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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낙원의 생명나무 (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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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상업 중심지이며 전략 요충지로서, 종교적인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로 여기는 아데미 신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요한이 늙어서 죽기까지  장로로서 시무했습니다.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순교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시무했던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곳을 그의 제2차 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3차 전도여행 때는 이곳에서 3년 간 목회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맨 먼저 이 교회를 위한 말씀을 요한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는데 특별히 예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교회 전체를 장악하고 계시며 교회들 가운데서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장자 유업의 표이기도 합니다.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신 교회들입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 에베소 교회는  모름지기 아세아 교회의 장자교회요, 으뜸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실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절). 예수께서는 거짓 교훈을 물리쳐 이기고 온전한 신앙을 소유한 자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범죄 후에 인간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에덴의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겠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창 3:22).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의의 축복에 들어간다는 의미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를 예수께서는 그의 왕국에 들이시며, 영생하게 하는 의의 열매를 먹이시고, 그와 함께 영원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소망으로 인내하는 한해를 살면서 더 좋은 소망으로 인내하는 달에 낙원의 생명나무에 대한 약속을 받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교훈을 통하여 더 좋은 소망 안에서 안내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초대교회 당시는 종말론적인 사상이 팽배하여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면서 점차 식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처음 우의와 사랑을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렘 2:2).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처음 가졌던 열의, 감격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잃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 체험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 때문에 처음에는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점차로 자신의 체험을 잊으면서 동시에 열정도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전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 (엡6:24)라고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에베소 교회는 30여 년이 지난 후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어디에서 잘못되었나 생각하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촛대를  옮길지 그대로 둘지가 결정될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사랑을  토대로 하여 생활하라고 권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수분을 섭취하여야 잎이 푸르러 집니다. 수목이 울창한 것은 수분섭취를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무의 수분과 같아서 사람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생활 속에 체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울로 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가슴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아니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사랑을 알게 하시고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랑, 일반적인 원칙에 관한뿐만 아니라 실제적 적용이 되는 사랑을 가지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을 지식으로만 가지지 말고 행함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만큼, 얼마나 사랑에 충만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주님이 불가불 편지를 써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 만큼 사랑이 식어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버림을 받아야 할 만큼 위험한 지경에까지 놓인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사랑이 식어 졌는지 알아서 처음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회복운동이 가정 교회 사회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분은 미국 시카고에서  목회하는 클락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매일 밤 전도 집회를 하는데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놈,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희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설교는 형편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매일 밤 5, 6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비끄러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것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그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몹시 운적이 있었답니다. 그 후 그는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겁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그의 노력은 성공했으나 설교는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놀랄만한 능력도 주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씨를 뿌리려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의 눈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쁨과 감격을 생각해 보십시다. 온 세상천지가 다 새롭기만 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하기만 했습니다. 그저 흐르는 눈물을 주채할 수 없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아니 밤을 새워 기도하고도 힘이 넘쳐나서 흥겹기만 했습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을 위해 죽어도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어버렸습니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 마음에 임하였던 그 은총은 이제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기도 속에서 언제나 가까이 계시던 예수님이셨는데 지금은 얼마나 멀어져버렸습니까 !

  사랑은 가슴과 가슴으로만 전달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이나 발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뜨거운 가슴만이 또 다른 가슴을 뜨겁게 불태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내 구주로 처음 모셔들일 때, 그 가슴  설레게 하던 기쁨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손과 발에 쇠못이 박히고, 온 몸이 갈갈이 찢기어, 방울방울 피를 흘리며, 나의 모든 죄 짐을 대신 짊어 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코허리가 시큰해지는 감동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몸을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 내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그렇게도 죄악이 더럽고 추해 보이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뜨겁고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저의 첫사랑입니다.

  돌이켜 처음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처음 사랑이 어떠한 것, 곧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든지 아니면 성도간의 사랑이든지 교회가 그것을 버렸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형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지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사랑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처음행위를 가지라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그들은 어디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또한 예전처럼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심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열정의 불이 꺼져버린 신앙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으로 불타던 그 날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진 가슴에 불을 질러야 할 것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시니 다시 변화가 일어난 자신을 스스로도 확인 할 수 있는 생활의 변화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믿는 대로 행함이 뒤따르는 모습이 과연 칭찬할 만 일이니 믿음 다르고 생활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과 생활이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생활 속에서 삶의 행위로 증명되어져야만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그것이 믿음의 생활로 증명되어져야 하며 주께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인격으로 증명되어져야 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네 믿음의 행함은 얼마냐고 물으신다면, 힘 있게 담대히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던 우리라면 주님께로부터 한마디의 칭찬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행위가 하나 됨을 칭찬하셨습니다.

