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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고 행하는자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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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메이슨이 쓴 책 중에 ‘크리스챤 생활백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p.10에 보면 크리스챤의 어휘사전이란 항목이 나오는데 거기에 신앙 생활에 관련된 단어들이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감사’란 무엇인가? ‘크리스챤의 영적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정확한 눈금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을 보면 감사의 수준이나 감사의 정도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 건강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스스로가 내 영적 건강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큼 감사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늘 입에 불평이나 원망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닌가... 생각해 보면 나의 영적 건강 상태를 알게 됩니다. 옆에 계신 분께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감사하는 분이십니까?”
  늘 감사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헌신’이란 무엇이냐?란 물음이 있습니다. 그 물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온도를 측정하는 온도계’와 같다고 했습니다. 헌신이란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헌신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부모가 그 자녀를 사랑하면 그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헌신의 도수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지 않지만 저는 ‘순종’을 하나 추가해 보았습니다. 순종이란 무엇일까? 제 말로 정의해 보면, 순종이란 ‘크리스챤의 성장과 성숙의 삶을 평가하는 수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장하는 사람이냐, 성숙한 사람이냐 하는 평가는 그가 얼마큼 순종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 그것은 성장과 성숙을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의 관심은 ‘성숙’에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챤이 마치 자라지 않은 아이들처럼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그는 성숙에 대해서 우리에게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또 이방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에 대해서 믿음과 행동의 일치에 대해서 야고보서 기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게 되는 일로 “저 분은 참 신앙은 좋은데 인격은 별로야.” 라고 말하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는 것 보면 체험이 많고, 은사도 많고, 축복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말하는 것 보면 인격이 엉터리입니다. 입만 열면 남을 헐뜯고, 욕하고, 남의 말을 옮기고, 이간질하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라면 그의 신앙을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신앙과 인격이 유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신앙연륜은 오래 되었는데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분들도 보게 됩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출석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늘 신앙은 갈대처럼 흔들립니다. 주일에 교회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몇 번을 숙고해야 나올 수 있습니다. 오랜 연수에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은, 마치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분들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 기자는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과 성숙 그것을 지향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 말씀을 잘 들을 때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듣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로마서 10장 11절에 보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자라지 않지? 믿음이 없지?’라고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말씀 듣는 기회를 많이 가지셔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복입니다.

  21절 말씀을 읽습니다. “

  말씀을 듣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마음에 심긴 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얘기입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19절에도 보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존 메이슨의 사전에 보면 ‘경청’이란, 단순한 듣기를 넘어서 집중해서 귀 기울이는 것 이라고 얘기합니다. 그저 생각 없이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그 말씀에 집중해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경청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태도가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못 듣는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 설교가 재미있나, 없나에 관심이 있습니다. 설교는 재미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다고 능력 있는 설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흥 강사 설교를 몇 시간을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더라고 자랑삼아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지식으로 듣습니다. 자신의 지식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교양 강좌 듣는 것 처럼 듣습니다. 우리는 교양, 지식을 얻으려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평가하는 태도로 듣습니다. “거 젊은 목사가 참 설교 잘하네, 아니, 오늘 설교는 왜 그 모양이지?” 하고 평가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미혼의 목사가 결혼에 관해 얘기하면, “아니 저 친구는 결혼도 안한 사람이 뭐 저런 얘길 다 해?”라고 한다면 그것은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이 구원받고 내 영혼이 살찌는 것에 관심 없는 태도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경우도 문제 있는 태도입니다.

