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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길(1) - 사귐 (창 11:31~창 12:5, 롬 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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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1) - 사귐
창11:31~12:5 / 롬8:5~11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예수 믿는 일(신앙생활 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는 일이 쉬운 분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어렵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예수 믿는 일(신앙생활 하기)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잘 믿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잘 믿으면 삶이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에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아멘?  괜히 아무 생각 없이 아멘하지 마시고 잘 생각하고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내 통장의 잔고가 마이너스가 되고, 우리 가족이 월세 집을 전전하고, 우리 집 쌀통과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고, 내 직장이 불안하고, 내 건강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되서는 안되겠죠.  그런 면에서 우리가 우리 삶을 계획성 있게 잘 꾸려 나가고, 내 미래를 잘 계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 삶이 질서가 있어야 하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더 활기 있고 열심히 일해야 하고, 내 가정이나 식구들에 더 관심을 가져주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이 더 나아지고, 하는 일이 잘되고, 우리 가정이 더 윤택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되길 원하시지 잘못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평화와 행복의 하나님이지, 심판과 저주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으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하니까 자동적으로 물질 축복받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만사형통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물질 축복이나 세상에서 내노라하는 인정받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세상의 일과 하나님을 믿는 일은 전혀 별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와는 반대입니다.

우리 삶은 늘 불완전하고 우리의 미래는 불안합니다.  오늘날처럼 치열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회사들은 오늘도 수없이 부도를 맞고, 병원에 가보면 정말 수많은 위급 환자들이 고통을 받으며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하루 하루 전쟁을 치르듯이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황된 신앙일지 모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일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청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합니다.  간절히 내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믿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하고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지, 도깨비 방망이나 보험회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먼저 우리와 인격적인 사귐을 바라십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제쳐 놓고 그저 기도를 돈 나와라 뚝닥, 금 나와라 뚝닥 하는 식으로 한다든지, 내가 예배출석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교회 봉사를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보상을 해 주어야 합니다라는 식의,  이만큼 보험료를 냈으니까, 보험금 타먹으려는 듯이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오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 자녀가 여러분과 깊은 사귐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깊이 대화하고, 이해하고,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부모의 고충이나 부모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귐 속에 부모도 자녀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마음이 어떤지, 자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합니다.  그때의 그 요청과, 여기 또 자녀가 있습니다.  그 자녀는 부모와 깊은 사귐의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늘 부모로부터 어긋나 있고, 부모의 말은 귀 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필요할 때는 그저 돈을 받아내기 위할 때 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은 차이가 없을까요?  같은 요구라도 그 요구는 다릅니다.

아마 부모와 사귐을 갖고 있는 자녀는 자신이 무엇을 요청하다가도, 부모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이 요청한 것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요청의 목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데 있지 않고 자신의 삶이 풍성해지는데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원하는 것도 그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와 사귐을 갖고 있지 않는 자녀는 자신이 무엇을 요청하면, 그것을 관철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는 부모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관계를 힘의 대결로 보지 사귐의 관계로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요청한 것을 얻어내지 못할 때, 그는 억울해하고 원망을 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귐 없이 요구하는 것과 깊은 사귐 속에서 요청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은 절대적입니다.  아니, 신앙훈련이란 하나님과의 사귐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 많은 경우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면서 세워놓으신 원칙에 따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는 것이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됩니다.  콩을 심어 놓고 열심히 기도 한다고  팥이 되지는 않습니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면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정말 무슨 일인지도 모를 시련이 있을 수 있지요.  세상에는 정말 원인모를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욥처럼, 내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지 정말 의심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걱정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경증적인 것입니다.  단지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주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도 평소 하나님과 어떤 사귐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의 말씀은 그것입니다.  하박국은 한 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주전 7세기 초 유다가 바벨론의 그 거대하고 교만한 위협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었을 때,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1:2-3)

