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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속에 우리가 보아야 할 환상 (행 1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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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가을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때로는 낮에 콧등에 송글 송글한 땀이 맺히기도 하지만, 가을은 이미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어 발끝까지 와 닿은 것 같습니다.
어제는 점심식사 후에 제 집무실에 들어오려고 사거리에서 신호를 대기하던 중에 방향을 틀어서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들어왔습니다.
공원 안에는 제법하게 물든 나뭇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꽤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날들이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자연보다는 아름다울 수 없겠지만, 그래도 자연을 닮아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새 우리 나이만 부쩍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늘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고 또 그래야만 살 수 있고 그렇게 가고 또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무언가 달려갈 곳이 있고 달려갈 만한 위치에 있는 삶은 행복한 것입니다. 잃을 것이 있어서 초조한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것이기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잃을까봐 애쓰는 사람도 따라서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편안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잃어버려도 우리는 편안해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삶은 순간인데 그 짧은 순간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고민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냥 살다 나뭇잎처럼 시들면 떨어지는 것이 우리 삶인데, 이리저리 마음 쓰고 마음 아파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인 것 같습니다.
삶의 평안이라는 것은 집착에서의 해방이며, 결국 소유에서의 해방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고 있고 또 살아가야 하니 이러 저러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씁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좋고 유유자적한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하여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이러 저러한 이유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어떠한 결과가 주어질 때 언제든지 불만 한다면 우리 삶은 매우 어리석은 삶이 될 것입니다. 삶의 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형통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형통치 못함이라는 것이 언제나 우리의 불행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길어서 읽지 못한 1-5절의 내용을 보면,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디모데를 동역자 삼아 그의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계속해서 소아시아 지역을 전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인지 기록은 되지 않았으나, 성령의 제지함을 받아서 소아시아 지방을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방향을 바꾸어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지방을 거쳐서 비두니아 지역으로 북상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것마저도 제지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자, 사도바울은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드로아에 이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이 길과 저 길 다 막힐 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사도바울에게 마게도니아인 한사람이 나타나 손짓하며 ‘이리와 우리를 도우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니아는 요즘의 ‘유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유럽을 향하여 그의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배를 타고 첫 번째 도착한 곳이 빌립보 도성이었고 거기서 자줏빛 명주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가정이 변화되어 그 가정이 가정교회가 되고, 마침내 유럽의 최초의 교회요, 복음의 포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유럽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전파되고, 그 물결이 미주 대륙을 건너온 세계 땅 끝까지,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이 한국 땅까지 와서 전해지고, 또 앞으로도 전해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꿈과 계획이 막힘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뜻이 그 길을 어디로 인도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새로운 환상을 보았고, 환상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정하였고, 마침내 그 가운데 자신도 알지 못하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내 앞길이 형통해서야만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만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 길을 막기도 하시고, 때로는 어렵게도 하시며 예측 못할 아픔을 주시기도 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큰 위대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역사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원대한 것이라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되는 것을 봅니다.

결국 우리는 이와 같은 모든 삶의 전체 상황을 볼 때 ‘우리 삶에 있어서 지금 내가 보는 단편적인 시야로써 어떤 것이 내게 더 유익하다 덜 유익하다 판정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유익의 길이고, 때로는 길 막혀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몰려가나 그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의 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이제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잠시 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길을 막으심으로 그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를 위한 우리의 삶엔 때로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일을 함에도 어려운 일이 생기고 일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항상 우리 앞에 형통함만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비록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삶에 어려움이 없기를 소원하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은 정확히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 믿음의 백성들의 길은 하나님께서 그 앞에 있는 모든 어려움을 다 면케하신 백성들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게 하셨으나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들은 사방의 우겨쌈을 당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자처하였고, 때로는 고난을 받으나 그것을 면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담대히 고난의 바다에 뛰어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고 고난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 고쳐주셨고, 배고픈 사람들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픈 사람들 위로하셨고, 슬픈 사람들 눈물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주셨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받은 대가는 조롱과 침 뱉음과 모욕과 십자가에 못 박는 고통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을 당하셨으면서도 그 일을 순순히 받아들여 마침내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는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약대 가죽을 가지고 이와 같이 옷을 입고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려움 속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와 같은 선지자였지만, 그는 헤롯에게 목을 베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중의 하나로, 복음에 해박했으며 곳곳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돌로 맞아 순교하는 장면을 겪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마음에 너무 슬픈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산의 위험,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갖은 고난을 다 당하고, 이제 내게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 가운데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어 고난의 아픈 상흔들을 갖고 있으니 너희는 이제는 이와 같은 당할 만큼 당한 고통을 받은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이제는 나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말라‘ 고 애절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은 정도라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 상하고, 몸도 상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쓰라린 일들을 겪기도 합니다. 