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에녹의 간증(히11:5-6)

  • 잡초 잡초
  • 517
  • 0

첨부 1


  에녹은 히브리어로 하녹( 󰗗וֹנ󰕟 )이다. 나실인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헌정된 자’라는 뜻이다. 에녹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삶을 살았다. 본문의 배경은 창5:21-24이다. 창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 족보에는 “○○가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이렇게 끝맺음을 하지만, 에녹만은 예외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에녹은 그 당시 사람들보다, 훨씬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갔다.

  에녹의 승천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저편에 인간이 생활할 천국이 있고, 인간의 영혼이 결코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임을 말해준다. 에녹은 들림 받을 성도들의 모형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장수한다고, 반드시 복 받은 것은 아니다.

  똥을 집어먹을 만큼, 오래 살면 뭐하나? 오래오래 사는 것보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도 없고,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는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삶이 더욱 중요하다.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는, 천국백성이 되시기 바란다.

  에녹은 믿음으로 살았기에, 하나님과 동행했다. 동행은 단순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생활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에녹의 뜻이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면, 에녹도 싫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그도 좋아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다. 우리 인생의 최대 성공은,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데 있다. 기도할 수 없고, 예배할 수 없고, 말씀을 묵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쁘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면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까? 에녹의 간증을 들어보자.

1.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는, 홍수심판이 있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시대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회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에녹은 우리처럼 죄짓고 살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창5:21절을 보면 에녹이 65세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하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다. 에녹은 365세를 살았는데,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65년 간 동행하지 못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지만,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에녹의 생애에 어떤 전환점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 한 사람만 나온다. 그 뜻은 무엇인가? 무트(죽다) + 솰라흐(보내다) = ‘그 아이가 죽으면, 홍수 심판을 보내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에녹을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자. “에녹아! 에녹아! 세상이 정말 악해졌구나! 거룩하고 의로운 나 여호와가, 더 이상 세상의 불의를 용납할 수 없으니, 세상을 심판하겠다. 심판의 징표로 장차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 하라.”

  그래서 말씀과 같이 에녹은 아들을 낳고, ‘므두셀라’라고 지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저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고 했는데’하며, 아이를 쳐다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렸다. 이렇게 에녹의 삶의 변화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각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에녹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보통 사람과 같이,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살았다.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살아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직분이 있어야만 동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민감하게 느끼고 살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온다.

  평생에 우리가 지은 죄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낱낱이 밝혀진다는 사실을 염두하며 살면,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라도, 주님 뜻에 따라 살고자 애쓰게 된다.

  현대인이 심각한 부도덕 속에 빠지는 이유를, 현대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 찾아온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세계적인 대부호가 된 알프레드 노벨이,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호텔에 배달된 신문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신문에는 ‘알프레드 노벨 사망’이란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노벨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 이름을 잘못 기록한 오보 기사였다.

  그러나 노벨은 이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하루종일 호텔에 머물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다. “내가 만약 이대로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세계적인 발명가라는 명예와 엄청난 재물도 보 잘 것 없었다. 생명과는 무관한,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역사의 죄인이라는 생각하게 되었다. 인류의 번영을 위해 만든, 엄청난 능력을 지닌 다이너마이트가, 살상무기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벨은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 기금으로 노벨상을 만들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신문의 오보가, 노벨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 왔다. 자신이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라는 단순한 진리가, 세계최고권위의 상을 만들었다. 에녹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순간부터 달라졌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에녹은 아들의 죽음이, 심판의 시작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 정말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홍수의 심판이 있었나요?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그러면 노아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는 369세가 된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최고로 장수한 자로, 969세까지 살았다. 그런데 (창7:11)에 놀라운 사실이 나타난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이 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 369세였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는, 므두셀라가 969세 되던 해다.

