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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지혜 (마 22: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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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이스라엘 지도자 그룹은 당시 논란이 많았던 민감한 질문들을 각각 던집니다. 각각의 질문들은 왕으로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의도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무너뜨리시고 입을 닫게 만드셨습니다.

왕을 대적하다가 충격적인 비유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모의했습니다(15). 그 후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을 함께 예수께 보냈는데, 먼저 예수님을 추켜세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16) 주님을 바르게 평가한 말이지만 질문을 회피할 생각을 못하도록 압력이 가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질문은 어떻게 대답하던지 올무에 걸릴 수밖에 없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17) 세를 바치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백성들로 일제히 주님께 등 돌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가하다고 하면 헤롯 당원들은 반역 선동죄로 주님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 원래 민족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로마권력에 빌붙어 사는 헤롯 당원을 몹시 싫어했지만,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서 이처럼 다정하게 손잡고 함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악함을 아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주님을 인정하고 찬미하는 것 같았지만, 교활한 독을 품고 있었습니다. 시편에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37:12)고 한 것처럼, 주님을 왕으로 영접 않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인격 깊숙이 녹아 있던 그들의 교활함과 거짓이 드러내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주님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셋돈을 내게 보이라”하셨습니다(19). 당시 로마에 바치는 인두세는 통상적으로 로마 화폐가 사용되었습니다. 세금을 낼 때마다 백성들은 로마 통치하에 있는 뼈아픈 현실을 직시해야 했습니다. 동전에 황제의 얼굴과 함께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가이사’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동전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핵심을 찌르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아마도 백성들은 로마 동전들이 하루 속히 이스라엘 땅에서 사라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니셨으나 압제 받는 백성들의 아픔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동전을 사용하고 있는 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 의무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단지 가이사의 백성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새겨져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납세의 의무를 행하고 헌금도 따로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납세를 하면서도 단지 납세의 의무만 행하는 불신자들보다 더 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점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가이사에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일까요?

바울과 베드로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 정하신 것이므로 각 사람이 권세들에 굴복하라고 했고(롬 13:1),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복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벧전 2:18). 하나님의 백성은 좋은 일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일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허용된 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 가이사 조차 사용하고 계시며 마침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납세의 의무를 행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알았던 사도 바울은 노예제도가 성경적 원리에 분명하게 벗어나는 것이었으나, 사람들을 선동해서 노예제도를 타도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그분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 백성 한 사람 한사람이 각자가 처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자녀다운 삶의 영향력을 발휘해서 그 사회로 서서히 변화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라 조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4:33). 교묘한 질문으로 올무를 놓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기이히 여겨 떠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정치적 질문이 실패한 후,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형사취수’ 제도에 근거해서 일곱 형제를 남편으로 삼았던 기구한 여인의 비유를 들었습니다(24-28) 비유의 목적은 부활이 있게 되면 이처럼 윤리적으로 큰 혼란이 생기기 때문에 부활이란 없다고 논증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사야 26:19절과 다니엘 12:2절에 근거해서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은 존중했으나 구약의 나머지 성경에 대해서 그만큼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성경 말씀이라도 제거해 버리는 합리주의자로서,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소멸될 뿐이며 내세는 없다고 여겼으므로, 종교지도자이지만 그들의 신앙은 현실 세계를 위한 신앙, 물질적이고 근시안적인 신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무도 모세 오경에 근거해서 부활이 있음을 논증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에 대한 예수의 입장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인간의 경험의 세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성경을 왜곡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 부활 후의 세계를 이 세계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음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6절에 근거해서 모세 오경도 부활을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반증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의 선조들입니다. 모세의 시대에 그들은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의 하나님이다’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존전에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간이 이 땅에서 생애를 마친 후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 즉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32). 예수님의 가르침에 무리들은 놀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3).

사두개인들은 그 시대에 대단히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들로 행동했습니다. 경험의 한계 내에서 부활이 없다고 전제하고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모세 오경을 달달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진리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게 여겼던 그들이 우리 주님 앞에서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였음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경 말씀을 취사선택해서 이해되는 것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주님 앞에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였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논박되자 부활을 주장해왔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변호된 것에 대해서는 기뻐했을 것이나, 또 다시 예수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 율법의 경중에 관련된 이 질문 역시 당시에 논란이 많던 사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4-5절과 레위기 19:18절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

우리의 전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공허한 말이라고 했습니다(요일 4:20). 다만 기독교인의 이웃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로서 행해진다는 점에서 불신자들의 구제나 봉사와 성격이 다릅니다. 표면적인 사랑보다 진정한 사랑을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요 14:15). 말씀의 경중을 나눈다는 것은 중한 말씀만 가려서 순종하려는 자세이고, 사랑이 아닌 율법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두 중요합니다. 또한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행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고 있는 그들에게 ‘왜 다윗이 성령에 감동해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4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 이상의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 질문으로 예수님은 오직 다윗과 같은 정치적 왕을 기다리는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 관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고 그날부터 감히 그분께 묻는 자도 없었습니다(46).

지혜의 왕이신 그분 앞에 어떤 이론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지혜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대적하는 모든 이론과 사람들은 파해질 것이지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지혜의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참으로 지혜로웠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그분의 지혜로 통치되며 인도된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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