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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점점 강하여 간 다윗의 집 (삼하 2:24-3:1, 롬 1:13-17, 마 1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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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아주 작은 것을 말할 때 쓰는 표현 가운데는 “눈꼽 만 하다”든지 “좁쌀만 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만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틴 땅에서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너희 믿음이 겨자씨만 하다”고 하셨을 때 가장 형편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록 그런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산을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위대한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만능”이라는 말을 씁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디서 그런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아무리 작아도 씨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그 생명이 능력의 원천입니다. 거기서 싹이 나서 자라면 나무같이 커서 새들이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 땅에서 처음 시작될 때는 겨자씨와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이단”이라고 과소평가하였고, 제자들이 다소 소란을 피우기는 해도 “불학무식한 사람들”의 저 이단단체가 별 볼일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잠시 시끄럽다가 이내 사그라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 비유 말씀대로 역사상 기독교 발전과정을 보면 “새들이 깃들이는” 거목 중의 거목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신앙도 그렇고 우리 개 교회의 성장도 그렇습니다. 우리 서부교회의 역사를 보면 1924년 처음 운안동439-7번지의 대지 80평에 초가 6칸의 임춘심 성도님의 집에서 조광옥, 조흥노, 엄씨, 조희규, 임춘심, 권대훈씨등 6분으로 출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 안동 땅은 유교 불교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성하였겠습니까? 그런 터전에 초가집에서 6명이 모인 공동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82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는 2천 여 평의 대지위에 연건평 1600여 평의 교회당 건물을 이루었으며 그 어간에 우리 교회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지역에서 거목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과도 같은 믿음이 있는 이상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정말 30배, 60배, 100배로 열매 맺으며 성장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또 지금 여러분 속에 있는 믿음이 겨자씨만하다고 해도 우리 주님은 그 믿음을 통해서 태산을 옮기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시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쳤던 위대한 영웅 나폴레온도 그 생애 마지막에 칼과 창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었던 자신은 결국 실패자요 저 나사렛 예수, 오직 사랑의 깃발을 가진 나사렛 예수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로마서를 보십시오.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비유처럼 우리 믿음이 겉으로 보기에는 겨자씨 같지만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이루실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원래 구약에서 “나무”는 대제국을 말할 때 사용했습니다. 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고 할 때 그것은 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앗수르, 바벨론, 그리스, 로마가 그랬습니다. 이런 역사 속에 등장한 “나사렛 이단 괴수”라고 낙인찍힌 그리스도교는 겨자씨만도 못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3세기를 넘기지 못하여 대 로마 제국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분명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장래 일을 모른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역사의 마지막 날 최후의 승리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주께서 “만 왕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게 될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여기에 부조리한 현실과 어려운 우리네 여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확신과 소망이 있습니다.

2.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큰 그릇에 맑은 물을 가득 부어 놓습니다. 그리고 염색약이 든 조그만 유리병을 가지고 염료를 물에 한 방울 떨어뜨립니다. 처음에는 아주 미약한 변화만 나타납니다. 그러나 염료를 한 방울씩 한 방울씩 계속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큰 그릇의 물이 전부 염료 색깔로 변하게 됩니다.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염료를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를 위한 봉사가 교회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모두 헌금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바친 헌금 액수는 전체 건축비에 비교한다면 하나마나 한 것 같이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아예 포기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매우 적은 양이지만 여럿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게 될 때 오늘 우리는 이렇게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먼저 시작하면, 그리고 비록 작은 것이라도 내가 먼저 그것을 시작하고 그 일을 계속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됩니다. 욥기에 보면 “네 시작은 미약해도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되리라”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런 겨자씨 원리를 말해줍니다.

맨 처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과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셨을 때 누군가 먼저 “아멘”하고 따라나섰기 때문에 12제자가 되고, 70명이 되었고, 3천명이 되었고 5천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편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교회가 이 겨자씨 원리를 적용하고 실천할 때 정말 놀랍고 큰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각각 1년에 한 사람씩 전도한다고 합시다. 2사람이나 10사람이나 100사람을 전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1년에 단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면 1년 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우리 교인 수가 지금보다 배가되어집니다. 1년이면 우리 예배당은 오히려 모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예 실천할 생각조차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내가 먼저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작은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 모습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생명의 법칙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 큰일에도 충성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겨자씨 한 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의 큰 능력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겨자씨를 가지고 새들이 깃드는 나무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오늘 구약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3:1에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원래 목동이었지만 “점점 강하여 간”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이 갈수록 성공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이런 형통과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점점 강하여 졌다” 이것이 형통의 모습입니다. 성경에는 “의인은 정오의 햇빛 같아서 점점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 소망입니다. 어떻게 해야 날마다 더 발전하고 갈수록 더 좋아지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윗과 같이 되는데 있습니다.

(1)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 제일,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블레셋의 초거인 장군 골리앗과 대결하기 위해 나갈 때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보상을 바라서였습니까? 아니면 젊은 나이에 영웅심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인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참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그 유명한 골리앗에게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과 교회가 모독당하는 것을 목격해도 우리는 그런 일에는 매우 관대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감정이나 이해에 문제가 있을 때는 절대로 참지 못합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높여 주십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유대인들은 시편을 아예 “다윗의 글”이라 말합니다. 실제로 시편의 대부분이 다윗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찬양입니다. 그는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왕이 되어서는 찬양대를 조직하여 1년 내내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도록 했습니다.

원래 찬송은 우리의 승리의 노래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저 브라가 골짜기에서처럼 찬송할 때 우리 앞에서 원수는 물러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찬송할 때 우리 가운데 기적을 창출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점점 강하여지는 여러분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천하제일의 골리앗과 한판 결투를 벌이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예수 이름, 직장에서도 예수 이름, 어디 가더라도 예수이름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점점 빛나게 해주시고, 점점 강하게 해주시고, 승리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3) 무엇보다도 다윗은 주의 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군의 노획물을 왕에게로 가져오면 왕은 그 가운데서 가장 값나가고 귀중한 것을 성전 건축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조공을 받거나 선물을 받았을 때도 역시 자기가 소유하지 아니하고 성전 건축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바치는데 이력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것은 세상에서 금을 가장 많이 보유했던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다 바쳤는데도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 사울의 집은 왜 점점 쇠하여 갔습니까?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를 우선순위 처음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으뜸의 위치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자기가 희망한대로 승리가 아니라 실패였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함께 멸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부모의 신앙 성공은 단지 부모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부모의 신앙 실패는 단지 부모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녀에게까지 그 실패가 승계되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가까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셔서 점점 강하여지게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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