  므두셀라가 죽자 이름의 뜻대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지는 노아의 홍수심판이 시작되었다. 아들을 부를 때마다, 심판의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행했다. 경건에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에녹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계심을 믿고, 심판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얼마 살지 않아서, 쳐다보기도 싫어서 이혼한다. 이토록 부부간에도, 서로를 기쁘게 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나?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 회개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회개한 후, 하나님과 교제하다가, 하늘나라에 간다. 가인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에녹은 아담의 칠세 손이었다(유14). 경건한 셋의 후예였다. 똑같이 아담이 칠세 손으로, 불경건한 가인의 후예가 라멕이다. 그는 창4:23-24에서, 자기 아내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에녹과 똑같은 시대에 살던 라멕은,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뽐내듯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죄악 된 삶, 타락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노아의 홍수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녹은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과 벗하지 않았다.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에녹도 65년 간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지만,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할 수 없다면, 신앙생활은 도저히 할 수 없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는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된다.

  옛날 어떤 왕이 매일 매일, 여러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눈부신 의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뽐냈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든지, 왕은 자신만을 생각했다. 어느 날 시종이,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거울을 찾았으나, 거울은 보이지 않고, 거울이 있던 자리에 난 창문을 통하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지키고 굶주린 모습이었다.

  창백한 여인과 굶주린 아이들, 먹을 것을 찾으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과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왕은 자기의 화려한 의복을 벗어버리고, 평민들이 입는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백성가운데로 나아가, 그들의 소리에 귀에 기울여,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사람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관심을 쏟고 있는 동안은, 그 무엇도 볼 수 없고,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도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3.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는다.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였고, (전4:9)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면, 충성한 만큼 상을 받는다(고전3:8).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살아 계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을 믿고, 찾아가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분인데, 누구에게 상을 주시나?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 진심으로 사모하며, 마음을 다해 열심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 (잠8:17)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이 상이다.

  죄에 대한 용서, 거듭남, 성령, 영생, 복, 긍휼, 평강, 기쁨, 사랑, 하늘나라, 은사…, 그러나 가장 큰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없는 복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복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러한 모든 복이, 모두 다 담겨있다.

  오늘날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체적인 방법 중에 하나는,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하는 일이다.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주일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주일에도 대통령 식탁에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러나 손님 때문에, 주일 성수를 못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왜냐면 대통령은 언제나, 손님들을 교회로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주신다. 어떤 상을 주시나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인정을 받는다(히11:5).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인간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말은, 정말 칭찬 받을 일이다.

  자식이 효도하여 효자 상을 받고,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증거로, 열녀라는 명예를 주기도 한다.

임금님을 위해 목숨을 버린 신하에게 충신이라는 명예를 붙여준다. 에녹에게는 그보다 더 큰 명예가 주어졌다.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이런 영광을 차지했다.

  육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 (마3:17)에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십자가까지 지시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2)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워지는 복을 받았다.

믿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준다. 요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처럼 믿음은 지옥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준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던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렀으니, 그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는 많은 불신자들이 지옥으로 던짐 받게 될 것이나, 우리는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진다.

  살전4:17을 보면, 주님께서 오실 때, 믿는 자들은 공중으로 휴거 된다. 육체적인 죽음을 보지 않고, 홀연히 변화된 몸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주님과 동행하시다가,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홀연히 들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는 상을 받았다. 에녹은 창조 시대에 승천했다. 엘리야는 예언자 시대에 승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시대에 승천하셨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 거한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승천한다.

  험한 세상을 능히 이기기를 원한다면, 죽음을 보지 않기 원한다면, 성령님 안에 거하고, 성령님과 동행해야 한다. 노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 상급으로 대홍수에서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상을 받으시기 바란다.

  결론이다. 예배는 2가지다. 공적 예배와 생활 예배가 있다. 아벨의 제사에서 공적 예배를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에녹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예배를 배울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하나님과 동행 할 때, 기쁨이 있고 안전이 있고 행복이 있다. 세상에서의 삶이 끝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 천국으로 데려 가신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다가, 데려감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