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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시 68:1-6,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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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구약, 시편 68:1-6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신약 신약, 마태복음 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오정의 이력서

한 동안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오정 시리즈라는 유머가 유행했습니다.

사오정이 오랜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취직을 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친구인 저팔계의 단벌 양복을 빌려 입고 이력서를 들고 모 기업을 찾아 갔습니다. 그는 이력서를 자신 있게 내어놓았습니다.

그 이력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성명: 사오정/ 본적: 누굴 말입니까?/ 주소: 뭘 달라는 말입니까?

호주: 가 본적 없음/ 성: 사/ 신장: 두 개 다 있음

지원동기: 우리 학과 동기인 영구랑 같이 지원했음.

모교: 엄마가 다닌 학교라서 난 모름

자기 소개: 우리 자기는 아주 예쁨

수상 경력: 아직 배를 타본 경험이 없음

같은 말도 다르게 이해를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가장 먼저 사회 문제로 등장하는 것이 집단 이기주의 입니다. 과거 한국 사회는 ‘혈통적 우리 의식’, ‘파당적 우리 의식’, ‘지역적 우리 의식’에서 보여주는 편협하고 원시적인 우리 의식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를 변호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노동 조합 등 여러 단체들 역시 이런 원시적 우리 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현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를 때, ‘우리’ 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만 ‘우리’의 아버지로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개인주의의 보증인이 아니시고, 집단 이기적 욕구 충족을 위한 보증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일의 보증인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생긴 변화 – 자기 발견

세상에는 분열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내 삶에서 제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보는 시선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주셔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을 자랑할만한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바리새인이고 종교심이 깊은 유대인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교만이었습니다. 그 기준은 혈통과 학벌과 종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아 동일화의 기준을 혈통과 학벌과 종파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우리의 경계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경계선 밖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그의 인식에 급격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바울은 자신과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도 바울은 더 이상 교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앞에서의 진정한 자기 발견은 스스로 죄인인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빌 3:7-9).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이전에 귀중히 여기던 것들 – 자아 정체감의 자랑스러운 것들을 – 모두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더욱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향한 새로운 시선이 생겼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라 – 타인 발견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면 또 다른 변화가 생깁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우리가 육신의 관점대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방법대로 사람을 볼 때는 우리와 다른 점만을 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만 골라서 보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약하면 자기 자신도 약하고, 다른 사람이 죄인이면 자기 자신도 죄인임을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가 소유하는 공통분모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공통점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닌 온 세상 사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가 이 말을 깨달을 때 우리의 부정적 사고가 변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은 진정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변하게 될 것이고, 화목하게 하는 삶울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평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후5:18). 화평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과 생명을 모두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삶은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희생적인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린도후서 5:19).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 몫으로 돌리지 않고 새로운 용서를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세상으로 나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온 것처럼 우리는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 받은 우리

‘엘리자뱃 엘리엇’이라는 여자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여자 선교사는 남미의 한 부족을 완전히 복음화한 선교사입니다. 원래 엘리자뱃 선교사는 목사 사모였고 정확하게 말하면 목사 미망인입니다. 그녀는 신혼일 때 남편인 ‘짐 엘리엇’ 선교사와 남미 정글로 들어가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짐 엘리엇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원주민에 의해 살해 당해서 순교했습니다. 잠시 그 지역을 떠났던 엘리엇 사모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남편을 죽인 원주민들에게 다시 찾아가서 선교를 했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뱃 얼리엇 사모님께 신문 기자들은 질문을 합니다. 아마 엘리자뱃 사모가 천 번 정도 듣고 대답한 질문일 것입니다.

신문 기자들은 “왜 다시 가셨습니까?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 때 엘리엇 사모의 답은 절대로 잊지 못할 말입니다.

“제가 그들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저는 내 남편을 죽인 사람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압도되었습니다.”

‘아,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기적인 신앙에서 공동체적인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이 더 깊어지면 인류 공동체로 그 신앙이 확대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 5:43-45).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예수님이 모든 부분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분명한 것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약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가진다면 우리를 찾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소망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은 한 형제 자매입니다.

