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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새 지도자론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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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도 수난주간의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1-7절은 바르지 못한 지도자를 경계하는 내용이고, 8-12절은 바른 지도자의 태도를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기존의 예루살렘 성전이 소멸되고 새 성전이 마련되는 것처럼, 왕께서는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 대신에 새로운 지도자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 노예백성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은혜의 왕국’을 역사 가운데 분명히 드러내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모세는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율법을 주어 지도하는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 에스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세계에 동화되어가자 선민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한 ‘하시딤’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그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도 대체로 바리새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율법을 보존하고, 백성들에게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며, 필사해서 후대에 전수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모세처럼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답게 인도할 지도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삶의 현장 속에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지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은, 어느 시대의 신앙 지도자든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야 할 일입니다. 목사라면 성도들로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해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가장이라면 자녀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부지런히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지도하는 역할 없이 풍족한 생활환경만 제공한다고 저절로 성도나 자녀가 거룩한 도리를 깨닫게 되지는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나 모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3) 첫째로, 그들을 말만 하고 행치 않는 지도자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하게 잘 말했습니다. 그러나 말만 할뿐 동방박사들처럼 메시아를 찾아가 경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치지도자들과 결의해서 메시아를 죽이려 했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고 잘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해서 까다로운 규칙들과 의식들을 잔뜩 만들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지키면 자연스럽게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한 채 만들어낸 수많은 조항들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되었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4) 사실 그들의 성경해석 행위도 문제는 많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생각했지 다윗의 주가 되신다는 점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점은 바르게 가르친 말씀조차 자기들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면 말로 가르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사람’에서 ‘말은 잘하는 사람’, ‘말만 잘하는 사람’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어찌해야 될까요? 디모데후서 2:15절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완벽하게 말씀을 분변하고 완벽하게 부끄러움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단히 그렇게 되고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바울도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언제나 말씀을 옳게 분변하고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힘썼던 사람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지도자였습니다(5). 좀 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들은 부지런히 연구하고 행동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 구절이 기록된 양피지를 담아 손목과 미간에 붙였던 작은 가죽 상자인 경문을 넓게 만들었습니다. 계명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겉옷 네 모서리에 달았던 청색 옷술도 크게 만들었습니다(신 22:12). 그리고는 부지런히 잔치와 회당과 시장을 돌아다녔습니다. 이는 높은 자리에 앉는 것과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6-7). 상석에 앉는 것이나 문안 받는 것이나 랍비라 칭함 받는 것 자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 있는 영직지도자의 가치관이 ‘사람에게 보여서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었기에 문제가 큽니다.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면 ‘보이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사람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매우 부지런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몹시도 게을러서, 하나님 앞에서의 내밀한 신앙 활동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모든 영역에서는 당연히 소홀할 것입니다. 교인의 숫자나 예배당의 웅장함에는 민감하면서, 그 구성원 각각의 내면에 바른 신앙이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할 것입니다. 몇 시간 기도했는지는 중히 여기면서 과연 바르게 기도했는지에 대해서는 경홀히 할 것이며, 성경 몇 번 읽었는지는 관심을 두지만 과연 말씀을 옳게 분변했는지는 무관심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지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들을 보면서 뿌듯해하고 점차 조금씩 과장해서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으셨고, 대신하여 주님의 제자들을 당신님의 나라에 새지도자로 임명하셨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지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은혜의 왕국’이 역사 가운데 명백히 드러나도록 힘쓰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제자들이 가져야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는 ‘모두가 동등한 형제’라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8-10) 앞으로 제자들은 ‘사도’라는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랍비처럼 진리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칠 것입니다. 영적 아버지처럼 갓 태어난 영적 자녀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무리들의 지도자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사도의 자리는 모세의 자리보다 더 영광된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태도는 ‘나는 사도’라는 의식이 아니라 “다 형제”라는 마음 자세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누님이 대뜸 ‘승진 축하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전형적인 불신자의 가치관입니다. 성도가 집사나 장로의 직분을 맡게 되는 것을 승진한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그들의 역할이 교회에서 재정적인 문제와 성도들의 신앙의 제반 문제를 다루는 지도적 위치에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의 자세는 ‘나는 목사’라는 마음 이전에 ‘우리는 형제’라는 마음가짐입니다. 참 교사는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참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참 지도자도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의 목자도 오직 주님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형제로서 ‘은혜의 왕국’을 위해 각자의 은사대로 역할을 분담했을 뿐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직책을 만들고 감투 쓰기 좋아한다고 비판 받곤 합니다. ‘사장님’이라는 특수 용어가 ‘아저씨’라는 일반 호칭을 대치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본성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은혜의 왕국’을 삶으로 나타내 보이시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가치관을 거슬러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시대적 경향과 반대되는 목표를 제시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 위선자들의 목표는 언제나 남들 앞에 자신을 높이는 것과 남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목표는 언제나 ‘섬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지로에게 요청되는 두 번째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분으로서 가장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아 지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때를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때에 따라 어김없이 순종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계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시려고, 제자들의 인간적인 기대를 철저히 외면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들을 심방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섬김으로 인해 제자들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꿈을 넘어서, ‘은혜의 왕국’을 역사 가운데 현시하려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순교의 피를 드리기까지 성도들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도록 지도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섬기신 주님의 섬김이 또다시 십자가를 지기까지 섬기는 제자들이 되게 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하루 앞두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지도자 상에 대해 묵상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한 형제로서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을 잘 드러내는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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