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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구헌신예배] 본질을 잃지 맙시다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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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천하를 호령하고 있을 때의 일이 되겠습니다.??그 이웃에 있는 작은 나라의 왕이 알렉산더대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대왕이 사냥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름 있다고 하는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했더랍니다. '알렉산더대왕'은 너무나 좋아서 하루는 이 사냥개들을 데리고 토끼 사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들을 보세요. 눈앞에 토끼가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가서 물으라.'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못마땅한 마음을 가지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며칠 후에 다시 사냥을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사슴이 눈앞에 나타났건만 역시 지난번 경우와 같이 움직이려 하지 않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알렉산더대왕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그 사냥개를 준 이웃나라 왕이 알렉산더를 방문했습니다. 왕의 안부와 더불어 개의 안부를 묻는 왕에게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이 불만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 신통치도 않은 개를 왜 주었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웃나라 왕이 대답을 합니다. ‘신통치 않다뇨? 그 개는 사자와 호랑이를 잡도록 특별히 훈련시킨 사냥개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무릎을 치면서 ‘아차!’했다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세요. 사자와 호랑이를 잡도록 훈련시킨 개한테 '토끼를 잡으라.'니, 이것이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거, 내가 개입장이라 해도 이건 개를 모욕하는 처사라고 한마디 했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그리고 무엇에 쓰시려고 지금까지 훈련시키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라고 오늘까지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많은 생활, 그 많은 경력, 그 파란만장했던 과거가 여러분들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과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오늘 교회에 교와 구역에 임원이 되게 하였다면 분명히 목적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다만 본질이냐, 현실이냐의 문제 속에 어디로든 기울어지는 그 인격의 문제요, 또한 그 본질에 맞는 목적을 향해 살아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여기에 존재의 가치가 달라지는 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내용입니다. 그러나 깊이 내용을 살펴보면 역시 무화과나무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결코 이상한일이 아니며, 포도원에는 여러 가지 과실수들이 함께 심어졌습니다(왕하 18:31;미 4:4).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고 그 본질에 따르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귀한 목적이 있다면 투자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희생도, 수고도 할 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최종 목적이 분명치 않다면 그것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무한 짓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본질과 그에 따르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주인이 왜 무화과나무를 심었겠습니까? 나무라 할지라도 각기 목적이 달리 쓰입니다. 어떤 나무는 정원에 심어 놓고 바라보면서 상쾌함을 느끼는 관상수로, 어떤 나무는 곧고 길게 자라서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도 있고, 또 어떤 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 제 몫을 다하는 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관상수로도, 재목으로도 꽃나무로도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아예 꽃이 없이 바로 열매를 맺는다고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아무것으로도 쓸모가 없다지만 이 무화과나무에게도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무화과는 열매를 따먹는 나무입니다. 참으로 달콤한 열매가 달리는 것이 무화과나무의 본질적인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무화과나무를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무화과나무는 서울, 경기 지방에는 거의 없고 저 남쪽으로 가면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지리 못 생긴 나무입니다. 그 나무 잎도 그저 보통 가랑잎처럼 동그랗게 예쁘지도 않고 또 자라는 모양도 재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무도 아닙니다. 비틀비틀하면서 옆으로 퍼져서 그 목재로는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열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것에는 존재의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과원지기는 '예수님'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 과원지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화과  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주인은 "그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果實樹)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으며,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찍어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Marshall),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마 3:10;7:19;21:18-20).

  더욱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목적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비록 늙어 할 일이 없는 인생으로 느껴지지만, 이 시간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여야 할 일이 남아있고 목적이 있기에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어 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필연이 있을 뿐 우연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구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어진 직분과 사명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하나의 사건, 한 사람, 한 사람,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열매, 즉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존재 목적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그 주인은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원지기가 반대합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 나무는 종자가 좋은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도 많이 맺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제가 내년에는 옆을 잘 파고 거름도 많이 주겠습니다. 그러면 잘 될 것입니다." 이 나무가 지금의 우리를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 무화과나무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심어 놓은 것입니다. 열매가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는데 그 열매가 없다면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일 수밖에요.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가 바로 이런 처지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고 당장 찍어버린 것이 아니라 3년을 기다려 주었다가 그래도 열매가 없자 "찍어 버리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더 이상 무슨 변명도 불평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3년을 기다렸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려주십니다. 참아주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기다림이 막연히 기다리는 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동적인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가꾸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금년에도...두루 파고 거름을"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자적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 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창 18:22-32) 예수님께서 지니고 있는 신적인 인내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나타냅니다.

