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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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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동편에 가셔서 예수님께서 안식도 취하시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는데 넓은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칩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물이 배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이쯤되자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주님께서는 두려움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든 것이 두려워집니다.  세상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풍랑 앞에 겁에 질려 당황하는 제자들, 그들의 외침 속에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자 마자 파도와 바다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풍랑을 극복하고 예수님과 함께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인생의 풍랑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은 지금 인생의 극심한 풍랑의 한 가운데 서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풍랑, 민족적인 풍랑, 가정적인 풍랑, 우리가 이 풍랑을 극복하고 우리의 꿈이 기다리는 저 편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풍랑이라는 과정을 직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풍랑을 직면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 중에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자,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칩니다.  배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뱃전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배에 가득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정말로 예수님이 주무셨다는 것입니까?  이 사건 앞에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에는 피곤하니까 주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풍이 몰아치고 배가 흔들리고, 얼굴에 굵은 비가 뿌리기 시작하고 물이 들어오고, 뱃전에서는 겁에 질린 제자들이 아우성인데 아직도 주무시고 있었단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주무셨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는 깨어나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무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무시는 것처럼 가만히 계셨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러면 왜 일어나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이 물결 속에, 이 파도에 반응하는가 그것을 보시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상당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이 '시험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험한 사건이다, 이 풍랑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왜 이런 시험을 하셔야만 했겠습니까?  인생의 바다에는 풍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가 지나가면 또 다른 풍랑이 다가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인간 관계의 풍랑, 관계가 단절되어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밤을 잘 수 없는 고통의 가슴앓이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한 순간 건강이 꺾여 버린 그런 풍랑을 겪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거대한 풍랑 하나를 겪고 나면 다른 풍랑에는 상당히 자신이 생기게 됩니다.  풍랑을 겪을 줄 아는 마음의 준비, 이것은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서 이 풍랑을 허용하지 않으셨겠는가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풍랑이 어떤 때는 전혀 예고없이 다가온다는데 우리를 당황시키게 만듭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풍랑, 사실 인생의 많은 풍랑은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다가와서 깊은 상처를 남기고 홀연히 이 풍랑은 떠나갑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해발 2,760m의 높은 헬몬산이 있습니다.  이 헬몬산에는 항상 눈이 덮여 있습니다.  헬몬산에서 차가운 물이 좁은 협곡을 타고 내러와 갈릴리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바다는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덥습니다.  이 찬물이 헬몬산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아열대성의 더운 갈릴리 바다의 표면의 물과 부딪치면서 갈릴리 바다는 예고하지 않았던 급작스런 풍랑을 일으킵니다.  갑작스런 파도가 일어납니다.

저는 이 갈릴리 바다야말로 우리 인생에 대한 아주 적절한 상징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 의외성의 풍랑, 이 환란, 그래서 우리는 더 당황하고 더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풍랑은 우리의 인생에서 쉴새없이 다가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준비하라고 주님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풍랑이 면제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풍랑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풍랑은 오지만 풍랑을 뚫고 나아갈 수가 있다.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을 원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형형색색의 시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시험을 대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 나타난 갈릴리 바다의 풍랑, 제자들이 경험했던 이 풍랑은 오늘 성경에 보면 큰 광풍이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이 '큰'이란 형용사, 수식어가 '메갈레'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메가톤급의 풍랑이라는 말입니다.  거대한 풍랑, 내 삶의 근저를 흔들어 버리는 풍랑, 그리고 내 삶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풍랑, 이 거센 풍랑이 덮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풍랑만 겪어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어떤 풍랑에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풍랑을 허용하신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거센 풍랑이 일고 있는 이 바다를 지나가 우리의 꿈의 언덕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풍랑은 있을 수가 있다, 시련은 있을 수가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풍랑을 넘어서서 저 바다 건너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깨어 일어나면서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바다를 행해서 명령하십니다.  "바다야 잠잠하라"  그리고 바다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고요한 바다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말씀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그리고 또 하나는 40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 그렇게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이 어부의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좇아 나섰을 때 예수님께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야다, 구세주다, 저 분을 따라가면 인생이 변한다, 우리 인생이 희망을 얻을 수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풍랑이 일어났을 때, 이 순간 이 삶의 현장 속에서만은 제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믿음의 사람들도 어느 한 순간, 인생의 어느 한 사건 앞에서, 어떤 특수한 한 현장에서만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자들의 입장이 바로 그런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당황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선생님, 선생님, 일어나셔야죠.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잠만 주무십니까?  일어나서 뭔가를 좀 하십시오.  하십시오.'

너무 당황을 하니까 예수님 보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보고 막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인생의 에피소드는 내 삶에서도 언제나 일어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예수님, 이렇게 좀 해 주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지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이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 주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 혹은 예수님의 평안을, 예수님의 무관심, 예수도 이런 상황, 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하늘도 무심하다, 하나님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무관심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 하면서 제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믿음을 적용시키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가진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제대로 믿음을 가지려면 환경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위축되고 있었고, 그 믿음은 고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그 현실에만 우리 인생의 시선을 고정시키면 우리는 위축당합니다.  우리는 낙심합니다.  우리는 좌절합니다.

그럴 때는 여러분, 보려고만 하지 말고 들으려고 하십시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은 작은 음성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이 고통의 현장, 이 낙심과 불안의 환경, 시련의 현장 속에서도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고요히 말씀하시는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의 음성을 들어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그 믿음은 말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나의 믿음을 일으키는, 그 믿음을 생성시키는, 그 믿음을 성장시키는 원천입니다.

