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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갈 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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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 보면 여주인공인 마리아가 트랩 대령과 우여곡절의 끝에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드디어 확인하게 되는 날 밤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인물로 보나 사회적 지위나 재산 정도로 보나 자기로서는 도무지 상대도 될 수 없어만 보였던 그 멋진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지금 바로 앞에서 고백하고 있으니, 마리아는 그 현실이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할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어쩌면 나한테 이런 복 바가지가 터졌을까?'하고, 터질 듯이 떨리는 가슴으로 마리아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일이 그냥 생길 리는 없어요. 그러니 틀림없이 내가 어렸을 때 무언가 착한 일을 했었나 봐요.(Perhaps I had wicked childhood, perhaps I had miserable youth. But someday in my youth or childhood I must've done something good. Nothing comes from nothing, nothing ever could. So someday in my youth or childhood I must've done something good.)"라는 노래입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이런 일이 절대로 우연히 일어날 리는 없고, 분명히 옛날 어느 땐가 자기가 무척이나 착한 일을 했었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지금 자기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마리아는 노래했던 것입니다.

이처럼'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윤리입니다.
모든 현상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심은 끝내'선이라는 원인이 복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일종의 윤리적 인과율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과율은 세상의 도덕계의 중심부에 흐르는 주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 종교계에서도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최고의 교리로 숭상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선한 사람은 복을 받게 된다.'는 보상의 원리가 이 땅에 사람 사는 골목골목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가장 보편적인 윤리인 동시에 공통적인 신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세속적 종교의 도도한 강물 한 가운데 유독 우뚝 솟아 그 조류에 거슬리고 있는 바위와 같은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이른 바'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의롭다 함" 혹은 "의롭게 됨"이라고 번역되어 세 번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만한 그 무슨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하여서 그저 의롭다고 인정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선언하고 있는'칭의'의 정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나타나는 아주 독특한 복음입니다.
모든 다른 종교에서는, 아니 모든 무종교주의자들에게 있어서도'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복을 받고 선한 일을 한 까닭에 의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니 그 어떤 선한 일을 한 보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데, 유독 기독교만이'사람은 선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견 이 세상의 상식이야말로 지극히 알기 쉽고 합리적인 윤리 도덕의 절대적 법칙으로 보이고, 반면에 기독교의'이신칭의'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교리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 내면의 진리를 바로 깨닫기만 하면 이'이신칭의'의 교리야말로 세상의 상선벌악의 상식적인 윤리와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을 진짜 합리성과 충만한 감동력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제489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그 종교개혁자들이'이신칭의'의 교리를 통하여 되찾아내었던 깊은 진리와 충만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이신칭의(履信稱義)'만이 죄인으로 하여금 죄 사함의 확신과 감격을 충만하게 해주는 교리입니다.

본문 15절과 16절에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라는 주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물론 갈라디아교회 교인들과 모든 성도들을 뜻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우선 바울 자신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가 주는 깊은 은혜를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체험한 사람이 바로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여기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전의 바울 같은 골수 유대주의자들의 입버릇 같은 표현인데, 바울은 여기서 이것을 자조하는 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기독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율법의 행위" 즉 율법 준수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며 남에게 강요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도가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그 누구보다도 율법의 열렬한 옹호자이며 준행자였던 바울 자신이 잘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원래 이방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유대인이라고 자랑하고 떠들지만 그 의라는 것이 우리 자신의 완벽한 행위에서 날 수는 없다는 것은 우선 나도 잘 아는 사실이고 우리 모두 다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도 "주의 목전에서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고 증거하고 있는 대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충족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 능력의 한계를 훨씬 초월하는 일이며,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이 세상에는 단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상식적으로 보이던'이행득구'의 교리는 사실 이처럼 필연적이고도 절망적인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런 절망을 뚫고 일어설 수 있는 실로 은혜로운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충족시킬 수 없었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대신 충족시켜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야말로 율법이 명하는 바를 당신의 생을 통하여 완전히 지키셨던 유일한 분이셨고 또한 그 율법의 정죄가 요구하는 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저주선고를 십자가를 통하여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것은 오직 율법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죄의 고백과 구원 얻기 위한 모든 근거와 소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찾는 믿음, 이것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믿음을 통한 칭의'의 진리를 16절의 말씀은 "아는고로... 믿나니... 얻으려 함이라... 없느니라"라는 반복 강조를 통하여, 마틴 루터의 유명한 표현 그대로, "우리의 머릿속에 두드려 박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준수를 통하여 자기 의를 이루어 보려고 하다가 쓰디쓴 절망감을 맛보았던 바울은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함으로써 그 모든 고민과 무기력을 일순에 해결 받는 복음의 단 맛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행으로 공로를 쌓고 선행으로 의를 세우고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무서운 현혹이며 엄청만 기만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의 입술과 사람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 왔을 뿐 이 세상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실제로 완성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순전한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파괴시키며 살아왔는지는 사람이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돌이켜보면 그 누구라도 당장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정말 구원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하게 살았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그 누가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교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이행득구'를 믿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자니 절로 교만이 되어버리고 그렇다고 겸손을 유지하자니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기 선으로 의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상식처럼 여기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논리요 어이없는 교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틴 루터가 바로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고민했던 천주교 사제였습니다.
그는 다른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도하고 고행하고 선행의 공로를 쌓으려고 애를 썼던, 당대의 제일 모범적인 사제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만 남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자신의 불가항력적인 악한 본성 때문에 더욱 깊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깨닫게 되자, 자신을 그처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절망감이 한 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바로'구원의 확신,'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과 감격이 터질 듯이 넘치게 되는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복음이 복음된' 것입니다.
도무지 스스로는 어찌 일어날 수 없어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예수님께서'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소식을 주셨으니 이야말로 정말'기쁜 소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있어야만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죄사함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렇게 절망적이었다가 극적인 소망을 붙들게 되었으니 실로 감격이 넘치는 중생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로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상식이요 일견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절망선고나 다름없는'이행득구'라는 말에 절대로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결코 스스로는 이길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과 악한 본성으로 인하여 끝없는 절망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오직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내던지고 맡겨놓고서 그 주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믿음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음으로써, 복음의 정수, 그 단 맛과 그 기쁨을 꼭 맛보고 느낄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이신칭의'만이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온전히 돌리게 해주는 진리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에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거했습니다.

