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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 중에 살아갑시다 (렘 3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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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중에 살아갑시다 (렘32:6-15)

이 시간에 “소망 중에 살아갑시다”라는 제목입니다. 이 말씀 드리기 전에 제2차세계대전 때 군목으로 출전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던 맥도날드 목사의 간증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맥도날드 목사가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할 때 그 중에 한 포로병이 라디오를 조립해서 수용소 안에서 몰래 BBC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그 친구가 맥도날드 목사를 깨워 연합군이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은 삽시간에 전 수용소 포로들에게 전해졌고 포로들은 너무 기뻐서 마당으로 나가 얼싸안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던 독일군들은 포로들의 이상한 행동에 긴장되어 총을 겨누었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이후에 수용소 안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얼굴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곧 풀려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독일군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정한 소망 가운데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의 최대의 절망기를 살았던 예레미야를 통해서 살펴 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예레미야 32장을 보면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힌 시대입니다. 왜 갇혔습니까? 참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즉 범죄로 말미암은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시드기야 왕은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니 대항하지 말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에 소망의 메시지를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 네 숙부의 아들 아나멜이 올 것이니 그의 밭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씀대로 조카가 와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은 십칠 세겔을 주고 밭을 샀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개인이 망하고 죽고 잡혀가고 끌려가고 농토는 초토되어 황무지가 되고 성과 집은 헐어져 여우집이 되고 사람이 살지 않을 시대에 밭을 산다는 것 얼마나 이해 못할 일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예레미야의 행동은 정신 나간 행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그가 조국의 멸망을 예언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을 사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알려주실 예표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절망과 장차 망할 장망성에 살지만 빛나는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이 들고 늙고 결국은 세상을 떠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소망 중에 참고 밝게 살며 사람들 보기에 바보스러울 만큼 진실 되고 충성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는 하나님이 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은 세상에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달라요. 그런데 소망 없는 사람들은 세상살이를 슬퍼하고 혹은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쾌락을 따르고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는 막보기를 하려고 하는데 인생은 결코 막보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유리산업의 1인자이셨던 한국유리 창업자인 최태섭 장로 이야기입니다. 최장로님은 얼마나 진실하신지 1951년 1.4후퇴 때 중공군이 개입하여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쟁의 와중에도 은행에 빚을 갚은 분입니다. 은행원조차도 뭘 갚으시려고 그러십니까? 나중에 결과 봐서 갚으라고 했지만 장로님은 신앙양심 따라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 소문이 제주도의 군사령관에게 들어가 사령관은 장로님이 정직한 분인 것을 알고 군부대에 여러 물자들을 납품해 달라고 했고 장로님은 최선을 다해 공급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물량이 많아 고기를 대줄 원양어업을 할 계획을 세우지만 자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행을 찾아갔지만 전쟁 상황에서 어떤 은행이 대출해 주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은행직원이 최장로님을 알아보고 "바로 당신이군요.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몇 시간 전에 빚 갚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은행가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하며 은행장을 소개하여 무담보로 2억을 융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돈으로 원양어업을 하게 되었고 그 후 한국유리를 창업하고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성도는 세상을 살지만 확고한 소망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절망의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사는 법은 무엇일까요?

1.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7절에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했습니다. 율법의 토지법을 보면 토지를 팔 경우 그것을 가장 가까운 근족이 사주어 각 지파에 할당된 토지가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토지법에 의거해 하나멜의 땅을 맨 먼저 살 권리가 예레미야에게 있었습니다. 그 절망 가운데서도 예레미야에게 토지의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므로 그 권리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신부요, 거룩한 성령의 전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요, 기쁨이요, 사랑이요, 생명이요, 의요, 빛이요, 소금이요, 선교사요, 복의 주인공입니다. 이런 특권을 가진 사람이 절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안다면 만입이 있어도 그 은혜를 다 찬송할 수 없을 것이며 날마다 춤을 추어도 부족할 것이며 어떤 일에도 절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서시기 바랍니다.

2. 그 권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10-12절 보면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주고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고 인봉치 아니한 매매증서를 내가 취하여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증서에 인친 증인의 앞과 시위대 뜰에 앉은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증서를 타인이 볼 수 없도록 인봉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매매증서 둘을 만들어 하나는 인봉했지만 하나의 매매증서는 인봉치 않고 개봉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시위대 뜰에서 조인식을 해서 백성들이 모두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바룩이 누굽니까? 예레미야서를 대필한 사람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통해서 매매증서를 갖게 함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또 다시 이 땅에 올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소망 중에 기쁨으로 살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 증거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고후1:21-22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확실한 증거인 성령의 증거를 가져야합니다. 이 증거를 가지면 누가 뭐라고 유혹해도 내 안에 증거가 있으니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기쁨이 있으니 슬프지 않습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으니 겁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둑이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이나 부동산 등기 같은 문서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처럼 마음에 성령의 증거를 가지면 천국의 기쁨의 넘치고 아무리 어려워도 어렵지 않고 힘과 소망이 넘칩니다. 은혜가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칩니다. 그래서 요일5:7-9에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했습니다. 더 이상 나약하지 마시고 성령 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3. 다른 사람들과 이 소망과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14-15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인봉하고 인봉치 않은 매매증서를 취하여 토기에 담아 많은 날 동안 보존케 하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기념 캡슐을 땅에 묻었습니다. 즉 예레미야가 밭을 산 사건이 예표가 되어 장차 나라가 회복될 때 사람들이 아 이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소망이 더욱 풍성하려면 우리의 소망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되지만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누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것이 봉사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주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면 하나님께서는 핍박과 영생을 겸하여 받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행복을 백 배나 더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혼자만 은혜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넘치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풍성한 소망과 즐거움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신령한 사역의 희열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일까지도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처럼 소망의 밭을 삽시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저 영원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스럽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 알고 또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또 이 소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가장 소망 충만한 예레미야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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