옳은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이유를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곰곰 생각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제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에 도착하여 빌립보 성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귀신들린 여종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줍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켜 감옥에서 나오게 하시고 오히려 간수장의 가정을 구원케 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지고 사자 굴에 던져짐을 당하지만, 오히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해주시는 역사를 입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통을 겪지만, 고통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기다리고 또 기다릴 때도 있어야 합니다. 이길 저길 막혀 모든 길이 막혔다고 좌절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모든 길이 막혀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정확한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좀 오래된 일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교회가 이제 16년째 됐습니다. 이제 15주년을 지나서 16년째 사역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설정한 20년의 기본기간을 이제 5년 정도 남기고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개척되어서 1년 정도 되니 장년들이 예배드릴 때 한 430명쯤 예배를 드린 것 같아요. 그런데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주 좁았습니다. 한 30여 평 정도 넘으니까요. 그저 조그만 교실 한 칸 이었었죠. 그런데 거기서 1부, 2부, 3부, 4부로 드리고요, 그다음에 나중에는 그 조그만 교실에서 장년만 670명까지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주일날 주일학교 아이들 100명, 중고등부 아이들 100명, 또 저녁예배 100명이 보게 되니까, 그 교실 한 칸에서 주일날 1000명이 예배를 드린 것 같아요. 요즘 우리가 이렇게 비좁지만 그래도 지금은 한결 전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아! 그런데요, 자리가 좁아지니까요, 1년 됐지만 집사님들이 교회를 위해서 수고해보자해서 위원회를 구성해서 이제 교회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조금 더 넓은 곳으로 확보해보자고 해서 애들을 썼습니다. 매주 오면 제게 “목사님, 이번 주에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기도해주십시오.” 그런데 다음 주에 와서는 “목사님, 면목이 없습니다.” 늘 그래요. 그러면 저는 그분들 위로하느라고 또 한참 걸리고, 또 매주 이와 같은 일을 반복을 했습니다. 난감해 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이 주변에 그 당시만 해도 건물도 별로 없었고, 또 건물이 좀 있다고 해도 장소도 합당치 않고, 또 저희가 가지고 있는 여건과 모든 상황이 그렇게 딱 맞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결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래저래 약간의 시간이 흘러가니까 그 다음에 참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서 이제 방법이 없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예배당 부지를 저희보고 매입을 하라고 얘기했어요. 종교부지인데 저희보고 매입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말이 그렇지 이제 개척해서 1년 정도 밖에 안 된 교회가 무슨 부지를 매입해서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말이 안 되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그러니까 할 수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저희가 구입을 하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어요. 제가 생각 해 보니까 아마 그런 일이 없었으면, 이길 저길 다 막히지 않았으면, 이 부지가 있어도 이렇게 계약을 하리라 생각조차 못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길이 없으니까 결국은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부지는 토지개발공사에서 분양을 한 건데 저희가 이제 다른 분을 통해서 이렇게 매입을 했기 때문에 거기 든 비용은 드리고, 그리고 대금을 미룰 수가 있었어요. ‘저희가 기간을 많이 미뤘다가 나중에 다 완결을 하고 그때 교회에서 사정이 되면 그때 지어야겠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분이 시멘트 관계된 일을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 땅을 다 매입하는 일을 완결하면 그 회사에서 시멘트를 다 무료로 줄 테니까, 그리고 슬레트 같은 것도 다 줄 테니까, 예배당을 그냥 지으면 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괜챦죠? 그래서 돈을 빌려서 땅값을 다 치뤘어요. 그로부터 제가 지금도 그 그림이 아직도 선명해요 하얀 블럭으로 한 위에다 슬레트에, 진홍색으로 칠을 한 슬레트로 한 걸 조감도로 그려왔더라구요. 그래서 건축을 허가 내는 데에 냈더니 뭐라고 얘기하냐면, 저희는 그리고 많이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답이 왔는데 뭐라고 얘기하냐면 ‘이런 조악한 건물은 분당에는 짓지 못한다‘ 이렇게 왔습니다. 분당은 미관지구이기 때문에 그런 건물은 지을 수가 없대요. 아, 그러니까 얼마나 낙심입니까,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무슨 1년 된 개척교회에서 무슨 교회를 짓습니까, 그래서 대강 이 지역에서 어디 돈 안 드는데 찾아서 설계도를 하나 그렸어요. 그래서 돈이 아주 안 드는 설계도를 하나 그리고 건축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서 냈더니, 두 번째는 정말 온 성도들이 많이 기도했습니다. 아, 그랬더니 결과가 나왔어요. ’이런 정도의 조악한 건물은 역시 안 됩니다.‘ 참 난감해요. 도대체 기도한건 뭐고 어떻게 된 건가?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다음엔 돈도 많이 내고 그 다음에 짓는데도 돈도 많이 드는 건물을 짓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상하게 과정을 거쳐서 예배당을 짓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예배당 지을 마음도 없었는데 부지도 할 수 없어서 선택의 기회가 없어서 그렇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1단계, 2단계, 3단계 오니까 가는 것마다 길이 막혀지는 게 결과적으로는 예배당을 짓게 된 거예요. 그것도 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1주년 지나서 그 겨울 지나서 봄에 땅을 파서 이제 봄에 2주년 때 크리스마스 때 저희가 입당을 본당에 했는데, 결국 모든 일을 하나하나 막아서 결국 하나님께서 스스로 교회 예배당을 지으신 것이더군요. 그래서 늘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스스로 하시는 것이지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 가운데 별로 교회 개척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마음을 합했지 뭐 이러저러한 말들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길이 이렇게 막히고 저렇게 막혀서 결국 한길 갈수밖에 없게 하셔서 그 일을 이룬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 ’우리가 예배당을 짓자‘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설득시키고 뭐 이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오히려 막혀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아시아 행을 막고 그다음에 북행하려고 했던 이와 같은 길도 막으시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통해서 유럽으로 오기를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놓으셨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여러 길을 막아놓으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우리들에게 정확한 한 길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그 길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길을 지속적으로 막으십니다.