그때 하박국은 하나님께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3-4)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들은 후에 하박국은 바로 우리가 읽었던 노래를 부르면서 끝이 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리고 이 노래의 핵심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새번역,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말은 그저 교리적인 문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자의 고백입니다.  이 말은 이런 말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지금 저의 밭에는 먹을 것이 없고 저의 외양간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의 삶에서 비어 있지 않습니다.  저의 삶은 주님의 임재로 가득차 있으며 주님은 지금도 저의 삶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저의 삶을 주관하시며, 저의 삶에서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의 발에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저의 삶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고백자의 삶의 질적으로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이런 사람을 절망시킬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이런 사람의 삶을 휘두를 수가 없습니다.  그야 말로 “높은 곳”을 다니게 됩니다.  여기서 높은 곳이란 사람들에게 내노라 뽐낼 수 있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삶이 쉬워진다”는 말입니다.  삶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이 이런 믿음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 믿음의 길이란 하나님과의 사귐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의 길을 간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세상의 물질 축복 받은 이야기로 읽는다면 이는 성경을 크게 잘못 읽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그렇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12:1-2절에 있쟎아요?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신약까지 포함해서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즉 영적 아버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귐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한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복 자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복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개정 개역: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사는 사람의 특징이 “내가 복을 받았구나가 아니라, 아, 내가 복이구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성숙해지면, 우리는 내가 복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에서 아, 내가 복이구나를 계속 발견해 나가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2절 말씀보다 실은 1절 말씀에 좀더 주목을 해야 합니다.  “너의 터전을 떠나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나와 사귀어 보자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동안 네가 마음을 주고 사귀던 너의 터전을 떠나 새로운 사귐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초청입니다.

너의 고향, 친척과 아버지 집은 그동안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며 기대고 있었던 것들일 수 있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우리가 가졌던 유아적인 안전의 표상들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쌓아 왔던 나의 이미지,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나의 업적, 익숙해 있는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왔던 나의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내가 행사하던 나의 힘일 수 있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고집 부렸던 나의 아집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떠나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람의 아버지였던 데라는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르와 가나안의 중간 지점이며, 번성했던 도시였던 하란에 도착하자 그는 거기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도 어떤 목적이 있어 떠났겠지요.  아마도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야 여러 이방신상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살기에 더 환경이 좋은 곳을 찾으려 했었는지 모르겠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전망이 더 좋은 곳을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어떤 목적은 있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진정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벌 받지 않으려고, 안전을 얻어내려고, 혹은 하나의 악세사리로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란도 꽤 적당한 장소였습니다.  멀리 가나안 까지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란에 머물러 살다가 거기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하나님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편하고 안전하게 잘 사느냐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데라의 모습은 이런 신앙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나의 안전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고, 내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잘 되고,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소리 정도 듣고, 조금 더 나가 교회에서 믿음 좋고 헌신적이라고 칭찬 듣는 정도에 안주하여, 진정 중요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잊어버리고 나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면, 우리는 데라와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볼 때 꽤 적당한 장소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율법적이 됩니다.  영이신 그분과의 실제적인 사귐보다는 어떻게 하면 신앙 좋은 사람처럼 보일까가 우선이 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사람으로 보일까가 우선이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따내는 것으로 전락하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헌금, 봉사는 하나님에게 흥정하기 위한 미끼가 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내가 이렇게 해야지 하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순수하게 하나님과의 사귐을 생각하고 실제로 사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가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내 자신을 섬기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하란에 머물다가 죽는 인생이 됩니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내가 복이 되는 그 은혜는 누려보지 못한 채, 율법 지키는 것으로 허덕대다가 사람들의 인정에 으쓱하고 사람들의 알아주지 않는 것으로 상처받는 불쌍한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종교인으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적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은 율법을 넘어선 믿음의 길이요, 은혜의 길입니다.  종교를 넘어서는 영의 길입니다.

율법의 특징은 주어진 계명들을 잘 지킴으로서 내가 빛을 보고 영광을 얻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계명을 잘 지킨 이상적인 나를 상정해 놓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그것들을 지켰을 때는 그것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혹은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따라가지 못할 때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지켜도 문제, 못 지켜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 은혜의 길, 영의 길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율법 하나, 계명 하나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신경을 쓰기보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려고 합니다.  만일 어떤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는 자책을 하거나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책은 교만의 다른 이름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는 자책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지고 나갑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부족합니다.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담백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다시 경험합니다.  바로 자신의 잘못과 실수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자리임을 경험합니다.

데라와는 달리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통해 하나님과 흥정하거나 무엇을 따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그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었고, 그분과의 사귐에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성경은 한마디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하나님과의 사귀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이란, 잘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듣기 위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사귐의 길은 늘 짜릿하거나 행복하거나 늘 신나기만 한 길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멀고 지루한 길입니다.  어떤 때는 불안하고 고통스럽기도 길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자신의 아픈 모습, 상처 난 모습, 보기 싫은 자신을 모습을 늘 가지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고(하나님은 내 껍데기와 사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둘째는 아무런 응답도 없고 위안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세상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육의 세력(세상의 기운)과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성장은 여러 가지로 방해를 받아 더디게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귐 안에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더딘 성장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황금 사과를 열지 못하고, 맛좋은 큰 수박을 열매 맺지 못하느냐고 닦달하지 않습니다.  그래 줄기에 붙어만 있어라,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진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셔서 여러분들을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십니다.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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