분명히 중생 받은 성도도 이 땅에 살 동안 완벽하게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고 부분적으로 범죄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비판자들은 바로 그것을 두고 이신칭의의 교리가 내포하고 있는 딜레마라고 공박했습니다.
"보아라. 예수 믿고 의롭게 되었다는 사람이 저렇게 죄를 짓고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이냐? 예수의 공로란 것이 그처럼 효력이 약한 것 아니냐?"라고 함부로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무분별한 비판에 대하여 크게 분개한 어조로 단호히 반박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즉'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의롭게 된 후에도 나는 나의 연약을 인하여 죄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범법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일 뿐인데 감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장난하지 말아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제 딴에는 칭의교리의 허점을 논리적으로 비판한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까지 들먹였지만, 바울은'그 어떤 경우에도 죄와 상관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그것만 생각해도 그따위 질문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칭의의 은총을 체험한 성도만이 끝까지 자기 죄에 대하여서는 자기가 책임을 지며 티끌만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지 않으려고 이처럼 애를 쓸 줄 알게 됩니다.

그 대신에, 의롭다 함을 입은 성도는 자신이 누리는 은혜로운 삶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본문 19절 이하 21절에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비록 부분적인 연약에 빠질 때도 없지는 않지만 일단 칭의를 입은 성도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변화를 입게 됩니다.
의롭게 됨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의 처지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리고 그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바울 자신의 노력은 그에게 오직 "율법으로 말미암은" 죽음의 선고만 가져다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처럼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범죄자로만 남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이르게 되었으니 바울은 다시는 그쪽으로 돌아설 마음이 꿈에도 없었습니다.
즉 "율법을 향하여" 죽어버린 자가 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쪽으로만 나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생의 본능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이룰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애를 써도 도무지 풀 길 없던 죄의 문제를, 의롭게 되는 과제를 그처럼 간단히 해결해 주는 십자가를 알게 되자, 그는 바로 그 십자가에 자기의 과거를 함께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고나자, 바울은 이제 자기 생명을 주장하는 존재가 자신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바로 자기의 생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임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비록 여전히 때로 죄를 짓기는 하지만 이제는'죄짓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그 모든 옛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된 자신을 볼 때마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된 때문이라고, 모든 공을 오직 그리스도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자기 공로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던 율법주의자들은 결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죄지었을 때에 책임을 스스로 느끼는 면에서는 바울과 같을지 몰라도 자기가 거룩하고 의로운 새 생활하게 되었을 때 그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점에 있어서는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말이야 예수님께 감사한다고 하겠지만, 자기가 이만큼 의롭게 된 것이 전적으로 자기의 노력 때문이라는 교리를 확실히 믿고 있으니 그처럼 믿는 만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깎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사실에 있어서는 깎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지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짓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헛되이 죽으신"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근본이 은혜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을 전혀 필요 없었던 헛수고로 몰아버리는 것이니 이야말로 실로 중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성경의 확실한 진리를 두고 오늘날에도 꼭 같은 비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이신칭의의 교리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나쁜 사람도 그냥 다 의롭다고 인정해주면 사람이 무엇 하러 애써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그 교리는 사람의 도덕적인 책임의식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제법 날카로운 비판 같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한 수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는 진실한 믿음으로 정말 의롭게 된 자들의 심령 속에는 이미'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면서' 본인의 의식이나 의지를 넘어서서 주도하게 되어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니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은 진짜 칭의를 입지 못한 자들이 그저 얄팍한 이론적으로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 참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의 신앙생활에서 결코 실존할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논리 속에는 사람이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고 할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이 점에 가서는 양자의 차이는 극과 극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면 될수록 그 의를 스스로 이룬 당사자에게 꼭 같이 비례해서 그만큼의 영광이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종교인들이 공감하고 있는'이행득구'의 교리는 실상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엄청난 죄악에 이르고 마는 것을 똑 바로 깨닫고, 아무 공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만 보시고도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내가 무슨 선을 행해야 하는가?'만 가르칩니다.
