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길(2) - 순종 (삼상 15:17~23, 고후 12:7-10)

  • 잡초 잡초
  • 229
  • 0

첨부 1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게 될 때,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 부름 받은 삶이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초대받고 부름 받은 삶을 내가 살고 있구나 하는 소명의식이야말로 주님과 사귐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들어선 이 믿음의 길도 내가 들어서고 싶다고 해서 들어선 길이 아니고 나를 부르시는 분의 부름에 내가 따라 나선 길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참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아브람의 이야기가 이것을 말해줍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는 그 중간지점인 하란에 머물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다시 하란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된데는 아브람을 불렀던 부름이 있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아브람과 데라 두 사람 모두 가나안으로 가려고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러나 결과만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출발부터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가는 삶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그런 부름이나 약속 없이 자신의 목표를 따라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름, 소명하면, 어떤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계시나 특별한 사건을 통해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삶이란 성직자가 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만의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삶이 이 땅에서 유일한 삶인 것을 알고 진정한 내 자신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부름받은 삶입니다.

전에는 늘 남을 의식하며, 남과 비교하고, 남의 눈치를 보는, ‘척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자신의 삶을 이끄는 동력은 남의 눈치가 아니라, 내 내면 깊이에서 나를 부르시는 분의 부름이 되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때 부름에 응답하는 삶은 허황된 어떤 것을 쫒거나 자신이 세워놓은 목표를 죽자 사자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지금 여기”를 온전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누리며 그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느끼는 삶이야말로 소명 받은 자의 삶입니다.  전에, 기도회에서 말씀드렸던 형제 로렌스처럼, 비록 평수사로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았어도 그는 온전히 자신을 누리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하나님의 부름에 귀 기울이며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누가 뭐래도 사람들의 시선이나 박수갈채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 정성껏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이래야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걸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내면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공허한 부름이 아닙니다.  허황된 부름이 아닙니다.  나를 속이는 부름이 아닙니다.  약속 있는 부름이고, 희망 가운데 있는 부름이고, 복을 주시기 위한 부름이고, 나 자신을 가장 나답게 살게 하시는, 나를 위한 부름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고 보면,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다보면, 내가 바로 이런 부름 받은 자의 삶을 살고 있구나, 아 나는 복을 받았다 하는 자각이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의 태도는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순종은 사람에게 대한 굴종이나 자신이 할 수 없어 위축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에게 아부하거나 눈치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때의 순종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향하여 열려진 자세가 순종입니다.  귀를 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순종에 있었습니다.  그는 너는 너의 삶의 터전을 떠나가라는 부름에 떠나갔고, 네 아들을 바치라는 부름에 아들을 바쳤습니다.  삶의 터전을 떠나라는 부름이 너를 안전하게 할 것 같은 모든 안전의 표상들을 버리라는 말이라면, 아들을 바치라는 말은 네 자신의 모든 기대, 너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을 붙잡으라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이런 부름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 완전해 졌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신 분이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에서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그분의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 즉 순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 즉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잘 모르더라도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신 분에게서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부름을 향해 열려진 자세는 잘 듣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순종은 곧 잘 듣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을 보면, 사울왕이 여러 전쟁에서 이긴 후 절정기에 있을 때, 아말렉과의 전쟁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쟁에서 얻은 것들을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전리품이 아까워 남겨 둡니다.  그리고는 갈멜에서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갑니다.

이때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줍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주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사울은 변명합니다.  “전리품 가운데 양떼와 소떼를 남겨 두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려고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온 것입니다”

이때 사무엘이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생각이 꽉차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생각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성과가 우선했습니다.  그동안 전쟁에서 매번 승리하면서 그는 그 승리에 취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급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울이 하나님 말씀 듣기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들으려면, 겸손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물엘은 말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였습니까?”

말씀을 잘 들으려면, 겸손이 필요합니다.  낮아져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신의 체험 하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그가 삼층천에 올라갔던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 그는 이런 경험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경험한 그것으로 나를 평가할까봐 두렵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읽은 7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게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 그때마다 들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한다고 고백합니다.  10절,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함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힘을 뺍니다.  오로지 그 분 안 있음으로 해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여기서 바울의 겸손을 봅니다.  그 겸손은 사람을 기본적으로 향한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그리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기도 했고, 이방인과의 식사 중에 피신했던 베드로를 향해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었고, 전도 여행에서 탈락한 마가를 버리기도 했으며, 그의 절대적인 후원인이었던 바나바와도 결별할 정도로 혈기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그대로 내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그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합니다.  저는 이런 바울이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반평생을 예수를 전했던 바울이 그의 말년에 쓴 로마서에서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신의 죄성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평생을 순종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난 것을 보았고, 자신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뜻을 모시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순종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겸손이라고 하면, 순종이 그런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기 비하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어떤 선행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어떤 태도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갖는 나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내 상한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상처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약함과 죄성을 그대로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토마스 키딩은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이란, 우리가 자기 비난이나 부끄러움, 분노, 혹은 낙망 같은 정서적 반응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편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한편, 자기 비난이란 신경질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비난은 상처받은 자존심이 ‘또 그랬구나, 머저리야, 너는 언제나 일을 그르친단 말야! 너는 나의 이상적인 완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신, 겸손은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자신을 그대로 맡겨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한없이 약하고, 상처받기 쉽고, 무능하며, 죄로 인해 부패되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열심, 헌신, 믿음만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열심, 헌신,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화려한 번제물이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키팅은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들을 하나님께 선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런 선물을 원하신다고 말합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갈까요?  주님께서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열심이 부족했으니까 더 열심을 내고,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으니까 더 기도하고, 우리의 봉사가 부족했으니까 더 봉사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가 부족했으니까 성경을 더 읽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믿음과 헌신으로 내가 더 완전해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완전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완전해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자가 들을 수 있고, 듣는 자가 주님의 부름을 의식할 수 있으며, 부름을 의식하는 자가 주님과 참된 사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