  '두루 파고'에서 '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캐토'(* )는 뿌리 주변에 있는 흙을 긁어 부드럽게 해주는 것입니다. 뿌리 주변의 흙을 부드럽게 해주고 거름을 주는 이 특별한 배려(配慮)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기간이 3년이나 지나도록 전혀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음으로써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보여줍니다(23:34).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맺도록, 즉 깨달으며, 행동하며, 부지런하며, 진실하며, 겸손하도록 그리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도록 적극적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그 기간을 나의 편안함과 안락과 내 명예 내 세우는 일과, 내 체면 유지하는 일과, 남의 험담하는 일과, 잔소리하는 일과, 다른 사람을 은근슬쩍 밟아 누르는 일과, 괜스레 트집 잡아 남 걸고 넘어가는 일과,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고집만 부리는 일과,

  집으로 비유하면 양심의 벽돌을 쌓아 가야 하는데 거짓말하는 일과, 게으른 습관을 나타내는 일과 그 외에 신앙적이지 못한 악한 마음을 살찌우는데 사용하며, 구역과 교구를 맡겨 주었는데 부흥시키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할 말도 변명도 불평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본질적이지 못한 것에 목매고 사는데 정신없느라고 정작 맺어야 할 열매는 몽우리도 피우지 못하고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인 양 헛기침이나 해 대는 모습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귀한 사명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역과 교구의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데 본질이 썩어있다면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용납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심은 것을 거두고 공의의 심판으로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무화과나무가 잊지 말아야 할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자기를 포도원에다 심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보통은혜가 아닙니다. 포도밭에는 당연히 포도가 심어져야하는 자리 아닙니까? 더욱이 포도의 수확과 무화과의 수확은 비교 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의 모든 기운을 다 빨아먹습니다. 그 잎사귀는 아주 넓어서 포도원의 상당부분을 그늘지게 했을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고 쉬 이해도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오직 하나의 결론은 주인이 베풀어준 은혜 외에는 더 설명 할 길이 없습니다. 존재 목적을 다라 마땅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쓸모없는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 은혜 외에는 더 설명 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의 이 은혜를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교구와 구역의 열매 맺어야 하는 부흥시켜야 하는 귀한 사명의 책임을 느끼시기를 부탁합니다.

두 번째 자리만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일 년 건너 한 해라도 열매를 맺어야 될 것 아닙니까?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쓸데없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만 무성했지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거름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사랑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무화과나무는 자기의 본질을 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심과 사랑이 이 무화과나무만 못했습니까? 포도원주인이 무화과나무에 쏟아 부은 정성에 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울인 정성은 아마 견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은혜여도 보통은혜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본질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형식적이고, 마지못해 흉내나 내는 그런 생활 속에 열매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파리 한 마리가 그만 실수해서 하루살이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루살이들은 말합니다. "하루로 끝이니 잘 먹고 잘살자." 그리고 죽습니다. 파리는 자기도 하루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삶을 하루로 잡고 준비하고 살면서 다른 하루살이들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하루살이들은 너무 짧은 인생이기에 남 생각은 전혀 안 했습니다. 오직 제 몸만 아꼈습니다. 그것을 보고 파리도 그들처럼 했습니다. 그 하루 동안에 가진 모든 것을 다 먹었습니다. 입을 옷도 가진 돈도 다 썼습니다. 저녁이 가까울수록 그는 더 열심히 가진 것을 탕진했습니다. 해가 넘어가더니 드디어 밤이 되었습니다. 하루살이들은 신음하며 쓰러졌습니다. 그도 피곤했습니다. 졸음이 왔습니다. 그는 다른 하루살이들처럼 누웠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았다." 생각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잠시 후에 그의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파리는 깨어났습니다. 두리번거리던 파리는 옆에 죽어있는 하루살이들을 보았습니다.

