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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자처럼 (골 3:1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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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조카 승은이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흉내를 많이 내면서 자랐습니다.
언젠가 승은이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 쬐고만 애가 뒷짐을 지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저도 한참 웃은 적이 있는데, 그것도 물론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가 할아버지 흉내를 낸 것들 중에서 압권은 바로 할아버지께서 강단에서 축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 중에서 목사의 축도를 흉내 내면서 자라는 아이는 어쩌면 승은이 한 명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역시 석씨 가문의 자손이구나.'하고 저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나 손자는 아무래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모습을 이어가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기왕에 흉내를 내고 이어받을 바에는, 좋은 것들만 본받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승은이가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말이나 몸짓만 흉내 내는 아이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신앙과 영력을 그대로 이어받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조카를 바라보는 큰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신자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처럼"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생활인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답게 살 수 있는지는 바로 이어지는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이란 구절에 집약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자가 되어도 하나님의 좋으신 것들을 모두 다 본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그 절대주권성 같은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근처에도 가 볼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완벽하신 속성 중에서 신자가 그래도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또한 반드시 본받도록 명령까지 내려놓으신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과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본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성품들인 것입니다.
그 중에서 첫째로 12절 하반절로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택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답게' 이웃과 성도를 용서하며 사랑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바로 그 같은 주제의 둘째 대지 '하나님의 택하신 자답게 거룩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공적 예배와 개인 경건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보았던 12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또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나온 이웃 사랑의 교훈은 택자의 '대인(對人)관계'를 두고 하신 말씀인데 비하여, 이것은 택자의 '대신(對神)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도 인간의 죄성과 가장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 시작할 때 '거룩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라고 찬송을 올립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셨더라면, 하나님 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다른 사람을 두고 그처럼 '거룩'이란 단어로 수식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영웅 아무개,' '절세미인 누구'라는 식으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고, '위대하신 수령님'이나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 따위의 명칭은 제멋대로 갖다 붙일 수 있을지 몰라도, '거룩'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사람 앞에도 도무지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아무리 경건하고 성스럽게 살았다 하는 신앙의 인물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진리의 파수꾼 칼빈,'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 - 이런 말은 쓸 수 있지만, 이런 사람들 앞에서조차도 '거룩한 아무개'란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이란 단어는 원래는 하나님께만 온전히 속한 말이요 하나님께서만 사용하실 수 있는 전용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죄인인 사람은 이러한 거룩성이란 것과는 아주 정반대의 극치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이란 말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붙여주셨습니다.
즉 본문에서 바로 우리를 가리켜 "거룩한 택자"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묘사할 때만 쓰일 수 있었던 귀한 표현을 놀랍게도 바로 우리에게 붙여서 불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은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피차를 가리켜 '아무개 성도님'하고 별 생각 없이 부르고 있지만, 이 '성도(聖徒)'라는 말의 뜻, '거룩한 무리'라는 그 의미만 되새겨보아도 우리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 이처럼 귀한 것인 줄 안다면, 우리는 이 별명에도 역시 어울리게 행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원래 '거룩'이란 것과는 아주 담쌓고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거룩한 자'라고 불러 '주셨을 때에는, 그 귀한 이름에 걸맞은 그 무엇인가가 우리 편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나타나야만 이름값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거룩한 택자다운 면모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붙여진 이 '거룩한 무리'이라는 이름에 그래도 좀 어울리는 어떤 표가 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것이 바로 '예배를 중심으로 한 경건생활'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함을 입은 백성이 된 표는 무엇보다도 바로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생활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16절과 17절이 이처럼 공사(公私) 간의 예배생활을 통하여 신자의 거룩함을 나타내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 예배생활의 첫째 요소는 바로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16절 상반절에 "16a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는' 상태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치신 말씀을 우리가 많이 배우고 기억하여 알고 간직하고 있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다'라는 표현을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가 자주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영적으로 동재하다'는 뜻으로 쓰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말씀 중에서도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랑 가운데 교제한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지키는 것과 문자 그대로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베풀어주실 대표적인 사역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육신적으로 함께 거하지 못하게 된 제자들을 위하여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방법도 바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과 계속 영적 교제를 나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아예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 그 자체라고까지 정의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한 가지 분명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되고 순종되고 역사하는 그곳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친히 동재해주시는 자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임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요긴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옆에는 옛날 엠마오 도상에서처럼 예수님께서 길동무해주시며 동행하지는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안에까지 친히 찾아오셔서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인사해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임재를, 그 동행해주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내재하는 그 시점, 그 자리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현재의 시간이요 실제적 공간이 됩니다.