  설교를 잘 듣는 좋은 태도라고 한다면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시밭, 돌밭, 길가, 옥토 이렇게 네 가지 밭이 나옵니다. 그 중 내 마음이 옥토와 같이 되는 것이 좋은 태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말씀의 뿌리가 잘 내리도록 내 마음을 옥토로 준비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잘 들으시는 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주일 낮 예배만 나오시는 게 아니라 오후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 구역예배에도 참여하십시오.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그것이 믿음이 성장하는 길이고 영혼이 살찌는 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려면 들은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 들은 말씀을 잘 실천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25절 말씀 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는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행하는 것이 왜 축복입니까? 말씀을 실천할 때 거기에 놀라운 축복이 따라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어쩌다가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안수해주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은 복은 내가 실천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니,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켜 순종하면 네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들어가도 나와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복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오는 복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능력이요, 축복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몸이 아파 병원에 갔습니다. 훌륭한 의사 앞에 가서 진단을 받고 검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방전을 갖고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약국에 가서 처방전대로 약을 지어 하루 세 번씩 시간 맞추어 약을 잘 먹어야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처방전만 받아오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약을 지어 먹어야지 능력이 나타나는데, 치료가 되듯이 말씀을 듣고 곧 잊어버린다면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하나 비근한 예를 든다면, 예전 어릴 때 먹고 뛰어노는 손자들을 향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얘야 뛰지 말아라. 배 꺼진다.” 빨리 소화될까봐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옳은 방법입니까? 건강하기 위해서 밥을 잘 먹고는 가만히 누워 있으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입니까? 아닙니다. 건강하려면 잘 먹어야 합니다. 그리곤 나가서 땀 흘리고 일해야 합니다. 운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 고프면 또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원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적용해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린 더 건강한 신앙, 성숙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 한 가지라도 적용해 보십시오. 오늘 사랑하라고 했으면 나가서 사랑해 보십시오. 용서하라고 했으면 지난 추석 때 싸운 며느리랑 화해해 보십시오. 전도하라고 하면 한 사람 붙들고 전도도 해 보십시오.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할 제목을 찾아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세요. 이것을 실천 할 때 능력이 나타나고 축복이 임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듣고 잊어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적용하고 실천 할 때, 행할 때 거기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을 정복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듣고 “참 좋은 방법이군요.” 하고 앉아 있었으면 평생가도 여리고 성은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하루 한번씩 6일째 돌고 7일째는 7번을 돌고 소리를 지를 때 여리고 성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를 건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니, “아~ 참 좋은 말씀이군요.”하고 잊어 버렸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믿고 지팡이로 홍해를 치면서 발을 옮길 때 홍해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천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본에 가면 유명한 택시 회사가 있는데 MK라는 회사입니다. 한국인인 유봉식 회장이라는 분이 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처음에 택시 몇 대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이 택시 회사는 친절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 회사가 잘 번영해서 아주 큰 택시 회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 분이 한번은 어느 기업체에 초청을 받고 강연을 하기 위해서 자기 회사를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자기 차가 없답니다. 도쿄 시내에 온통 자기 회사 택시인데 다른 차 탈 일이 없다 이거지요. 자기 회사 택시를 타면서 청결상태도 점검해 보고 기사가 친절한지도 점검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도 회사 앞에서 MK택시가 지나가기에 택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택시가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더 놀랬습니다. MK 택시 기사라면 회장님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지켜보았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장애인이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드니까 회장을 보고도 택시가 지나쳐서 장애인 앞에 가서 장애인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회사의 신조는 장애인이 늘 우선입니다. 장애인을 한번 태우고 내리려면 다른 사람 두 번 세 번은 태울 수 있으니 다른 회사는 장애인을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회장이 있을 지라도 장애인을 가서 먼저 태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는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강연할 때마다 MK택시 기사들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댜. 우리 기사들은 회장이 있어도 회장 보다 장애인을 먼저 태우는 친절한 택시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 회사의 구호인 친절은 말뿐이 아니었습니다. 그 친절을 적용하고 실천할 때 가장 훌륭한 인기 있는 택시 회사가 될 수 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친절하라면 친절해야 합니다. 온유하라면 온유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축복이고, 능력이며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경영학의 아버지가고 부르는 피터 드라크의 글을 인용한 행복한 동행 10월호에 보니, 성공하는 모든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내성적일수도 있고 외향적일수도 있고 많이 배울 수도 있고 무식할 수도 있고 다양한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다만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한 가지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실행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예요 어떤 일이든 붙들면 반복하고 실천하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행함이 있는 사람들이 결국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성공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우린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는 말에 순종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니까 제가 순종해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고기가 잡혀서 혼자 끌어 올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적은 불가능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실행하지 않으므로, 순종하지 않으므로 얼마나 수 많은 기적들이 중단되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신앙 생활 한다고 똑같이 그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 집에 참석을 했는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와서 예수님이 결국 순종해서 하시는데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하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예수님이 떠다가 “연회장에 갔다 주어라”했더니 그 연회장에 모인 이들이 맛을 보았더니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어디 있었냐?”고 다 놀랬습니다. 아니 보통 집들은 처음에 좋은거 내다가 나중에는 안 좋은거 내놓기 마련인데 이 집은 갈수록 더 좋은 포도주를 낸다고 놀랐습니다.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오직 물 떠온 하인들만 알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만이 그 비밀과 기적의 능력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적용할 때 여러분의 삶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내게 나와 십일조를 드리라 내가 쌓을 곳이 없도록 하늘 문을 열고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드리는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드리지 않는 사람은 그 축복을 알 수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 홀로 사시는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있으셨답니다. 이 할머니는 5센트씩 아주 적은 돈을 헌금합니다. 우리 돈으로 몇 십원 정도 되는 아주 작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한 장로님은 거기에 한 40배 되는 돈을 헌금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장로님은 할머니를 불러 얘기했습니다. “생활도 어려운데 5센트 헌금하기도 벅찰테니 이젠 내지 마세요. 내가 대신 헌금을 내드리겠습니다.”하고 제안했습니다. 누가 여러분한테 이런 제안을 하신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좋아해야 합니까? 기분 나빠해야 합니까? 기분 나빠해야 합니다. 5센트 내시는 할머니가 얘기합니다. “장로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5센트를 드림으로써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는지 모릅니다. 헌금을 드림으로 얻는 그 신앙의 기쁨, 이걸 왜 당신이 빼앗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드려본 사람만이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진정 기적과 축복을 경험 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경계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이요, 둘째는 분노입니다.

