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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철학이 그 사람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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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은 이 세상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1. 거미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
2. 개미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
3. 꿀벌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
거미 철학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피해만 줍니다. 개미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열심히 일은 하는 데 자기만을 위하여 열심히 일합니다. 꿀벌 철학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유익을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태리의 유명한 테너 가수 카루소가 어느 날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지배인이 알아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같이 유명한 가수를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어서 기적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노래 한 곳 불러 주십시오.>
그는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신나게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무대도 아니고, 반주도 없는 데 이런 곳에서도 노래를 합니까?>
카루소가 말했습니다.
<내 인생 철학은 내 노래를 좋아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 곳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그 사람의 철학이 그 사람 그 인생입니다.

반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번 이태리를 갔을 때였습니다. 가이드가 이태리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목소리가 특이하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리는 말했습니다.
<성악을 하고 계신데 노래 한 번 불러 줘요.>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노래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3000명 이상 모여야 합니다. 둘째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셋째 악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철학이 그 사람의 인생관입니다. 기차가 철로위로만 달리듯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철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줄 유산을 미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가 허랑방탕하였습니다. 창기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돈이 다 떨어졌는 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어 인심이 사나워졌습니다. 남의 돼지를 기르면서 돼지죽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쥐엄열매를 따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고생고생하다가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는 회개하며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아들이라 부르지 말고 품군이라 불러 달라고 하여야지 하는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오는 것을 아버지가 먼저 보았습니다.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새 신을 신켰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라면서 동네 사람들을 데려다 잔치를 하였습니다. 탕자 형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와 보니 온통 집안이 뒤집어져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동생이 그렇게 돌아 온 것이었습니다. 형은 아버지에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형을 설득하였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민다면 세 주인공이 등장하게 됩니다.
1. 탕자
2. 형
3. 아버지

1. 탕자 철학
탕자는 <나 중심 주의 철학>입니다. 나만 좋은면 좋습니다. 나만 좋으면 가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떠날 수 있습니다. 형을 떠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나만 즐거우면 창녀와 놀아 나도 좋습니다.
오늘 즐거우면 만족합니다. 내일은 없어도 됩니다. <네 것은 내 것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거머리 철학>입니다. 내가 좋으면 네 피를 빨아 마실 수 있습니다.
요즈음 예배시간이나 버스나 전철이나 극장에서 핸드폰 관리를 잘못 하는 이들입니다. 남은 상관하지 않고 큰 소리로 할 이야기 다 합니다.

2. 형 철학
탕자 형은 고립주의 철학이었습니다. 동생이 가출하였는 데 한번도 찾지 않습니다. 그리워 하지도 않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아버지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돌아 왔는 데도 즐거워 하지 않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와서 즐거워하면서 잔치를 하는 데도 그 곳에 있지도 않습니다. 더불어 살기를 거절합니다. 혼자 삽니다. 방관주의입니다. 냉소주의입니다. 동생 철학이 이기주의 철학이라면 형은 고립주의 철학입니다. 이기주의 철학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고립주의는 피해는 주지 않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소풍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점심시간이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고기를 싫컷 먹고 나머지를 종이에 싸서 쓰레통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그 고기 도시락 싸가지고 오지 않은 친구에게 주면 잘 먹을 텐데...> 그 아이가 얼굴하나 붉히지 않고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혼자만 먹으랬어요. 나누어 먹지 말랬어요.>
고립적인 아이로 기르는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형이 그랬습니다. 누구와 어울리지 못 하고 혼자 사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그렇습니다.
핵을 만들어 실험하였습니다. 전세계가 북한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말했습니다.
<전 세계는 우리의 적이다.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도 믿지 못 하겠고, 쏘련도 남한도 적이다.>
스스로 고립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탕자 형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고립주의를 싫어하십니다. 변화산위에서 세 제자와 예수님이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세우고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주님위하여 살게 하소서.>
그러나 주님의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려와셔서 병자를 고치시며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립주의를 거절하셨습니다. 위에서 기도하고 내려와서 일하여야 합니다.