어려운 때에도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바로 그 자리가 예수님께서 친히 내 곁에 오셔서 위로해주시는 자리이며, 성경 말씀을 펼쳐놓고 예배드릴 때 바로 그 자리가 우리에게는 옛날 디베랴 언덕에서 예수님을 주강사로 모시고 산상집회를 모이던 자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말씀의 풍성함을 가지고 "피차 가르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할 때, 그 말씀이 우리를 함께 뜨겁게 만들고 눈물 흘리게 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뵈옵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말씀의 풍성함'을 통하여 항상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시고 사는 이것이 우리 신자의 거룩한 예배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거룩한 예배생활의 둘째 요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16절 하반절에 "16b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는 것은 신자들이 부르는 찬송의 종류를 그 형식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인데,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찬송, 복음성가 등으로 구별해서 부르고 있지만 어떤 때에는 정확하게 그 차이를 구별하기가 힘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찬송이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예배순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어느 지방 총독이 기독교에 관하여 조사를 하여서 트로얀이라는 로마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 보면,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별 달리 범법 행위는 없고 그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찬양하는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불신자가 보기에도, 기독교인들의 모임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그 신앙을 '찬송하는 무리'라고 첫눈에 보일 정도였던 것입니다.
터툴리안이라는 교부도 당시의 예배 정경을 묘사하면서 말하기를 "물로 손을 씻고 방에 불을 들여놓은 후에 하나님을 찬송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배순서에서 말씀선포가 가장 중심이 되고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찬송 순서의 의미가 약화되거나 망각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준비찬송'이나 '헌금 찬송'이라는 표현들은, 마치 찬송이 예배의 주요 순서라기보다는 다른 순서를 장식하는 곁다리처럼 오해하도록 만들 수 있으므로 그 사용을 조심해야 합니다.
16절 상반절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란 말은 문장 구조상으로 볼 때 "가르치며 권면하고"라는 말에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라는 말에도 역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참된 예배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받은 은혜로 인하여 절로 신령하고 힘찬 찬송으로 화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의 마음 상태는 세상의 노래를 부를 때와 비교할 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 노래들은 노래 부르는 본인의 처지와 감정이 그 노래의 성격을 좌우하게 됩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회고한다든지 실연에 빠진 심정을 묘사한다든지 하는 노래들이 대중의 마음을 끄는 것은, 바로 그런 가사들이 자기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해주기 때문에 그 노래에 공감되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찬송은 그처럼 우리 자신의 처지와 감정이 주체가 되어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역사하심과 그 거룩하신 이름을 송축하고 높이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본문 16절 하반절에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대로입니다.
바로 이것이 찬송과 세속적인 노래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세상 노래는 전적으로 자기를 표현하기 위한 노래이지만, 찬송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노래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구분하지 못할 때, 우리는 찬송도 자신의 감정 위주로 부르게 되는 잘못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의 처량한 심정, 자기의 괴로운 처지를 잘 반영해 주는 찬송이라든지, 아니면 그저 별 깊은 뜻도 없는 가사의 찬송을 그저 흥겨운 박자와 요란스러운 악기의 반주에만 감흥 되어 제 혼자 신나서 부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처럼 부르는 찬송도 팝송 부르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그런 찬송은 결코 참된 예배자의 자세로 이끌어 갈 수는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짜 찬송은 그 심령이 말씀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는 중생체험을 하게 된 성도가, 그 터져 나오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절로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심령으로 드리는 것이 되어야만 마땅합니다.

참된 예배생활의 세 번째 요소는 일상의 경건생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송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에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찬송을 통한 예배도 물론 공적으로뿐 아니라 사적으로도 드려지는 것이지만, 이 세 번째 요소는 특히 '예배당 밖에서의 예배생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라고, 즉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예수님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그 자체가 하나도 빠짐없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예수 이름을 높이며 또한 그 이름에 의지하고 살 때 주님의 능력을 삶 속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고, 자연히 하나님께 영광의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꼭 체험해야 할 너무나도 귀중하고도 필수적인 예배생활입니다.
주일 날, 교회당 안에서, 목사의 사회와 설교 아래 진행되는 것만이 예배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그 자체가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시는 말씀이나,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들이 다 이와 같은 일상생활의 예배를 가르치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집안에서 교육이 잘 된 아이는 밖에 나가서도 행동거지가 똑 바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열심히 한다는데 사회에 나가서는 전혀 "주 예수 이름으로" 전도할 줄 모르고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도 그런 삶의 힘을 주신 "하나님께 아버지께 감사"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교인은, 절대로 교회생활 잘 하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교인의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생활'은 실상 어디까지나 껍데기일 뿐이며 가식에 불과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통하여 제대로 성화되고 있는 신자는 반드시 세상에서의 엿새 동안의 삶을 통하여서도 그 아버지의 아들다운 '거룩한 빛과 맛'을 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처럼 말씀과 찬송과 경건생활을 통하여 공사 간에 항상 예배할 줄 아는 그것이 곧 신자가 '거룩한 택자'가 된 증거입니다.