  19절에 보니,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26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아멘.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우리의 언어생활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은혜 받은 사람도 예배당 나가자마자 남에 대해 험담을 하고, 비판하고 공격한다면 그건 올바른 언어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첫 번째 조건이 언어생활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의 연륜이 많고 신앙은 좋다는데 입만 열면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아픔을 주고 실족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일으켜세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힘을 보내줍니다. 진정 신앙인의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전도서 5장 2절에 보니까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또한 잠언 10장 19절에 보니까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니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3장 3절,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존하나 입술을 거기에 버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 26절에 나오는 재갈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이 타는 말의 입에 막대기를 물려 놓으면 말을 잘 통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잡아당기면 말이 꼼짝을 못합니다. 그게 재갈입니다. 또 사람이 시끄러우면 예전에 형벌 중에 사람에게 재갈을 물립니다. 입에 막대기를 물리면 말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시끄러운 사람을 그렇게 한답니다. 이제 우리를 혀를 제어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언어 생활 속에서 늘 선한 말, 아름다운 말만 쏟아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껏 은혜 받고 나와서 우리가 말로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 생활이 신앙의 성숙에 아주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말 때문에 다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또 우리가 무의미한 말, 잘못 말한 것 때문에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허물을 면키 어렵다, 오히려 적은 말을 하는 사람이 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분노를 경계해야 합니다. 19절에 보니,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20절을 보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낸다는 것은 급히 분을 낸다는 것입니다. 화를 잘 내는 것은 신앙의 성숙한 사람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디도서 1장 7절에 보니까 영적지도자의 자격을 열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책망할 것이 없으며 제 고집대로 하지 않으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고” 아멘.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신앙의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함께 은혜 받고 밖에 나가자마자 화를 내고 남을 판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3절에 보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불필요한 논쟁, 분냄 이것이 바로 다툼을 가져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서 약속을 했답니다. “여보. 우리도 완전한 사람들이 아닌데 살다보면 오해 할 수도 있고 화가 날 때고 있지 않겠소? 우리가 서로 화가 나서 뭔가 말하고 싶을 때는 24시간 후에 말하도록 합시다.” 그랬더니 살다가 화가 나 터뜨리고 싶다가도 ‘아 참 24시간...’ 그래서 24시간 동안을 참았습니다. 잠자며 참고, 일하며 참고... 그랬더니 24시간이 지나니 화가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오해도 풀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늘 축복의 언어만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급히 판단할 때 실수가 올 수 있고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주 예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 앞에 앉은 3학년 아이가 얼굴이 발개서 꼬박 꼬박 졸고 있더랍니다. “아니! 아침부터 조는 놈이 어디 있냐? 나와!” 앞에 나왔는데 보니 아 입에서 술 냄새가 펄펄 나는 겁니다. 그래서 매를 때리고 무릎 꿇게 하고 벌을 주고 반성문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교무실로 불렀습니다. “너 이놈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술을 먹고 학교에 오냐? 이런 못된 놈!” 아이가 말하기를, 엄마가 양조장에서 일하는데 양식이 없어 술찌끼를 얻어온 걸 식사 대신 먹었다는 겁니다. 양조장에서 막걸리 만든 술찌끼를 먹으니까 애가 술이 올라가지고 얼굴이 발개지고 걸음걸이가 비틀거렸던 것입니다.
  그때서야 선생님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구나, 상황이나 배경도 모르고 이렇게 성급하게 판단해서 한 아이의 인생을 망칠 뻔 했구나 싶어 아이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했답니다. “내가 너의 사정을 모르고 너를 꾸지람 하고 혼냈구나. 미안하다.”

  여러분, 급히 분내지 맙시다.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그것이 바로 성숙한 인격의 대표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말씀 듣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그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고 순종하십시오. 말씀의 능력, 말씀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적이 늘 나타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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