결국‘우리’라는 낱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또는 ‘우리’라는 단어에 어떤 사람을 담을 수 있느냐가 신앙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입니다.

아빠라는 호칭은 가정에서 친 아버지만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은 한 아버지의 친 자녀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세리나 창기나 죄인이나 의로운 자나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인류는 형제 자매로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여자나 남자나, 어린이나 어른이나, 지배하는 자나 지배를 받는 자나, 황인종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모든 교회와 교인은 한 가정의 지체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분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는 세 가지 입니다.

1. 하나님의 거룩성

첫째, 하늘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냅니다.

하늘은 이 세상과는 구별된 장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물리적 우주의 하늘이 아닙니다. 하늘은 거룩함과 초월의 상징입니다. 하늘은 현세와의 무한한 간격을 상징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풍요로운 생명과 기쁨을 약속하며 사람들의 추구와 동경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온 피조 세계 위에 계시듯이 하늘 위 높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세상보다 우월하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

둘째로 하늘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늘은 높다는 의미이고, 높다는 것은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높다는 것은 능력으로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보좌는 거룩하고 높고 권능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리시도다”(시 18:13).

하나님은 천둥과 번개를 내리시며 산들을 태우시며 진동시키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의 임재하심

셋째로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하늘에서 이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고하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하나님은 본성적으로는 우리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이 세상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개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신론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공장에서 시계를 만들고 시계에 건전지를 넣고 스위치를 넣으면 그 시계는 만든 사람이 없어도 잘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자식을 낳고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낳고, 양육하고, 학교 교육을 시키며, 결혼을 시키고, 직장 생활, 손자 교육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시 68:5-6a).

하나님은 거룩한 점에서 이 세상과 구별되지만 이 세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그 하늘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인간은 시공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 알리바이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든 편만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하늘에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창 밖의 하늘을 쳐다보며 저 위에, 더 위에, 그 위 어디쯤에 하나님이 계시겠지 생각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저 밖의 하늘 꼭대기 어디가 아닙니다. 먼데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만나려면 내가 영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막연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성경읽기, 기도생활, 전도생활, 십일조, 주일 성수, 봉사활동 등 여러 가지 실천 목표를 정해 놓고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실천 목표들을 잘 지키면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그런 잣대로 재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도 그러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질문했습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는 영생을 어떤 행위로서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아무리 설명해도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진정으로 인격적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경험해서 잘 압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인 만남도 이와 같습니다.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을 날아갔던 사람은 구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신은 없었다. 주변을 아주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역시 신은 보이지 않았다.”

이 사건에 가장 큰 상처를 받은 나라는 우주 개발의 라이벌이었던 미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가가린의 발언은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우주 비행사 제임스 어윈(James Irwin)은 달 표면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돌아와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달에서 만난 하나님은 그 존재가 너무 분명해서 눈에 보일 것 같았습니다.”

“저 멀리 지구가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신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설명 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이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것을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만들 수 없다.”(제임스 어윈 James Irwin)

제임스 어윈의 이러한 고빽은 가가린의 발언에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우주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는 나사(NASA)를 그만 두고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곁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달에서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답해 준다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저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달에서는 달랐습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직접 그 자리에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놀라운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저는 경험했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 분명해서 눈에 보일 것 같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확인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나님은 보이거나 들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오히려 우리의 삶을 다 변화시킬 만큼 더욱 분명하게 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높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내려올 수도 있는 하늘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정의를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어디나 하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나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므로 어디든지 하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하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아기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셔서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욱 잘 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가까이 계시는데, 얼마나 가까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숨결이 닿는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저 하늘에 수 많은 별들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람들 사이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 가운데 계시고 우리 각자의 마음 한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빠로서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시면서 모든 사람을 형제와 자매로 맺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단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세상의 지탱자시요, 우리의 매일의 삶을 보살펴 주시는 분만이 아니라, 동시에 현재를 넘어서서 우리의 미래를 가리켜 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과 딸로서 자유한 자가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이 아니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을 보살펴 주시며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숨결 닿는 곳에서 우리의 한 숨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면 들으십니다. 이것을 알고 담대히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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