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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과 구원 (창 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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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4-21
심판과 구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아주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동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해봐야 두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은 남자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 책임은 그곳을 잘 다스리고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있는 동물들을 잘 돌보아주고 거기에 있는 땅을 경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 작은 동산은 그냥 동산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고, 이 작은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의와 정의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청지기로서 그 나라를 맡아서 열심히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는 법이 있었고,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였기에 하나님의 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두 그루의 나무로 표현하셨습니다.
  창 2:9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약속을 새겨놓으신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최초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이 나무와 열매를 따먹는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의도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창 2:16절,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성도여러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자체에 무슨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명나무처럼 이것도 평범한 나무였습니다. 그냥 보기에 좋고 먹음직한 열매를 맺는 나무였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무를 통하여 우리 인간 마음속에 있는 의도를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느냐 거역하기를 원하느냐 하는 그 의도를 나무 열매를 따먹는 행위를 통해서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처음에 이 작은 나라의 청지기로 만족했습니다.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교만과 욕심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이 나라에서 몰아내고, 이 나라를 아담과 하와의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은 의도적인 반역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따먹은 것이 아닙니다.
  호기심으로 따먹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 나라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속에 있는 악한 생각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목숨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교제가 영원히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창 3:6-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는 드디어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에 아주 심한 상처와 손상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불러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아주 무섭고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멋진 가죽옷을 하나 만들어 남자와 여자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가죽옷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가죽옷은 ‘나 하나님은 죄는 분명히 미워하고 진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 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제목을 <심판과 구원>이라고 잡았습니다.

  Ⅰ. 첫 번째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을 분명히 미워하고 심판하십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당장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 2: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라는 뜻은 ‘죽고 또 죽으리라’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즉각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인간이 살기는 하겠지만 그 삶에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선고하신 내용은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고, 피부에 와 닿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출발해서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며 언젠가는 그들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가져온 심판을 보통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영광된 교제를 빼앗아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망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살아있는 교제가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망이며, 죄가 가져온 무서운 결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는 실제적으로 육체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사람은 다 죽습니다. 죽음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요 단순한 이별도 아닙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또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질병과 사고와 재앙과 기근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고달플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많은 고통들은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고통이 죄에서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병든 것이 문제지요. 식구가 병든 것이 문제이고, 집안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 문제이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초비상이 걸립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악화되었다고 해서 직장에서 쫓겨납니까? 무엇이 달라집니까? 그러니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이 없으면 두려워합니다. 몸에 병이 나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를 우리의 실생활과 연결시켜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항상 육체적인 조건에서부터 문제를 생각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보다는 육체적으로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는 것을 훨씬 더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몸의 고통에 연결시킴으로써 결국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신앙과 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과, 우리 생활에 이 많은 문제를 가져온 것은 바로 죄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려면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죄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결국 우리의 삶이 달라지고 풍성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Ⅱ. 두 번째로 본문은 범죄한 이들이 받은 고통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범죄한 이들이 받은 고통은 무엇입니까?
  이들이 받은 심판은 생활 속에 고통이었습니다.
  범죄한 인간들을 찾아온 것은 즉각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속 살 수 있는 여지를 주셨습니다.

  A. 하나님께서 범죄한 여자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내리신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너는 내 말을 어겼기 때문에 당장 죽어야 한다” 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놀랍게도 여자는 계속 살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계속 살면서 아기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 제일 중대한 문제는 바로 이 해산하는 고통입니다.
  남자들에게는 현실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여자들에게는 현실에 확 와 닿는 이야기입니다.
  제 아내가 첫 아이를 낳고 간호사로부터 딸입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네게도 아이를 낳는 고통이 있겠구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인간이 당하는 고통 중에서 죽는 것 외에 가장 심한,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이 해산의 고통일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이 과정에 엄청난 고통을 얹어 주심으로써 인간이 죄에서 태어난다는 것과 인간의 본성이 죄로 오염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자식을 낳는 아픔과 잉태하고 해산하는 아픔과 키울 때의 아픔은 여자의 피부에 생생하게 와 닿는 고통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자에게 “너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고 남자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이것 또한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고통입니다.
 
  남자를 다스리고 싶은데 그렇게 만만한 남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만만한줄 알고 결혼했는데 전부 ‘남자 값’을 합니다.

  큰 고통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B.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도 고통을 주셨습니다.

  본문 17절-19절을 보십시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내리신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도 계속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도 사형집행의 유예였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기간은 단지 사형을 연기해 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죽도록 땀을 흘려서 먹고 살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삶이 자유롭게 주어진 삶이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삶이며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남자의 이마에는 쉴 뜸 없이 땀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런 고통을 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진심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졌을 때가 아닙니까?

  그럴 때 꼭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에 죄의 흔적인 고통을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Ⅲ. 그러나 이런 무서운 진노의 심판 가운데 아주 희망찬 이야기가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진노의 심판 가운데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주는 희망찬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런 고통 속에 가두어 두신 이유는, 그 고통 가운데서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야 우리의 고통에 종지부가 찍히고, 우리의 노예 생활이 끝나며, 사망이 생명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리신 선고는 죽음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죽음의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생명>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하와’ 라고 짓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이 ‘생명’ 이란 의미의 이름을 자기 아내에게 지어 주었을까요? 더구나 아담은 자기 배필을 일찍이 “여자”라고 불렀는데, 왜 ‘생명’ 이란 뜻을 가진 ‘하와’라는 이름을 지었을까요?

  그 해답을 본문 1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15절에서 뱀을 심판하시면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은 이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에게 자기들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담이 만약 이 은혜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심판의 선고에만 마음이 묶였다면 자기 아내를 “모든 산자의 어미”가 아닌 “모든 죽은 자의 어미”라고 불렀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범죄하여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났고 땀을 흘려야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지만 이 여자 안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의 약속이 있으며, 우리는 이 여자가 낳을 후손을 통해서 구원받을 것이다’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 여인의 후손을 통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구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아주 소중한 선물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범죄한 인간들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죽옷은 짐승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지 않고 가죽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채로 가죽만 벗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서 이미 한 짐승이 죽었습니다.
►가죽옷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가죽옷을 손수 장만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입혀 주셨습니다.

►가죽옷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가죽옷은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죽의 임자를 죽이시고 그 가죽옷을 손수 지어 아담과 하와를 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일은 매우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보살핌입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지어 아담과 하와를 입히신 가죽옷은,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실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은혜이며, 대속의 사랑이며,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가죽옷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의 가죽옷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옷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에는 값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죽옷의 선물을 장만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에게 고통을 남겨둠으로, 그 고통을 통해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신앙과 생활을 분리하지 마십시오. 신앙이 곧 생활입니다.
  나의 믿음이 바로 내 생활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 먹고 살기 위해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은 우리 본성이 죄로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여인의 후손을 통해 우리가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의 답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가죽옷은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며, 구원은 은혜요 구원의 약속입니다.
 
  성도여러분!
  가죽옷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를 내쫓으셨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을 이 가죽옷을 통해 약속하고 계십니다.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삶은 삶이 아니고 죽음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그가 주시는 의의 옷을 입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사망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사망은 영원히 끝나고 가치 있는 삶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사십시오. 말씀으로 사는 자는 절대로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이것이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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