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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종류의 삶의 결과 (롬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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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리는 선택의 책임과 선택의 은혜라는 주제속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 사도는 우리에게 두 종류의 삶이 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3일 안산호수공원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3천여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6시간동안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며 기뻐뛰며 저들의 입술에는 무엇이 선포되었습니까? 안산은 안식의 도시가 될지어다 안산은 회복의 도시가 될지어다 안산은 선교의 도시가 될지어다 이렇게 호수공원에서 놀라운 일이 있을때 주변 아파트속에서는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소음공해라 하여 진정과 고발이 쇄도한 것입니다. 안산시에서는 다시는 종교행사에 호수공원공연장을 대여하지 않겠다 선언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물론 6시간동안 기도하고 찬양하였으니 저들의 마음도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그 장소에 1907집회가 아니라 일반 가수들의 공연이었다면 송대관이나 태진아가 왔다면 가수 비가 왔다면 진정하고 고발했던 사람들이 그냥 집에만 있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저들은 밖으로 나와 6시간인들 10시간이든 저들의 공연에 동참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사람과 영을 좇는 사람 놀랍게도 이 두 종류의 삶 속에는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아래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국면입니다. 저들의 삶은 하나님께 제외되고 사는 삶입니다. 영적인 부분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계산하지 않고 삶을 엮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없이 학교에 다니고 하나님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하나님없이 결혼을 하고 하나님없이 사회사업을 하고 하나님없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 삶에 있어 아무리 포장이 잘 되어도 그 삶에 하나님이 없고 영혼이 없고 성령이 없으면 바로 그것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아래 사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인데에는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육신을 좇는 자는 자신의 성품에는 자신의 양신에는 영향을 받아도 하나님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적인 부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이것은 부분적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변화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입니다. 법동에서 은혜동입니다. 땅에서 하늘로입니다. 마귀의 지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며 육신적 지배아래 살던 여인이 복음의 전도가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란 우리 인간 본성에 철저하고 완전한 근본적 변화를 수반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어떻게 표현됩니까 흔히들 알고 있는대로 술 안마시는 사람 담배 안피는 사람 놀음 안하는 사람 이 정도로 성도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정도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 변화를 경험함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땅에 속한 사람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입니다.

  선택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사건들 속에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적으로 자유의지입니다. 혹 우리의 선택이 잘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반복해서 기회를 주실 뿐이지 그냥 두신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못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들 입장에서 그런 오해를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말씀을 통해 감동으로 환경으로 하나님의 원하심을 알게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 의해서 수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친구 더 나은 직업 더 나은 배우자 더 좋은 교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앙안에서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집을 반석위에 지을 수도 모래위에 지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편할 수 있고 얼마든지 불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을 통해 이미 어떤 신앙이 지혜로운지 어떤 신앙이 미련한지 경고하셨을 뿐입니다. 두 주인이 있으니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재물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에 마음이 끌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무엇을 좋아했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선택했느냐입니다. 다만 참 신앙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경고 하셨을 뿐입니다. 마7:13,14절에 좁은 문이 있고 넓은 문 넓은 길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 경고하셨을 뿐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양처럼 할 수도 있고 염소처럼 할 수도 있다합니다. 다만 염소는 영벌에 양에 속한 성도는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 경고를 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 모두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신28장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축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선택에 있어 신28장을 축복 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저주 장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셨습니다. 네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이미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택의 책임과 선택의 은혜입니다. 모든 사건들 속에서 선택은 내가 합니다. 여기에는 책임이 있습니다.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내 마음대로 안될 때 하나님이나 아니면 누군가라도 핑계하고 싶겠지만 변함없는 진리는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나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직업선택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왜 몸이 약하게 하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관리 할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게을러 운동하지 않고 하나님을 핑계할 수 있는가? 먹고 마시는 것 적게 하지 못하고 젊은 날 마음껏 살고 하나님을 핑계할 수 있는가 젊은 날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도 부모도 핑계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공부할 수 있는 마음 기회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공부하고자 한다면 반딧불속에서도 공부를 합니다. 선택의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가인도 예배에 실패하고 살인을 선택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던 롯도 소돔을 선택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때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결국 모압과 암몬족속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에서도 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여 영적인 것들 장자권 축복권을 넘긴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유다도 주님께서 주셨던 반복된 기회를 외면하고 자살을 선택함으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으니 지옥입니다. 신앙인에서도 혹 여러분의 선택에 의해 모래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원하심을 외면하고 나 편한대로의 신앙에 길들여져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 넓은 문을 향하여 넓은 길을 선택하여 신앙의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고 있다해도 그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책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선택의 은혜입니다. 물론 모든 사건들속에서 선택은 내가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보니 여기에 은혜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여호와의 이레이셨고 에벤에셀이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축복과 은혜앞에 물론 선택은 내가 했습니다. 열심히 산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무엇입니까 내 재주 내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배우자 선택을 물론 내가 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잘 고른 것 같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 재주가 아니면 하나님을 은혜가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만큼 사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때 다른 것을 선택했더라면 위기가 없었을까요? 선택의 은혜입니다. 가인과 달리 아벨이 드린 제사를 받으신 것은 아벨이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이 때 롯이 소돔을 선택했기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갔지 롯이 삼촌먼저 선택하세요 하면 아브라함 역시 소돔땅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결과를 보니 은혜입니다. 에서와 달리 야곱이 복을 받은 것은 그가 착해서입니까 제일 못된 야곱 아닙니까 그럼에도 그가 이스라엘이 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될 수 있었음은 은혜입니다. 유다와 달리 베드로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은혜아닙니까 선택의 책임과 선택의 은혜속에서 우리 모두가 선택의 은혜안에 있기을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은 배우자와의 관계속에서 선택의 책임이 느껴집니까 선택의 은혜가 느껴집니까 직업과 생업속에서도 교회생활가운데에서도 책임이 느껴집니까 은혜가 느껴집니까