저는 성경과 멀리 하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역경이야말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열 시간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주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이 말씀은 믿음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만 가지면 이길 것입니다.  우리는 재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풍랑의 이 바다를 건너가려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바른 믿음, 역사하는 믿음,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풍랑의 바다를 건너 저 소망의 바다 건너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확신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확신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를 향해서 명령하십니다.  본문 39절 말씀에 보면 바람을, 바다에 일고 있는 바람을 예수님이 꾸짖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꾸짖으셨다.  이런 특이한 단어가 사용됩니다.  바람을 꾸짖으셨다.  본래 '꾸짖는다'는 단어는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꾸짖을 때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바람을 꾸짖으셨다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성서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풍랑의 배후에는 어쩌면 악한 세력, 사단의 역사함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고통이 악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고통은 사탄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좌절시키고, 나를 낙망시키고, 나를 주저앉게 만드는 일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권세를 의지하고 꾸짖으셔야 합니다.

"파도야, 잠잠하라!  고통아, 사라져라!  문제야, 극복될지어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갖고 나아가면 고통은 극복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병마는 떠나가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나가면 이 땅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정복될 것입니다.  이 역사를 우리 모두가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파도와 바람이 잠잠해 졌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본문 4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본문에 보면, 저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저분이 누구신가?  바람과 파도도 잠잠케 하시는 저분은 누구일까? 라는 질문을 던졌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의 초기에 우리가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가 있는가?  우리는 이 차원에서 신앙을 접근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가 있을까?  이 신앙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우리는 이런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신앙을 접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의 사람이 되려면,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이라는 질문에서 '누구'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그 확신이 없이,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분은 누구일까?  바람과 파도도 복종하는 저분은 누구일까?  제자들은 어느새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저분은 바람을 지으신 분이 아닐까?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저분은 파도를 지으신 분이 아닐까?

한순간 그들은 인간 예수의 사실에서부터 그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도 이 고백을 넘어서지 못하고 진정한 크리스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섭리자이십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고 평안을 줄 수가 있는 분, 인간의 내면의 내 마음속에 있는 풍랑도 잠잠하게 하고, 나를 평화로 인도할 수가 있는 분, 나를 구원할 수가 있는 분, 예수는 나의 구원자.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창조자 그리고 예수님은 섭리자, 예수님은 통치자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자, 한순간 그들은 신앙의 놀라운 발견 앞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시면 41절에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본문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이 처음에는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무서워한다는 단어하고 41절에 그들이 뭔가를 깨달으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의 단어는 다른 단어입니다.  다른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R.S.V.라고 하는 영어성경에 보면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라는 낱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찼다.  이것은 아주 놀라움입니다.  경이로움, 한 순간 그들은 놀라운 경이 속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마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  파도와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분, 그 순간 그들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이 함께 한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그러면 문제가 달라지는 겁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 끝난 것 아닙니까?

풍랑이 일고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풍랑이 문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행복은 무엇입니까?  안정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풍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 이것이 안정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것이 승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밖에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5년 전에 유고슬라비아에 한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틴 에이저 소녀가 되었습니다.  틴 에이저 시절에 그가 성경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불타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는 선교사를 자원했습니다.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카톨릭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캘커타에 왔습니다.  그가 온지 얼마 안되어서 그는 거리를 지나다가 한 병은 여인을 발견합니다.  병들어서 엎어져 있는데 오래된 모양 같습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몸의 한 쪽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쥐들이 와서 파먹고 있었습니다.  이 참담한 모습을 바라보고 그는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춥니다.  어떻게 할까?  그 순간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 힘없는 연약한 여자가, 아녀자가 무엇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뭐가 당깁니다.  마음에서 뭐가 당깁니다.  "네가 도와야 한다."  그는 순간적으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못해요"  그때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도와도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가능하겠죠.  그는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돌이켜 가서 이 여인을 들쳐 엎습니다.  자기 집으로 옵니다.  그리고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 세 사람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 도시에 행정 관리를 찾아가서 마침 그가 머물고 있었던 숙소 곁에 빈 힌두 템플 하나가 있어서 그 템플을 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클리닉으로 만들었습니다.  숫자가 늘어갑니다.

수년전에 이 여인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현대의 이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 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감동을 남기고 떠나간 마더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죽기 전에 영국 BBC 뉴스에 크리스챤 언론인이었던 '멀컴 머코리치'라는 분이 이 캘커타를 방문해서 테레사 수녀의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거동이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테레사 수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가 가만이 병원에서 관찰해 보니까 사람들이 병원에서 봉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행복한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에게 "힘들지 않으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이런 흥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힘들지요.  힘들지요.  그러나 즐겁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의 요체를 이 간단한 세 마디가 다 요약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힘듭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힘든 게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힘든 건 힘듭니다.  힘듭니다.  그러나 즐겁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겁니다.  이 시기를 지나는 것이 힘들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힘들어도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본문이 시작되는 맨 처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이 항해를 제안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바다를 건너가자고 제안한 분이 그분이십니다.  그는 이 바다를 건너갈 계획을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풍랑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항해를 제안하신 분, 그리고 이 항해 속에 함께 하시는 그 분, 그 분이 항해를 계획하셨다면 이 풍랑도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일 수가 있습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풍랑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주님만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능히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 풍랑도 우리에게 플러스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바다 저편을 향해서 우리는 다시 용기있게 일어나 비젼의 항해를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파도를 극복하고 인생의 새로운 창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위대한 고백을 붙잡으십시오.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왜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사명을 붙잡고 달려가는 황홀한 평신도 사역자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일어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시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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