3. 아버지 철학
탕자 아버지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달라는 대로 줍니다. 양보합니다. 기다립니다. 참습니다. 용서합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 드립니다. 분에 넘칠만큼 주고 또 주고 또 줍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철학입니다.
예수님의 인생 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1) 낮아지는 철학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 번 변신을 하셨습니다.
제1단계 하나님이 사람으로.
제2단계 사람이 종으로.
제3단계 종이 사형수로 변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꼭 하나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히틀러 당시 독인 나치 군대는 막강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를 하나하나 점령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유럽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찾아 내어 죽였습니다. 그 나라를 점령하면 히틀러 군대는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노란 별을 가슴에 달아라. 만일 유대인인 데 노란 별을 가슴에 달지 않으면 발견 즉시 즉결 사형이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그 때 유대인을 죽이지 않고 보호한 나라가 있습니다. 덴막입니다.
당시 덴막 왕 크리스티언 10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고귀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덴막에 공포하였습니다.
<모든 덴막 국민들은 가슴에 노란 별을 달아라.>
그래서 유대인과 덴막인을 구별하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두고 두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덴막 국민은 그렇게 히틀러가 미워하는 유대인으로 낮아져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철학이요 탕자 아버지의 인생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낮아져서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 섬기는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미국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평생에 많은 사람을 보아 왔는 데 맡은 일에 헌신하는 사람치고 악인은 없었다”
영국의 왕 죠지 6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쓸 때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현재와 지난 생애에서 얼마나 남에게 봉사하였느냐 얼마나 헌신하였느냐를 보면 된다”

미국에는 <훌륭한 이웃상>이라는 상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아름답게 사는 사람을 발굴하여 주는 상입니다. 얼마 전에 그 상을 받은 사람은 멀시 대학 철학교수가 받았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을 소방수로 무료 봉사하였습니다. 때로는 구급차 운전기사로 무료 봉사를 자원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초등학교에 가서 농구 코치를 하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늘 시간만 나면 <이웃을 위하여 무엇을 봉사할가>만 생각하였습니다. 500시간 봉사한 후 그는 <훌륭한 이웃상> 수상자로 추천되어 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생철학은 남을 섬기는 철학입니다. 탕자 아버지는 대접을 받으려고 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받으려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주기만 하였습니다. 섬기기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 철학입니다.

(3) 남을 잘 되게 하는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함이라>)요 10;10)

예수님은 남을 잘 되게 하려는 인생 철학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탕자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자녀들이 잘 되고, 이웃들이 즐겁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남이 나 때문에 잘 되게 하려는 인생 철학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탈리에도 미군이 가있습니다. 어느 군인 아들 중에 바비 힐이라는 조그만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아프리카 람바레네에서 일하고 있는 슈바이쳐 기사를 읽다가 약이 모자라서 흑인들이 죽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 공군 사령관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령관님! 우리 아빠도 공군이에요. 제가 먹으려고 아스피린 한 병을 샀어요. 사령관님에게 보내드리니 비행기가 아프리카를 통과할 때에 슈바이쳐 박사님 병원위를 지나거든 이 약을 떨어뜨려 주세요.>
사령관은 너무나 기특하여 이 약과 편지를 방송국으로 보냈습니다. 방송이 되었습니다. 즉각적으로 4억원이 모금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인생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보상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아주머니 한 분이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그 녀는 빵과 우유를 샀지만 고기를 몇 근 훔쳤습니다.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할 때여습니다. 그 녀는 빵 값과 우유 값만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 계산하던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아줌마, 그 가방 좀 열어 보세요.> CCTV로 감시원이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는 열지 않겠다고 우겼습니다. 드디어 경찰이 왔습니다. 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방에서 고기가 나왔습니다. 그 녀는 당연히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모두 그 여자를 도둑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드디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그 가난한 아주머니를 부드럽게 심문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아이들 5명을 기르고 있다는 것 알았습니다. 집도 없었습니다. 수입도 없었습니다. 몇 달 동안 기름진 음식이라곤 한 번도 입에 대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재판관은 선고하였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그렇게 한 것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집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취직을 시켜 주었습니다. 정부에서 보조금도 받게 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남을 잘 되게 하는 탕자 아버지 철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탕자의 인생철학은 자기만 아는 인생철학이었습니다. 탕자 형은 고립형 인생 철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탕자 아버지는 주기만 하는 인생 철학, 섬기는 인생 철학, 남을 잘 되게 하려는 인생 철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인생 철학이 바로 이런 철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 철학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설교 준비를 막 하고 있는 데 전화가 왔습니다. LG 회사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고객님은 10년 단 한번도 연체된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할부로 물건을 산 적이 없습니다. 기록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 LG에 VIP로 모시는 특별 카드를 발송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어떤 비싼 물건을 사시더라도 10개월 분할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무이자입니다. 특별히 모실 것입니다.>
나는 할부로 물건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안 살 것입니다. 남의 돈을 연체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돈에 대한 내 철학입니다. 그 사람의 철학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탕자 아버지같이, 예수님같이 아름다운 인생 철학을 세우고 아름답게 구원의 백성처럼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강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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