두 종류의 삶과 목적은 무엇인가

경부선이냐 호남선이냐입니다. 출발은 같지만 대전에서 갈라집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대조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유념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어지는 두 종류의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육신 적 그리스도인들과 영적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에게 속한 사람이냐 세상에 속한 사람이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여러가지로 구분합니다. 황인이냐 백인이냐 흑인이냐 세상은 여러가지로 구분합니다. 잘 사람사람 못사는 사람 건강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예쁜 사람 미운 사람 날씬한 사람 뚱뚱한 사람 등 여러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단 하나인 것입니다.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입니다. 주님을 만났느냐 주님을 외면했느냐입니다. 세상에 속했는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놀랍게도 이 두 종류의 삶속에서 우리 모두는 이에 구원받은 사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 있으니 이것이 선택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 예수를 알았는지 입니다. 사실 아무나 믿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교회 문이 열려있으니 아무나 와도 좋소하니 누구나 와도 되는 것 같아 교회를 선택하고 믿겠다 결정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믿고 보니 예수야 말로 아무나 믿을 수 없는데 그래서 살후3:2절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했는데 내가 믿었다는 사실이 감격인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십시오. 지옥 간 부자도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삶을 선택했던 책임을 보는 것입니다. 천국 간 나사로는 너무도 가난하여 병들어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는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지옥간 부자와 달리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선택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를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비 그리스도인에 대해 육신을 좇는 자라 했는데 육신을 좇는 자라는 말의 의미는 타락된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인격안에서 역사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태어나 그대로 자라고 발전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자연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라는 번역은 육신을 따라서 육신아래 있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 아래 있다. 븍별한 권위아래 있음을 말합니다. 죄와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권세아래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죽은 줄 모르는 사람말입니다.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 말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죄 가운데 태어났고 존재하며 죄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상대적으로 그 영을 좇는 사람은 성령님 아래서 성령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을 좇는 사람은 먼저 내 안에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해있던 자연인에게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이것은 부분적 변화가 아닙니다. 완전한 변화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완전한 변화는 구원에 있어 절대적 진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안에서 근본적 변화가 없었다면 성령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율법의 요구는 그 사람안에서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변화를 맞는 사람은 이제 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변화를 맛본 사람은 이제 그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자유한 사람입니다. 그 영을 좇는 사람은 성령님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삶을 엮어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생각이라는 말이 5,6,7절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단순히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목표와 열망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을 결정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하여 육신을 좇는 사람은 그 삶속에 육신 가운데 살며 육신만을 위해 살고 자기 육신을 만족시키는데 삶의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 된 삶이요 영적인 모든 것에서 단절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영을 좇아 사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육의 무익함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님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의 최상의 관심은 물론 한 남편이요 한 아내요 한 직업을 갖고 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며 보이는 부분에는 세상의 사람들과 똑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그 내면에 삶의 방향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선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에 위대한 관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지위나 직업 돈 아내 자식보다 영혼 문제의 소중함을 인식 하십니까 영혼의 문제 앞에 무엇이라도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 마음을 누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영을 좇는 자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를 선택한 것 같지만 이것은 은혜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삶은 결정 났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에 따라 영적인 말에 관심을 가지며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사는 거십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에 주님을 영접하지 않아 근본적 변화 없이 육신에 속하여 육신적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선택의 책임은 여러분 스스로 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한번 해보는 게임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선택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인가 아니면 선택의 은혜를 입은 사람인가 그 결과에 대해 4절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했습니다. 생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삶의 방향 목표나 열망이라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지 지금은 그리스도인이라 비 그리스도인은 별로 다른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는 사망이요 다른 하나는 생명과 평안입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육신에 있는 자를 하나님이 원수 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앞에는 가룟유다까지 용서의 대상이었고 긍휼의 대상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이 원수를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원수 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새롭게 원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함에서 자유 한 사람이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는 사람입니다. 생명과 평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세상에 속한 자 마귀의 자녀로 원수 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은 영혼에 관심을 갖는 사람과 육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별로 차이가 없지만 언제인가 천국과 지옥으로 차이가 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았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아 근본적 변화가 없었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 할 없습니다. 영의 인도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법에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울타리안에서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는 사람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오늘도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것입니다. 홀로 있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의 결론은 무엇인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입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사회사업을 해도 봉사의 삶을 살아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심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선택의 은혜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았던 에녹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빨리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을 보시고 그는 내 마음에 속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손바닥이 마주치듯이 어느날부터인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요구합니다. 너는 나와는 하나다 너는 내 백성이다 너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마음 껏 외칠 수 있는 영성이 저와 여러분 안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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