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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2) (시 23:1~3; 눅 15: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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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2)
시23:1~3; 눅15:13~24

기독교 초기 교부였던 사람 중에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철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이 사람은 당시 명예와 경제적인 부를 누릴 수 있는 수사학 교사가 되어 밀라노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마니교에도 깊이 심취되어 그곳에서 영적 허기를 해결해 보려고도 했습니다.  마니교는 동방종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기원을 두고 있었는데, 모든 신앙과 신조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한 증명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거스틴의 학문적인 성향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그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로 있으면서, 종교적인 경향을 띠는 철학인 신플라톤주의를 깊이 탐구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16살에 한 여인과 동거에 들어가고 2년 후에 아들을 볼 정도로 어떤 삶의 허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서른이 넘어 기독교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삶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쓴 “참회록”에서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방황을 소상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그는 참회록 1권 1장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없나이다(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주 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우리가 한 주간 묵상한 말씀으로 되새겨 본다면,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 중에 하나님께 아뢰었는가?  그래서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나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 주시는 경험을 하였는가?  평화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면서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지난 주일에 안식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는 말 가운데 “안식하셨다”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그치다” “중지하다”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주일)은 먼저 그치는 것이다, 무엇을 그칠까요?

나의 하던 일을 그친다, 늘 목표를 세워놓고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강박관념에서 성취와 생산을 그친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갈 때 일어나는 걱정, 근심, 긴장을 그친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그친다, 우리가 가진 소유욕과 문화에 그저 순응하던 우리의 태도를 그친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살아갈 때 생겨나는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안식일(주일)은 우선 이렇게 우리의 삶이 관성으로 굴러가던 데서 잠시 그치고 머물러서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관성으로 굴러가던 삶을 잠시 머물게 하고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보게 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안식일의 두 번째 의미는 “쉬다”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하던 일을 그친다”는 말은 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쳐야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쉼은 우리를 우상숭배에서 믿음으로 옮겨줍니다.  우상숭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우리의 안전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제공하는 안전은 모두 속임수이며 거짓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며, 그것을 신뢰하는 것을 그칠 때 참된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는 내가 마치 하나님인양 살아가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구원을 완성하셨으며, 계속해서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 안에서 쉬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던 일을 그친다고 해서 참된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육체적로는 늘어지게 쉬더라도 참된 영적인 쉼이 없다면, 그 쉼은 쉼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없습니다.

오늘 신약본문인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에게는 쉼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은 집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지방에 사는 한 사람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게 되었고, 돼지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 싶을 만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오늘 17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 말은 안식의 참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주일)은 우리에게 돌아갈 집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삶의 온갖 삶의 고통 속에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삶의 환경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주눅 들게 하고,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더라도, 우리는 그곳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 돌아갈 아버지의 품이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날이 주일입니다. 

이 아들은 돌아가 아버지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가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군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다음 말은 듣지도 않고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우리가 잔치를 벌이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우리가 참된 쉼을 얻는다면, 바로 이곳에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안에서.

오늘 구약본문은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메누호트, 메누하) 물가[쉼의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한 “쉴만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누하”라는 말입니다.  메누하라는 말은 쉼이라는 뜻이지만, 노동이나 힘든 일을 쉰다는 말을 훨씬 넘어서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잘 알아서 얻게 된 고요, 평온, 평화, 휴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을 믿음으로서(신뢰함으로써) 얻게 되는 쉼입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인 쉼이 아니라, 진정한 쉼입니다.  나와 하나님이 관계가 없는 쉼은 언제라도 방해를 받을 수 있는 쉼입니다.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거나 다른 신들을 선택할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고요와 평화를 스스로 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이 메누하라는 말은 내세의 삶, 곧 영생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유대인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랍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주의 엿새 저녁을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의 출입을 지켜 주소서”  대신에 안식일 저녁에는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를 당신의 평안의 장막으로 맞으소서”

시편 23편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편이지만 우리는 이 시편이 주는 깊은 위로를 과연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요?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심으로 우리에게 육적이 양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만족과 고요에 잠기게 하십니다. 

영적인 쉼에 꼭 필요한 도구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토라는 안식일의 초점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의 일부를 토라를 깊이 연구하는데 썼습니다.  주일에 하나님 말씀을 듣고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은혜 안에 쉬기 위해 마음과 영을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에 고정시키고 일상의 일들을 잠시 한쪽으로 제쳐두게 됩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보면, 하루는 아침에서 저녁까지가 아니라, 저녁에서 아침까지라고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이런 시간개념은 우리를 은혜의 리듬에 맞춰준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고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시작하신다.  우리는 깨어나서 우리가 만들지도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수고해서 얻은 것도 아닌 구원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즐기며 나누고 전개하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어 누리는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우리가 잠자는 동안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들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평화의 장막, 그분의 임재의 거처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희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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