  그제 서야 자기가 속은 줄을 알고 후회합니다. "속았구나. 나는 죽지 않았어. 나는 이제 거지야." 그는 자기의 생이 하루 이상인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진 것을 다 낭비해 버렸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과원지기가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상태에 달린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 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회개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결정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도록 유보(留保)해둔 심판까지의 기한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삶을 삽니다. 그들은 죽지만 우리는 잠잘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문을 통해서 다른 세상에 갔을 때 전혀 거기 살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썩어질 몸을 위해서, 썩어질 재산과 썩어질 명예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거기에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급기야"세상에 속았구나! 나는 천국의 거지구나."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때의 부끄러움은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입니다. 본질을 알고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파리와 하루살이의 삶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창조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마른풀도 발에 걷어차이는 돌 하나도 존재의 이유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을 뿐이지 다 나름의 목적과 이유와 가치가 있다하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1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소중한 간증을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만 그런 거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자기를 위해서 자기로 인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격하고 '맞아! 맞아!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확실합니까?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 해 보셨습니까? 거기에 삶의 목적이 있는 거고 내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사건들을 보아도 우연한 사건은 없습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다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하심의 신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실수까지도 그 속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는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도록 역사하십니다. 자연재해인 재난이든 지진이든 전쟁이든 엄청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록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분명히 선한 목적을 이루시도록 간섭하시고, 돕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서 그 사랑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선한 그 뜻을 이루어 드리도록 최선을 다하여 성령의 아홉 종류 열매, 전도의 열매, 신앙의 염매, 헌신의 열매, 봉사의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본질을 잃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세 번째 '책임의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인이 "이 열매 없는 이 무화과나무 찍어버려!" 라고 했더니 과원지기가 대신 긍휼을 호소합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는 면목이 없어 말을 못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가 중보자로서 긍휼을 구하는 말은 책임감을 가지고, 모든 책임을 지기위해 주도적인 고백을 합니다.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분이 쓴 책으로서 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 온 세계 사람들이 읽고 많은 지혜를 얻은 책이 있습니다.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 속에서 일곱 가지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말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프로액티비티(Proactivity)'입니다. 알고 보면 일곱 가지도 전부 그것에 해당하는 겁니다. 이 책 전반적으로 프로액티비티(Proactivity)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주도성'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내가 책임지겠습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화를 내면서 손해 볼 수 없습니다. 그건 잘못입니다. 누구에게도 잘못의 책임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책임이니까요. 지금 내가 책임지고, 환경에게 책임 돌리지 않겠는 자세입니다. 그 책에서 강조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다."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한 일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 '주도성이 살아납니다.'

  만일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저 사람이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내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뭡니까? 이게" 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일이든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자세로 살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도적 인격'인 것입니다.

  "이 모든 풍랑이 일어난 것은 나의 연고입니다(요나 1;12)"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해 질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책임질 때 그만큼 내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귀하게 되고, 긍휼을 얻게 됩니다. 이런 마음자세가 바로 '존재 의식'입니다.

  그런 고로 핑계를 많이 하는 사람, 특별히 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 그거 존재가 아주 형편이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책임질 때 그만큼 내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귀하게 되고, 긍휼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부부싸움을 하다가 막 화를 내고 그러니까 아내가 "왜 당신은 이렇게 계속 화를 내느냐?"고 하였더니 대답이 뭔 줄 아십니까? "나는 본래 그렇지 않았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됐다."고 하더랍니다. 따라합시다. "그건 아니 쟎~아! 그건 아니 쟎~아!" 자기 못난 것은 자기 때문이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이런 종류의 인간이 바로 사람의 가치를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순간에 내 존재가 증발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서 원인을 찾고, 남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원방한다고 그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 인격만 망가지는 원망을 할 것 없습니다. "원망은 마귀가 찾아오는 징검다리요, 불평은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요. 남은 탓하고 환경 탓하는 것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라면 아담과 화와처럼 누구 잘못이라고 책임을 회피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한 일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존재'가 살아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본문의 과원지기처럼 '내 책임을 내가 질 뿐만 아니라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로 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