하지만 기독교만이'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먼저 믿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사람이'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라는 말씀만 성경에 뚜렷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무력에 절망하던 죄인에게 기쁜 소식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 받으시기 위하여 정하시고 이루신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마틴 루터는 바로 이같은 감동과 진리를 체험한 까닭에 이'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리켜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기독교리의 으뜸 되는 조항이며 바로 여기에 신앙심에 관한 모든 지혜가 총망라되어 있다... 만일 칭의의 교리를 놓치면 기독교의 모든 참된 교리는 상실될 것이다."라고까지 선언했던 것이며,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성'과'삼위일체론'과 맞먹을 만큼 중대한 진리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 돌릴 수 있게 만드는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실로 이행득구 따위의 교리로서는 상대도 될 수 없는, 정말 고귀하기 짝이 없는 진리입니다.

제가 지난 봄인가 언젠가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에서 무슨'명설교'라는 시간에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채널을 돌린 순간 그 분께서는 마리아 테레사 수녀를 한참 칭찬하던 중이었습니다.
무슨'테레사 효과(effect)'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마리아 테레사 수녀처럼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을 보게 되면 자기도 그렇게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게 되는 효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는 그 마리아 테레사만큼 착하게 살지 못해서 부끄럽다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더 이상 듣지도 못하고 그냥 텔레비전을 꺼버렸습니다.
기독교 목사가 수녀처럼 선하게 살지 못해서 부끄럽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부끄러워한다면 예수님 보이신 본대로 살지 못해서 부끄러울 뿐이요, 우리가 선행을 한다면'십자가 효과'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이지, 어떻게 테레사가 기독신자의 선행의 기준이요 모범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또 뭐 사실 선행 그 자체만 가지고 따진다손 치더라도 자기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고 평생을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사셨던'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 적어도 테레사 수녀보다는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강단에서 수녀를 그처럼 칭찬할 정도이면 아마도 그 목사님은 천주교를 이단으로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것이야 본인 신앙양심으로 마음대로 판단할 자유가 있으니까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도 장로교회를 세웠으니 장로교에서 안수를 받으셨을 것이고, 그때 분명히 장로교의 헌법과 신조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따르겠다고 서약도 하셨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처럼 장로교가 잘못된 것이 많고 천주교에서 본받아야 될 정도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신부가 되시든지 아니면 최소한'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 그 본인께서 부끄럽게 여기고 계실 그 간판만큼은 무슨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달고 목회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천주교의 이단성은'이행득구' 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를 제4위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예수님 대신에 중보자로 모시는 것, 신구약 66권에다가 위경을 첨가한 것, 교황무오설, 적어도 수천 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을 종교재판을 통하여 고문하고 죽인 일 등등, 그 명백한 이단성은 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기독교계에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외치는 목사들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오히려 천주교와 기독교가 같은 것처럼 가르치고 둘이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이'종교개혁기념주일'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지켜지고 있을지 실로 통탄스럽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종교란 사람의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사람 스스로의 양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원래부터 엄청난 균열이 존재해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사람은 절망적으로 악하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자는 자연히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랴?"(욥25:4)라는 고뇌의 외침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진짜 절망은 선을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 알고도 행치 못하는 무능력에서도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롬10:2, 3) 실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를 세우려 하다가 실패하여 절망할 필요도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의가 무엇인지 깨닫기만 하고 그것만 복종하면 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의는'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주님께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의, 바로 이 의를 통하여 참된 의로움을 얻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영광을 주님께 돌릴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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