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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망의 골짜기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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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성도의 삶이 늘 푸른 초장이고 잔잔한 물가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좋은 환경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쉬는,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살아간다면,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성도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도가 어쩌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오늘 본문에서 성도가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 그곳은 바로 “골짜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짜기”란 평지도, 오르막도, 돌길도 아니며, 그렇다고 내리막길도 아닙니다. 골짜기란 아주 깊고 깊은 협곡을 말합니다. 그래서 “음침한”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음침하다’란 깊은 계곡이라서 ‘해가 들지 않는다’, ‘늘 어둡다’, ‘앞뒤 좌우를 분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골짜기의 음침한 어둠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사망”, 즉 죽음처럼 어둡고 깊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그랜드캐년이나 외국 유명 관광지의 아름다운 계곡이 아니라, 해가 전혀 비취지 않고, 아주 험준하며, 또 독한 해충이나 혹은 맹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 원어에서 이 “사망의 음침함”이란 자연지리적인 의미라든지, 빛이 없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범죄 하여 그로 인하여 고통 하는 것이나, 실패로 인하여 평생 일군 사업이나 모든 재산을 잃은 것이나, 너무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경우나, 버림받고 소외되어 외로운 것이나, 혹은 병들거나 병으로 죽어가는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과 관계되지만, 사실은 그 이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경우만 해도 그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당사자만 느끼는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는 것은 ‘거의 죽음과 같은 상태’, 아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은 형편을 말합니다. 죽는 것이 차라리 은혜라고 여겨지는 형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여러분에게 소개한 사연입니다. 남편과 맞벌이를 하면서 고등학생 아들 하나를 키우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쓰러져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거리 좌판을 펴고 장사를 하는데, 고등학생인 아들이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몇 달 동안 전혀 연락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남편 보러 병원에 갔다가 자신의 몸이 아파 진료를 받았더니 그녀도 더 이상 정상 생활을 할 수 없는 질병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은 의식을 잃었고, 아들은 가출을 했고, 자신도 병이 들었고 …. 이 분의 상황이 어쩌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진 경우가 아닐까요?

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꽉 막힌 상황, 오도 가도 못하고,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을 일컫는 말입니다.

2. 어떤 성도가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될까요?

그러면 어쩌다가 이렇게 지독한 사망의 골짜기로 가게 될까요? 시편 23편에서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길을 잃은 양’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눈앞의 풀만 바라보고서 그것만 먹고 가다보니, 목자가 보이지 않고, 목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양떼는 보이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주님의 말씀대로, 성령의 이끄심대로, 즉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가 이끄는 대로 살지 않으면 그런 성도는 당연히 신앙의 바른 길을 잃게 되고, 그러다 보면 사망의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애쓰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하고픈 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 인간적인 욕망을 따라 그것대로 움직이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잘못 판단해서, 때로는 교만해서, 목전의 이익만 생각하다가, 목자가 인도하는 곳이 아닌 사망의 골짜기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되는 또 다른 경우는 목자 되신 주님이 그를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는 경우입니다. 목자는 자신의 양을 위하여 더 좋은 풀이 있는 곳, 양에게 더 좋고 유익한 것을 주기 위하여, 부득불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즉 주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더 성숙한 하나님의 양답게 만드시려고 훈련과 연단의 과정으로서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시련과 환난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윗의 경우, 나라를 골리앗과 블레셋으로부터 구하고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장인인 사울 왕으로부터 쫓겨서 십 수 년을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긴 도피 기간에 다윗은 가장 많은 시를 지었고, 평생을 함께 할 동지들을 만났고, 지혜로운 아내를 만났으며, 그의 신앙과 인격이 가장 성숙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근 나라들의 형편과 주변 정세, 장차 자신이 왕으로 다스릴 이스라엘 지경과 주변 지역을 발로 밟아 완전히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본문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은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할 때가 있다!’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을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에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옛 사람과 옛 습성과 우리의 어리석은 것들이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깨어질 때, 비로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 보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실패처럼 보이는 결과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에 상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더 큰 유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가 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은 아닙니다. 늘 목자의 곁에서, 목자와 동행하면서, 신앙의 바른 길을 걷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이끄심대로 순종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은 이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망의 골짜기로 가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다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사망의 골짜기에 있는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그렇다면, 사망의 골짜기에 떨어진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두려움”이란 일종의 ‘공포심’입니다. 일단 깊은 골짜기로 떨어졌다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높은데서 떨어져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몸이 가라앉으면서 ‘이제는 죽는구나!’를 느꼈다는 분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그 공포심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공포심입니다.

