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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3) : 받아들임 (대하 36:21~23;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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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3) - 받아들임
대하36:21~23; 눅13:10~17

우리는 희망교회의 첫 예배를 드리면서, 안식에 대한 의미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유대인들이 그렇게 소중히 생각했고, 예수님도 그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한 안식일, 즉 주일에 대해 생각해 보며, 주일이 갖는 참된 의미들을 말씀으로 삶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우리가 평생을 통해 몸과 마음에 익혀야 할 내용입니다.

안식은 그침의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그저 우리가 습관적으로 굴러가던 관성에서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던 일들을 그칩니다.  엿새 동안 정신없이 살아왔던 우리의 삶,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저 일에 밀려, 시간에 밀려, 습관에 밀려 살아오던 삶,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늘 걱정과 근심, 긴장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삶에서 벗어나, 이 주님의 날에 잠시 내 삶에 침묵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그침 속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로 평가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딸 그 자체로 나는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침의 회개뿐만 아니라 우리는 쉼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쉼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이 붙잡고 계시다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참된 쉼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돌아갈 아버지의 품이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그 분의 평안의 장막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침의 회개와 쉼의 믿음을 넘어, 안식일의 받아들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신약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허리가 굽어진 여인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허리가 굽어졌다는 말은 그녀가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곱사등이처럼 등이 굽혀져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펴지 못하고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품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립니다.  남이 허리를 못 쓰게 짓눌렀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인을 예수께서는 우선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불러냅니다.  이렇게 주님은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가까이로 부름으로써, 그녀 안에 발견한 온갖 장점들을 그대로 인정하여 그녀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애정에 찬 손길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십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머리를 들어 올려라” 말씀하지 않고 그녀에게 손을 얹어 그녀 스스로 자기 자신 안에 들어 있는 힘과 품위를 만나도록 하십니다.  18년 동안 누구도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그녀에게 말하거나 접촉해오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드러운 손길로 만지시며, 그녀를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해 주시고, 정서적인 치유를 해 주시며, 예배 공동체에 완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당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네가 네 병에 놓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삶을 짓누르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래서 허리를 펴고 살지 못하던 데서부터 풀어놓으십니다.  본분은 그녀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허리를 폈다는 말은 “다시 지음 받다”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다시 지음 받았고, 마침내 자신이 당당하게 하나님과 연결된 자라는 자신의 근본을 발견합니다.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그런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안식일-주님의 날에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꼿꼿이 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가치를 인정할 때,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허리를 펴고 꼿꼿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가치를 우리가 성취하는 업적에 따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물로 주신 품위 때문에 지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죄인으로 취급하려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아들, 딸로 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특정한 측면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졌으며, 너는 너 자신 그대로 그 분 앞에 존재해도 된다”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예수가 선포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바로 이 기쁜 소식, 복음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받아들임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도 거부가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늘 이야기 하는 식상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회당장의 저항처럼, 우리 안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을 들어 저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본분을 통해 곱사등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졌으며, 너는 너 자신 그대로 그 분 앞에서 존재해도 된다”

오늘 읽은 구약성경 본문은 특별한 본문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역대기 상, 하는 구약성경 중간쯤에 나옵니다만, 구약의 원전인 히브리 성경으로는 역대기 상, 하는 마지막 책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성경으로는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구약 성경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으로 맨 마지막 말은 <워야알> “올라갈지어다”혹은 “그들을 모두 올라가게 하여라”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역대하라는 성경은 유다 역사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역대하는 대부분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그리고 그 백성들이 여호와의 길을 따르는데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로 다윗 왕조는 어떻게 망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어떻게 파괴되고, 예루살렘 도성은 어떻게 멸망했으며, 유다인들은 어떻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지를 그 책은 비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유다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하고 힘들었던 시대였습니다.  가장 암울했던 순간, 하나님이 곁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바로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칼에 죽고 남은 자는 포로로 끌려가고 그 땅은 황폐했는데, 그 황폐한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본문은 역대하의 다른 부분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희망의 선언이 선포됩니다.  그 안식의 7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바사(페르시야)의 왕 고레스를 통해 이렇게 선포됩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삼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라고 말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때도 임재해 계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그 땅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것이 역대기가 말하려는 요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고 계셨으며, 그러기에 70년이 지난 후, 그들의 포로생활이 끝났을 때, 그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이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신 것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간의 삶이 어떠셨습니까?  늘 평온하셨습니까?  순간 순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깔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고, 실패와 위축을 경험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이 경쟁의 시대에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을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짜증, 분노와 미움이 나를 한 없이 보잘것없이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그런 순간은 여러분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황폐한 땅이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했다”는 말씀은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의 순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가장 암울한 순간, 하나님이 곁에 계시기보다는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경험하는 날이 안식일 곧 주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그대로 받으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나의 삶의 온전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안식일,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만드시는 샬롬을 받아들이는 날.  하나님은 일곱째날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샬롬을 창조하셨습니다.  온전함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날,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샬롬을, 온전함을 창조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그치고 마치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안식일-주일을 지냅니다.  그것이 그침입니다.  또 우리 삶에는 참된 쉼이 없지만 이날만은 참된 쉼을 누려보라고 권고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는 온전함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이날만큼은 온전함을 받아들이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키시며, 황폐함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안식일의 쉼과 희망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을 그치려는 소극적인 행동에서, 온전함에 대한 적극적인 희망으로 옮겨갑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뿐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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