  세계적인 언론가 중에 한 사람인 '월터 크론카이트'라고 하는 분에게 누가 질문하기를 "당신의 성공 비결이 뭡니까?" 그 분이 딱 한마디 대답 했습니다. "방송이 나를 위해 있으니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한 마디 속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직장이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나를 위해 직장이 있는 것이지 직장을 위해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남의 직장에 가서도 어디 가서 일을 하던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라는 자세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해 봅시다. '내가 주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주인의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을 생각할 때도 가정을 위해 지금 내가 머슴살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가정이 있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정을 대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이것은 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살며 가정의 구성원들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 책임이요, 다른 가족들의 문제도 내가 책임지고, 내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가족들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정이 불행한 이유가 누구에게 있다고요? 요~나에게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부흥 안 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요? 전도 안 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요~나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무화과나무 과원지기가 책임을 지면서 하는 말속에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희망과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열매가 없어요. 분명히. 3년 동안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무화과 과원지기의 책임 있는 인격과 주도적 인격과 말을 듣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 속에 잠재적 가능성이 있고, 잠재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사람도 다 그냥 병들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병에는 '병리학적인 병'이라는 것이 있고, '장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장애를 '디스오더(Disorder)'라고 하고, 병을 '디지즈(Disease)'라고 합니다. 즉, 장애와 병은 다른 것입니다.

  병은 지금 아프고 괴롭지마는 이건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치료될 수 있습니다. 그런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라는 것은 이젠 정지된 것입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고, 고정된 상태입니다. 장애로 끝난 것입니다. 이제는 그게 낫는 희망이 없습니다. 없던 팔이 생기는 거 아니잖아요. 그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그러나 병은 지금 괴롭지마는 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거기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과원지기가 열매 없는 무화과를 보면서 이것은 하나의 병리적 관계로 보았습니다. 생리적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부부싸움을 할 때 두 사람의 말속에 '올웨이즈(Always), 항상' 이라는 말을 빼야 가정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  보셨습니까?

  저녁에 남편이 늦게 들어왔습니다. 매일처럼 늦게 들어와도 문 밖에서 영접하며  "당신은 그렇지 않은데 오늘 무슨 바쁜 일이 있었습니까? 어쩌다 늦었습니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왜 밤낮 그 모양이야?" "왜 항상 늦게 돌아오느냐?"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가 했지!"  이렇게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답니다. 거기에다기 한 수 더 떠서 "당신의 아버지도 그랬다는데 당신도……" 이렇게 아예 유전인자 문제까지 보태놓으면 이건 '장애의 문제'가 됩니다. 개선될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그러면 상대방 쪽에서 막 나가게 됩니다. "그래 어때?" 이러고 나옵니다.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처음 있는 것처럼, '엑시던트'처럼, 병리적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거는 본래가 그렇고, 족보가 그렇고, 그냥 근본적으로 못된, 이렇게 되면 그럼 끝난 거지. 뭐!

