 의지가 되고,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말씀이예요.  무엇을 주셔서가 아니라 그냥 계심으로 말씀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입니다.
2절 下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특별히 선택하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미움이라는 단어는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즉 하나님의 사랑은 장돌뱅이 사랑처럼 이리 저리 다니다가 만난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하게 선택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① 하나님께서 전혀 택할 가치가 없는 자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형제입니다.  그것도 쌍둥이 형제이지요.  이 둘 중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야곱을 선택하셨나요?  야곱이 훌륭해서요?  그럼 에서는 형편없었나요?  아니예요.  사실 에서나 나으냐 야곱이 나으냐 우리에게 선택하라면 결정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에서도 문제가 있었지만 에서 이상으로 야곱도 문제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장점 단점 계산하고 선택한다면 에서를 선택해야 해요.  왜냐하면 에서는 큰아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셔요.  야곱은 선택받을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라는 말씀이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아도 그래요.  한결같이 선택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선택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도 그래요.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로 불리워 선택받았는데 당연히 선택받아야 할 사람이어서 선택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직분도 그래요.  나는 목사가 될 사람이야.  처음부터 그랬어.  그래 선택되는 사람은 없어요.  부족하고 무능한 나를 선택하시는 것이지요.  장로될 사람은 처음부터 없어요.  누구도 장로 될 만한 사람이 없어요.  부족하고 무능하지만 준비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거예요. 

② 한번 택한 자는 그가 부족하다고 해서 버리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택받았다 하더라도 본성을 속일 수는 없어요.  끊임없이 옛날 버릇이 나오고, 옛날 가치관이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요.  하나님의 마음에 비수를 꽂아요.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상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이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얼마나 자신 있었어요.  예수님의 일등 제자니, 물 위를 걸어 보기도 했고, 늘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이예요.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던 그도 주님을 배반해요.  속된 말로 주님의 뒷통수를 치는 거지요.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를 버리시지 않아요.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부르시잖아요.  그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시잖아요. 

왜 하나님께서는 택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택하셔요?  마땅히 선택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선택되면, 감사가 없어요.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자신만 있을 뿐이지요.  그렇지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인데. 
에서는 자기가 마땅히 선택되어야만 할 사람으로 생각했지요.  자신이 장자권을 팔아먹든 어쨌든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에서는 선택받을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거든요.  에서의 이런 마음은 4절 에서의 후손들의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요.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것을 다시 쌓으리라”  나는 할 수 있어요. 나는 능력이 있거든요.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일은 해도 하나님의 일은 하지 못해요.  자기의 이름은 드러내기 원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원하지 않아요.  자기의 영역을 넓히려는 마음은 있어도 하나님의 영역을 넓히려는 마음이 없어요.  그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지요. 

선택 받으신 저와 여러분!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 꿇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중심을 보시는 사랑이예요. 
6절 中, 下입니다.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집안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종들은 주인의 말씀을 따르지요.  그런데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다 백성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니요.  이런 오해가 어디 있어요.  그러는 것이예요.  자기들이 하나님 좋아하시는 제사를 얼마나 잘 드리고 있는데.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모시고 있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뭐예요?  유대인들의 중심은 다른데 있다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그럴 듯 해요.  겉보기에는 신앙이 좋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겉을 보시는 분이 아니예요. 속을 보시는 분이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말씀 드렸습니다.  아벨과 가인 모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어요.  그런데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 드려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드렸지만 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고, 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여지없이 거절 당하였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드려지는 예배라 하더라도 어떤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겉으로 볼 때는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왜 어떤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예배는 안받으셔요?  나의 동기, 마음에 차이가 있어서 그래요.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왜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은 중심을 보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늘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뭐예요?  마치 종이 주인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경청하는 자세로 귀를 기울이듯 하나님께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과 나의 귀와 나의 몸을 모두 열어 놓는 신앙을 요구하신 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네요.  내 삶이 어려워서, 내가 사는 것이 힘들어서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언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적이 있느냐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네요.  가벼운 물질로 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비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매 주일 교회에 앉아 있고, 가끔 성경공부도 하고, 헌금도 하고. 그래 나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는데 속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정선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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