  수고의 행위입니다
이 말의 뜻은 믿음을 지키면서 그 믿음이 생활화하기 위해 했던 그 수고를 내가 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수고가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생활화되기까지는 성도의 진정한 삶 속에 핍박과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어려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2000년을 살펴 볼 때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된 것은, 먼저 믿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생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110년 역사도 먼저 믿은 선진들의 피와 땀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렇게 부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 주님 사랑하기 위해, 주님 섬기기 위해서, 주님을 향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맹점이 있습니다. 그 맹점이 무엇일까요? 아무런 수고 없이 편하게 예수 믿으려는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내의 행위입니다.
믿음을 위한 수고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것이 있었으므로 칭찬하신 것입니다. 계속되는 박해는 정말로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런데 긴 세월 동안 참고 또 참고 여가까지 왔으니 주님은 이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주님 위해 신앙과 절개를 끝까지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나의 수고와 인내를 끝까지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 위해 얼마나 수고했으며, 얼마나 인내해 왔습니까? 훗날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는 내가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칭찬 받는 것 아닙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라고 해서 칭찬 받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을 많이 모았다고 해서 칭찬 받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런 것 때문에 칭찬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칭찬 받습니까? 믿음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으며 그 수고에 대해 얼마나 인내했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끝까지 인내함으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디안 부락에서 선교하는 한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안 추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추장은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선교사님, 주님께서 저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고저 이 사슴 가죽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선교사는 이 말을 듣고 조용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이 사슴 가죽을 쓰실 수가 없습니다.” 인디안 추장은 이 말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가더니 얼마 후에 한 마리의 백마를 가지고 와서 또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했습니다. “선교사님, 이것은 이 부락에서 나와 아주 중요한 사람들만 타고 다니는 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선교사는 이번에도 그 말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추장은 뼈로 만든 머리장식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추장의 상징입니다. 나 주장의 권위와 명예까지도 다 주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것마저 거절당하자 추장은 심히 낙심하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바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나의 가장 귀중한 것을 다 바쳤습니다. 이제 제 생명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추장의 이 고백을 듣고 선교사는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그 생명을 원하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펼쳐서 인디안 추장에게 이렇게 읽어 주었습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예화뱅크- 생명을 원하십니다 .) 우리의 생명 다하기 까지 주님 위해 헌신 하며 봉사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이단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6절). 니골라당은 교회 내에 잘못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니골라는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교사로 여겨지는데,  에베소 교회는 이들의 행위를 미워했기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 당시에 널리 유행했던 이단으로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14절)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칭 사도라 하면서 거짓된 것으로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2절). 편협적이라고 비난해도 이 길이 주님 원하시는 길이기에, 이 길을 안갈 수 없습니다. 이 길 가야만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고 마지막 오시는 주님 맞이할 때 칭찬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이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즉 이단자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유혹하고 자기들의 교훈만이 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혼미케 하고 실족케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들을 항상 경계하고 미워하며, 색출하여 징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문제는 영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날카로와야 합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방법적인 면에서는 모든 것을 다 양보했지만(율법문제, 우상제물 문제, 이방인과의 문제...)복음문제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의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시대는 과거와 다릅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선을 긋는데 그 어느 때 보다 날카로워야 합니다.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비 진리인지, 어느 것이 성경적이고 어느 것이 비 성경적인지 날카롭게 구분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우리는 진리의 지도와 복음의 나침판을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지옥이라는 골짜기에 빠져들게 되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폴리캅입니다.

폴리캅은 로마의 군대가 예수의 이름을 저주하고 배반하면  그에게  영예와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폴리캅은 86년 동안 주님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셨는데 내가 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느냐면서 장작더미 위에서 굳건히 화형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주님께 인정을 받아 아세아 일곱 교회 중에서도 일등교회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본받아 에베소 교회와 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예수께서는 거짓 교훈을 물리쳐 이기고 온전한 신앙을 소유한 자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토 니콘티)는 계속해서 이기는 자를 가리키는 군사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와 사단의 타협 없는 대결 상을 잘 묘사합니다. 즉 사단과 대결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를 나타냅니다(Mounce).
특히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종말론적 성취의 궁극적 실체를 말해 줍니다.

'낙원'(토 파라데이소)은 일차적으로는 인류 최초의 거주지였던 에덴동산을 암시하며(창2:8-10)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하나님 나라 자체를 의미합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죽음과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22:2) 영생을 상징합니다.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면대로 이기므로 에베소 교인들과 함께 첫 창조 때에 에덴동산이라 했으며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예루살렘 즉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생명나무 즉 영생을 영원히 누리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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