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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리모컨 천국 열쇠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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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주일째 같은 본문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백점짜리 신앙고백으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깨달음이 첫 번째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복음을 세세토록 널리 전하려고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베드로가 받은 세 번째 선물에 대해서 설교하겠습니다. 본문 19 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가 받은 세 번째 선물은 천국 열쇠입니다. 이 구절 때문에 사람들은 천국문 앞에 베드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베드로는 열쇠를 가지고 천국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본문을 자세히 보면 천국 열쇠라고 했지 천국문 열쇠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만약 천국문 열쇠를 받았다면 천국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를 심사하는 권한입니다. 이것은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의 권세와 버금가는 대단한 권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런 막강한 권세를 주셨을리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받은 것은 분명히 천국문 열쇠가 아니라 그냥 천국 열쇠입니다.

열쇠가 있으면 이와 짝이 맞는 자물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열쇠는 땅에 있고 자물통은 하늘에 있습니다. 19 절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오직 땅에서만 매든지 풀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서 조정하는 원격 열쇠란 뜻입니다. 땅에서 잠그면 천국에 있는 자물통이 잠기고, 땅에서 풀면 다시 천국 자물통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리모컨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요즘 나온 자동차들은 거의 리모컨으로 열고 잠급니다. 요즘은 웬만한 기계 스위치들은 거의 리모컨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작동시키면 하늘에서 따라 움직인다는 말씀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리모컨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베드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래도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은 당시에도 가능합니다. 땅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하늘에 그대로 기록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약속하실 때 베드로는 충분히 말뜻을 이해했으리라고 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땅에서 매고 푸는 일을 하면 하늘에서도 같이 반응하겠다는 복입니다. 땅의 일이 하늘과 통한다는 것입니다.

열쇠를 받는 일은 그에 따른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집 곳간의 열쇠를 받으면 그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뜻입니다. 아파트 열쇠를 받았다면 그 아파트 재산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자동차 열쇠를 받았다면 자동차 자체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쇠를 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받은 이 천국 열쇠를 해석하는 의견이 여러 가지입니다. 얼른 생각나는 해석은 축복과 저주권입니다. 베드로가 땅에서 축복하면 하늘에서 이에 맞는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또 땅에서 저주하면 하늘에서 이에 합당한 벌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매고 푼다는 의미가 저주와 축복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복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3 말씀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복과 저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이 아브라함에게 잘하면 하나님이 그를 잘되게 하고, 남이 아브라함에게 못된 짓을 하면 하나님이 못되게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겠다는 보호의 복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축복과 저주의 권세를 받았다면 어찌될까요? 이는 전무후무한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여서 이런 권세를 누린다면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특히 축복은 몰라도 저주권이 남용되면 크게 탈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 외에 이런 권세를 누린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사무엘, 모세, 엘리야 등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약간씩 나타나긴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하여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축복과 저주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권은 아닙니다. 언제나 성령님의 판단과 허락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십시오.

베드로가 받은 천국 열쇠를 축복과 저주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비슷하게 가져다 붙이면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자기 상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본문을 헌금에다 맞춰 해석합니다. 땅에서 헌금을 많이 하면 하늘에 있는 저금통에 그대로 쌓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 장에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땅에는 좀과 동록과 도적이 있어 보관하기에 불편하니 해함이 없는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땅과 하늘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천국열쇠를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억지가 섞인 무리한 해석입니다.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방법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성경 자체가 해석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해석을 하려면 관주를 해야 합니다. 관주란 연관된 성경 구절을 다른 곳에서 찾는 것입니다.

본문도 분명한 해석이 따로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8 절에 같은 본문이 나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 전체를 모아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앞에 천국 열쇠 이야기만 없습니다. 이것은 천국 열쇠가 어떤 권세이든지, 베드로에게만 준 권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천국 열쇠의 권세는 제자들 전체에게 동일하게 주신 권세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 장에서는 이 구절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해석 구절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19 절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것을 찾아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18 절과 19 절을 비교해서 보면 이 두 구절이 병행 구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이 같은 단어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데서 19 절에는 ‘다시’ 라는 단어가 더 있습니다. 이 ‘다시’라는 단어는 앞에 18 절 말씀을 다시 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18 절을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반복되는 단어는 ‘너희’ ‘무엇이든지’ ‘땅에서’ ‘하늘’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리고 ‘매면’ 이란 단어는 ‘합심하여 구하면’이란 단어와 병행됩니다. ‘매일 것이요’는 ‘이루게 하시리라’ 와 병행됩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본문이 해석됩니다. 즉 땅에서 무엇이든지 맨다는 것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매인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신다 즉 기도 응답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서 다음 20 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지난 주일에 교회에 대해서 정의를 했습니다. 교회란 두 세 사람이 이상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20 절을 이에 맞추면 예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공동체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말씀하기 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바로 합심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니다. 기도하고 맨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16b>

맨다는 개념은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직접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습니다.