  그렇게 희망이 없는데 같이 살 거 뭐 있나. 그냥 살든지 말든지 될 대로 대라. 이제 서로 희망이 없으니 끝내자. 이렇게 되면 괜히 힘 빼고 말 할 것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과원지기처럼 다음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라는 희망의 믿음으로 즉. '그 속에 가능성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믿음,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3장에 처음부터 보면 18년 된 귀신들린 여자가 있습니다. 이 18년이나 되고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그게? 모두가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을 딱 보는 순간에 가능성을 봅니다. 그 사람이 귀신이 붙어서 그렇지 귀신만 나가면 사람구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저도 아브라함의 딸이다." 얼마나 귀한 말씀이요. 소망입니까? 내가 볼 때는 망나니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볼 때는 지옥 갈 사람이 분명한데 전도해서 회개시키기만 하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되고, 훌륭한 성도가 도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복음의 사건"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원지기가 열매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 책임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열매 없는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제게도 있습니다. 저기 무화가 나무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다. 제게 있습니다." 라고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징계와 심판을 하려고 합니다. 크게 진노하사 '내가 다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모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 정히 그러시려거든 내 생명부터 먼저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을 생명록에 빼더라도 저들은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죄를 지은 책임이 나에게도 있으니 제가 그 심판을 함께 받겠다.'는 것입니다. '형벌을 함께 받겠다.'는 것입니다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은 번성케 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백성과 함께 죽겠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자세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습니다. 바로 이 순간 과원지기가 모든 책임을 함께 하겠다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그 뿐 아니라 책임을 지고 다시 1년 동안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 찍어버리시기 바랍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Last Chance, 종말론적 기회를 주세요.' 이렇게 요청합니다. 이 때 주인은 긍휼을 베풀어 줍니다. "네가 다시 한 번 해봐라."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이것은 무화과나무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이 과원지기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부자만을 연구해 가지고 유명해진 '토마스 제이 스태니(Thomas J. Stanney)'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백만장자 마인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내용은 백만장자들이 백만장자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은 심층 분석 한 결과 여덟 가지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은 결코 '교육'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운'도 아니라고 밝힙니다.

  "백만장자가 되는 길은 '성실함'과 '건전함'과 '원만한 가정'과 '종교적 신앙'과 '우정'과 '스포츠맨 ?', '낙천성', 그리고 '자기 관리 능력'이 있고 나아가서 '남의 책임을 내가 지는 성격'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다 남에게 떠맡기고 이리저리 변명하는 이런 시시한 인간들은 결단코 성공할 수가 없답니다.

  요사이 우리는 '바다 사건'에서도 이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왜 그렇게 책임질 줄을 모르는 사회입니까? 대체 누구 잘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청문회를 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서로가 발뺌만 하니까요. 이런 무책임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더욱 복잡한 것입니다. 지도자의 자격이 없게 느껴집니다.

  참된 지도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교구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구역이 부흥 안 되는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이런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같이 허물이 많고 부족하지마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죽어 주셨습니까? 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리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대신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나를 대신하여 피 흘려야 죄의 값이 지불되기에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이 주도적 신앙의 본질이란 바로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를 위해서 대신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까? 왜냐고요? 그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로 주도적 신앙이란 생산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책임지는 그 누군가가 있어서 이 나무는 다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5) 여기서 아주 부끄러운 사람이 생긴다는 예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십자가의 강도가 같은 영광으로 부활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파리와 하루살이의 삶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한 평생 살고 영원히 지옥에서 보내야할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 합니다. 일단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영광의 세상에 들어간 뒤의 준비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도 큰일입니다.

  "일 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 이런 다짐이 있는 사람은 발전이 있습니다. 향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진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후회만 하고 있지 말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그런 결실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신앙의 열매도 많이 맺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열매도 맺기를 바랍니다. 생활의 열매도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우리 인생의 결산의 시간이 오면 만족하게 맞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년 8개월 동안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살아오셨습니까? 예배시간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셨습니까? 이제 부터라도 과감하게 다 끊어 버리고 그리스도인다운 의지를 가지고 중심이 바로 서있는 신앙생활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이 세상을 헤쳐 나아갈 힘도 지혜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주도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삶에 자신감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교구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을 돌아봅시다. 내 희생, 내 수고, 내 기도로 인하여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으로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나에게 무엇 때문에 오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하루하루의 유예기간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더 이상의 하나님의 참으심과 인내의 유예기간이 없이 바로 집행의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창조된 목적, 구원받은 목적, 교구와 구역에 직분을 맡겨주신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도 비겁했고 책임질 줄 모르는 인간으로 살아왔습니까?. 이제 부터라도 주도적 신앙, 주도적 세계관, 그리고 이 나라, 이 사회, 교회와 교구에 대한 책임을 지는 그런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심판 보면서 내가 대신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러한 주도적인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며, 책임지는 자세로 교구와 구역 부흥을 위해 헌신하셔서 하나님 앞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인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사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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