그리고 골짜기의 깊은 ‘어두움’이 주는 공포도 있습니다. 밤이 두려운 이유는 바로 이 어둠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까요! 또한 이 어둠의 골짜기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라는 생각,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두려움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선가 사망이나, 원수나, 사나운 맹수가 자신을 삼키려고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 주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부분에서 무협소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무협지의 흐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참 무협지를 즐겨보던 시절, 무협지의 내용은 거의 다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주인공은 어려운 수련 과정을 거쳐 제법 이름 있는 고수가 됩니다. 그러다가 자신보다 더 강한 고수를 만나 결투를 벌이다가, 그만 그 고수에게 패배하여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맙니다. 주인공이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본 원수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그 계곡을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인공은 아찔한 죽음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주인공은 당연히 죽을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그 아래 있는 샘물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 그 샘은 치유와 회복의 샘물이어서 그것을 마시고 모든 상처를 치유 받고, 그 물로 인하여 내공까지 수백 수천 배 늘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서 전설적인 절대 고수가 남긴 무술 비급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오래전 홀연히 사라진 절대 강자를 만나 세상에서 그를 이겨낼 적수는 하나도 없는 명실 공히 최고 강자로 거듭납니다. 그리고는 이제껏 아무도 살아난 적이 없다는 절벽을 가볍게 뛰어오른 뒤, 원수를 이기고, 세상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무협지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지요? 오늘 본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진 성도가 거기서 바로 자신과 함께 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즉 그 지독한 골짜기,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거기서 성도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골짜기’로 떨어지기 전에는 우선 눈에 띄는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대상, 만날 사람, 해야 할 일이 많아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골짜기에 떨어지고서야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려 그 지독한 골짜기로까지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악명 높은 수용소인 라벤스부르크에서 죄수로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는 라벤스부르크의 악몽이 있은 이후, 33년 동안 개인의 안식처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85세의 고령이 되었을 무렵,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아주 좋은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말했습니다.
“코리, 너에게 이런 아름다운 처소를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은 정말 선한 분이신가 봐?”
그러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이미 내가 라벤스부르크에 있었을 때도 선한 분이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들 보기에 가장 불행한 시절이었던 강제 수용소,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은 코리텐 붐 여사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코리텐 붐은 강제 수용소라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고난의 현장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떠난 성도들이 어려운 처지에 빠질 때, ‘잘 됐다. 나 없이, 나 무시하고 산다더니 고소하구나!’ 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어느 누구도 찾지 않을 그곳으로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시 34:18,19).”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질병과 비극과 재난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하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다가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인정할 수 없지만,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믿으려고 애를 쓴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도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고불변한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즉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한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망의 골짜기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나 엄연한 현실이듯, 주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것 역시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성도가 한 눈 팔다가 사망의 골짜기에 떨어졌든지, 주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그리로 인도하셨든지, 아니면 평탄한 길을 가고 있든지,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는 어리석은 욕망이나 죄의 유혹이나 부주의 때문에 사망의 골짜기로 갈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성도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사망의 골짜기로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 골짜기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게 여겨지는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서 깊고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달리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자신의 연약한 것을 철저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자신을 현실적으로 꼭 잡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자신을 그런데로 이끄신 이유를 생각하고서, 주님에 대한 큰 기대, 주님이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의 골짜기는 결코 두렵지 않는 곳, 은혜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는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힘과 능력을 얻으며 새로운 출발을 할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만약 후에라도 그러한 자리에 이르게 되거든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지독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내가 주님을 만나는 자리, 내가 변화되고 새롭게 될 자리,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자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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