프리칭이란 월간 잡지가 있습니다. 이 잡지는 명 설교가들의 설교를 골라서 주로 소개합니다. 한번은 잡지 편집자가 인터넷에 제 설교를 보고 전화를 했습니다. 제 설교를 잡지에 소개하고 싶답니다. 저는 한 편 뿌듯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사양했지만 거듭 요청하기에 허락하고 마태복음 18 장에 있는 이 본문으로 설교한 원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잡지에 실린 설교문을 본 서울에 있는 한 장로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얼마 전에 자기 교회 목사님이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 해석이 틀린 것 아니냐며 따졌습니다. 그 장로님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저에게 잘못 해석했다는 시인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참 난처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이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그 구절을 해석해 줄 때는 말씀에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본문은 너무나 명백하게 땅에서 매는 것이 합심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땅에서 푸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용서하는 것을 뜻합니다. 푸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하려면 역시 그 다음 구절을 봐야 합니다. 18:21-22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매는 것이 합심 기도라는 것을 밝히고, 자연스럽게 용서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부터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비유 역시 용서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 장에서 천국 열쇠를 약속 받으며 말씀을 받은 베드로는 땅에서 푼다는 것이 용서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용서할 때는 몇 번이나 하는 것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 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용서란 끝없이 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입니다.

천국 열쇠를 가진 제자가 용서할 때는 세상 기준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과 같은 원리로 끝없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푸는 것을 용서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에 병이 납니다. 울화병, 우울증에 걸립니다. 이 마음의 병은 이내 육체에도 미쳐 실제 치명적인 속병이 생깁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치료약은 아직 없습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아직 없습니다.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겁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치료약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처방 밖에는 없습니다. 바로 용서라는 약입니다. 용서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약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 용서를 몸소 보여주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을 죽음에 넘겨주시면서 까지 우리 죄를 용서하길 원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용서의 사건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용서의 은혜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 용서의 감격이 벅차오르도록 느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 십자가의 용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용서를 받았은 즉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죽어 마땅한 하나님을 거역한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 형제와 이웃이 내게 범한 죄는 그에 비하면 작습니다. 큰 죄를 탕감 받은 자가 작은 죄를 용서 못합니까? 마땅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할 이웃의 죄는 내가 용서받은 죄에 비하면 너무 작은 것입니다.

이웃의 소행이 아무리 괘심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품고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용서’ 이 두 단어는 쌍둥이입니다. 같이 붙어 다니기에 너무 잘 어울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기도하면서 저를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저가 용서를 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고 감격하며 나아올 때 우리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때 저를 하나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저와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저는 사랑스러운 전도 대상자가 됩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모두 21 명을 살인했습니다. 잡히고 나서 유영철은 5 명을 더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유영철은 체포 후에도 끝까지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아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유영철에서 자기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4 대 독자 아들까지 잃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64 세 고정원씨입니다. 고정원씨는 가장으로써 가족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이웃과 달리 유난히 낮은 담장 때문에 살인마를 불렀다고 자책했습니다. 그는 유영철이 붙잡히자 사랑하는 가족들 곁으로 가려고 죽기를 결심하고 한강대교까지 갔습니다. 그러다 이왕 죽는 것 유영철을 용서하고 죽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유영철을 용서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신이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고정원씨는 유영철을 위해 사형만은 말아달라며 탄원서를 썼습니다. 명절에는 영치금을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사형수 유영철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유영철은 이 편지에서 “사회에 대한 앙갚음이 목적이었던 저의 바보 같은 분노에 희생양이 되었던 할머님, 사모님, 그리고 저와 동갑내기였던 아드님의 모습이 요즘 들어 부쩍 꿈속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감히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저의 미래는 없지만 이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 뉘우치겠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용서가 유영철의 강퍅한 마음을 녹였습니다.

고정원 씨에게는 아직 두 딸이 있습니다. 그 딸들은 철천지원수 유영철을 용서한 아버지를 원망한다고 합니다. 용서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니 위대합니다. 고정원 씨는 천주교인입니다. 그는 신앙심으로 그를 용서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영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형 폐지 운동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기도와 용서 이 두 가지를 위해서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땅에 기도와 용서가 이루어지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도와 용서가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시면서 합심 기도와 용서가 확대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모여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늘에서 철커덕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철커덕 풀어주십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받은 천국 열쇠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합심기도는 두 사람 이상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베드로 혼자 기도하면 합심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받은 천국 열쇠는 교회 공동체의 것입니다. 교회의 기도는 하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합심 기도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모여 합심 기도하는 곳에 교회의 영광이, 하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용서의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1-23>

우리는 이 용서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 권세를 놔두지 말고 그대로 사용하십시오. 용서는 권세이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냥 찾아가서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그대를 용서한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에 용서할 수밖에 없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모든 것이 풀리기 때문에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가 유일한 해결 방법이기 때문에 그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의 용기를 내려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아니면 우리는 용서의 용기를 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원한으로 얽힌 이 세상을 용서로 푸는 능력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을 움직이는 리모컨 열쇠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복된 권세입니까? 기도와 용서의 권능으로 이 땅의 어두움을 빛으로 바꿔나가십시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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