거룩함을 입는다는 것이, 무슨 거룩하고 멋있게 보이는 예복을 입는다든지 혹은 거룩하고 엄숙해 보이는 의식에 점잖게 말없이 앉아 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배시간을 통하여 말씀이 내 심령 속에 깨달아지고 믿어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찾아와주심이 내 심령 속에 확실하게 체험될 때, 바로 그때야말로 우리가 더없이 거룩해지는 순간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라는 찬송의 첫 절부터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감동이 우리 전 인격을 휩싸게 될 때, 바로 그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황홀한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서 날마다의 생활을 통하여서도 시마다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그분이 지금 내 곁에 함께 계심을 체험하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체험을 하게 됨으로써, 어떤 사람 앞에서나 항상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매사에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건한 삶이 이어질 때,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점점 더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길에 바로 들어서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거룩한 예배생활이 곧 지극히 거룩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성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정말 우리도 이런 거룩함으로 덧입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자신이 남 보기에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더 고귀한 모습으로, 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더 격조 높은 모습으로, 더 멋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누구나 다 은근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런 소원의 해답이 바로 이 '거룩함으로 덧입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이 거룩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최고 수준의 고귀함과 격조 있게, 그리고 남들로부터 가장 흠모 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최상의 단장인 것입니다.

이런 거룩함으로 자신을 가꾸는 성도의 아름다움은 정말이지 세상의 모델이나 미스 코리아 정도로는 결코 비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배생활로 교통하면서 그 거룩함을 덧입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하나님의 고귀하심과 그 하나님의 격조 높으심으로 자신을 꾸미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한 황홀경과도 같은 체험이겠습니까?

옛날에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우리나라의 어느 교회에 집화를 인도하러 왔을 때, 그 교회 교인 어느 분이 경영하는 식당에 초대를 받아 갔습니다.
가보니 말이 식당이지 이것은 옛날 어느 대감이 살았다는 전통 한옥 집을 식당으로 꾸민 것인데, 대문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실내 장식, 그리고 좌석에 이르기까지 저로서는 생전 처음 본, 정말 품위 있고 고급스러운 것들뿐이었습니다.
상에 차려진 음식들도 정말 먹기 아까울 정도로 정갈하고 예쁘고 또 맛있는 것들 일색이었고 음식 시중드는 사람들까지도 도무지 웨이트리스 따위로 부를 수 없을 만큼 귀품 있어 보일 정도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식당은 평소에 저 같은 평민들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라, 정계의 고급 인사나 재계의 유력한 사람들이 와서 정치나 큰 사업을 의논하며 식사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고 상류층, 그야말로 옛날 대감들이 모이는 것과 같은 분위기로 가득 찬 곳에 저 같은 미국 촌닭이, 순전히 그 교회 집회 강사가 된 덕택에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접받은 후에 제가 그 교우님께, "마치 임금님된 것 같은 기분으로 밥을 먹었읍니다."라고 인사했지만, 진짜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정말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마치 임금님이나 된 듯한 자리에서 한 시간 앉아 있는 기분은 문자 그대로 구름에 둥실 떠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이 바로 그와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황홀하고 기분 좋은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앉아 있는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원래는 전혀 거룩하지 못했던, 아니 '거룩'과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영적 최하층 인생이었던 죄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이 지고하게 거룩하신 존재와 잔치상을 나란히 하고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느낌을 대학교 다닐 때에 채플 시간에도 한번 느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국립국악단원들이 우리 학교에 연주해주러 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악'하면 그저 지루하고 무슨 음악인지 알 수 없는 깽깽이 소리라는 인상을 아직 제가 지울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그 단원 중에 리더 쯤 되는 사람이 인사말을 하면서 말하기를 "지금부터 여러분이 듣게 되실 음악들은 옛날에는 임금님들 밖에 듣지 못했던 것들인데 여러분은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서 이처럼 국립국악단원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들려주는 것을 편안히 감상하시게 되었으니 그런 줄 알고 들으시라."고 했습니다.

그 말 들으니까 저도 기분이 좀 달라졌습니다.
다리 쭉 벋고 편하게 앉아서 그 국악 연주를 마치 제가 임금님이나 된 양 하고 들어보았습니다.
정말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장고소리, 가야금 소리, 특히 대금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임금 아닌 사람이 임금만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고 임금 수준의 음악을 듣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보통 감격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경건한 예배생활을 통하여 바로 그런 기분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정계의 높은 인사들과 이야기 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대화를 나눕니다.
이 예배시간에 우리는 바로 천상의 보좌에서 공명되고 있는, 아니 천사들조차 부러워하는 찬송에 우리의 심령이 젖어 드는 감격을 맛보고 있습니다.
아니 평상시에도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시끄럽게 하는 세상에 정신이 팔리지 아니하고 늘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서 내리는 힘을 받고 우리의 입술은 그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비록 몸은 이 세상에 있어도 우리의 영혼과 인격은 하나님과 통하는 수준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런 신전 인격적인 예배자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어야만 우리는 '거룩한 택자'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원래는 고아원에서 자라던 아이가 어떤 양부모에게 선택을 받고 입양된다면 그 아이에게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고아였던, 그러나 이제는 고아가 아니라 어엿한 부모가 생긴 그 아이가 최소한 보여주어야 할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양부모가 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됨으로써, 자기를 양자로 삼아준 그 사랑에 보답하는 이것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며, 사실 이 점에 있어서는 친자식보다도 오히려 양자가 된 자녀가 더욱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떠난 '고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당신의 '백성' 정도로만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아예 '양자'로 입양시켜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늘 아버지를 모시게 된 자녀답게 그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예배생활과 거룩한 경건생활을 통하여, 사람이 사모할 수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수준, 곧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는 '거룩한 택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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