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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신앙인의 자세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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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름대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부자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한 자리에 모여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돈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께 바치면 좋을까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한 부자가 앞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돈을 던져서 그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고 아닌 것은 자기가 갖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부자가 앞에 한 줄을 그어 놓고 돈을 던져서 왼쪽으로 가면 하나님의 것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자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마지막 세 번째 부자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서 왜 땅을 보고 있는가? 나는 하늘로 돈을 던져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알겠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욕심을 따라 사는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이미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쉽게 말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예수님께서 앞에 서서 가셨다는 것은 마지 못해서 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능동적으로 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서 가고 있는데 그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까? 참으로 한심한 것은 그들 제자들은 이제 한 자리를 차지할 때가 된 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그 옛날 다윗 왕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고난은 건너뛰고 다만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면서 그들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다만 자기 자신의 욕심만을 좇는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크게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서 높아지는 방법은 이 세상의 방법과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 섬김의 모델로 제시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대속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노예나 포로, 또는 죄수를 풀어 주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값이 바로 대속물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당연히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아낌없이 자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직전에 제자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죽으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메시야 기대 사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 즉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한 오해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세 번씩이나 그들에게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삼 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거동락했지만 그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사명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또 무엇을 하셨는지 바로 알 때 우리는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또 우리를 무서운 죄로부터 구원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삶의 올바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제자들은 삼 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그 예수님으로부터 귀한 교육을 많이 받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여전히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어쩌면 그토록 무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대답을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월과 성숙한 믿음은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참으로 귀한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삼 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 동안 제자들이 배운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세월이 가면 믿음도 자연히 성장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생각이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믿음이 그와 비례해서 성장하기보다 오히려 더 약화되거나 퇴보하는 현상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6장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은 두 명씩 나가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발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9장의 기록을 보면 산 아래에 머물던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 들린 소년 한 명을 고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세월과 성숙한 믿음이 비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단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후에는 그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맡은 직분이 또한 성숙한 믿음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두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따르는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특별히 기도하신 후 예수님께서 친히 택하신 인물들입니다. 괜히 사도라고 불리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권위있는 지도자들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님께서 하시던 복음 사역을 계속해서 담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자동적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한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실족하지 않았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실수했습니다. 베드로도 실패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완전히 실패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결국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맡은 바 직분이나 직책이 결코 성숙한 믿음을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목사, 장로, 교사, 찬양대원 등의 직분은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직분이나  직책이 성숙한 믿음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고난의 모양을 하고 있는 복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이 때로는 복에 이르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고난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운명의 한 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가신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도 결국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의 부활에 이르시지 않았습니까?

  고난은 감추어진 복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고운 조갯살 속에 모래를 집어넣는 것처럼 고난은 보다 나은 하나님의 일꾼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과 함께 겪는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은 육체적인 것이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 상대방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많은 손실과 불이익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런 어려움을 피하는 것은 변화되기 전의 제자들처럼 부끄럽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배신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취해서 살아가지 말고 앞서 가신 주님처럼 고난과 죽음도 달게 받기로 다짐하고 결단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서부터 그 주님과 함께 기쁘고 즐거게 참된 신앙인의 삶을 사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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