저는 한 가지 마음속으로 꼭 새기고 있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감사한 일은 절대로 마음에 잘 잊지를 않습니다. 늘 마음에 생각하며 ‘목사로서 하다 못하면 기도라도 내가 열심히 해드려야 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감사한 일은 마음에 꼭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마음에 좋지 않은 일은 쉽게 잊어버리려고 생각하고 또 잊어버립니다. 그런데요, 예배당 짓던 때의 오래전 얘기가 나왔으니까 그때 제가 마음에 많이 비감한 때가 있었어요. 뭐냐 하면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예배당을 짓는다하는 단계에 왔더니 그동안 여러 가지로 잘 협력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셨던 집사님 한분이 면담을 하시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매우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시더라구요. 그러더니 아주 불쌍한 눈초리로 바라보시면서 제가 그 눈빛을 지금도 잊지를 못하는 것 같아요. 눈을 이렇게 쳐다보면서 말씀하시더라구요 “목사님 세상을 아십니까?”

제가 세상을 알리가 있나요.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만 자랐고, 신학교 졸업하고 바로 목사가 되서 교회에서만 생활했으니까 저는 세상을 아는 게 없습니다. “제가 세상을 알지 못하지요” 그랬더니 “목사님, 세상이 참 어렵습니다.” 라고 얘기하면서 제게 지긋한 눈으로 저를 보면서 이렇게 얘기하시더라구요. “목사님, 참 철없는 짓을 하시는군요.” 그런데 제가 마음이 참 슬프더라구요. 그 눈빛이나 그와 같은 어투를 볼 때 참 마음이 슬프더라구요. 마음이 많이 쓸리죠.
‘아! 내가 철없는 일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참 감사합니다. 제가 참 어리석고 철없는 일을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까 세상의 방법과 기술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에 ‘이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시니 참 감사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교회에 안 나오셨어요.
마음이 많이 쓸리더라구요. 마음에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1년도 못 있다가 예배당을 완공해서 저희가 입당예배를 드렸쟎아요. 그리고 3년 정도 있다가 바로 성도들이 힘을 합해서 예배당의 모든 부채를 다 갚고, 헌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걸렸지요. 그리고 제가 그 헌당을 한 후에 그 집사님을 조그마한 선물을 하나 준비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것은 “집사님께서 제게 어리석은 철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모든 일이 다 완결된 것을 보니 철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려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에는 정말 마음에 진심어린 감사함이 있었어요. 제게 제 모든 실상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제게 모든 것은 하나님께 기도해서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 마음속에 깊이 느끼게 해 주신 것 같아요.

우리 인생에 배움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우리가 기분 좋게 깨닫는 것도 있지만, 어떤 때는 마음에 큰 슬픔을 느끼면서 깨닫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어찌 생각하면 우리 인생에 큰 슬픔과 마음에 쓸림과 아픔을 느끼면서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정말 제게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해 주셨고, 또 기도하지 않으면 다른 아무길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찾아뵙고 “덕분에 이와 같이 모든 일이 잘 마쳐지게 돼서 참 감사합니다.” 하고 마음에 목사로서 할 수 있는 진심어린 축복의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길이라는 것은 때로는 슬픈 가운데 고통을 겪으며, 정말 마음속에 견디지 못할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픔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15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는 것 같아요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모든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많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무리 봐도 길이 없는데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길이라는 것은 늘 형통해서 끝까지 그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삶의 일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날마다 날씨가 쨍쨍히 빛난다면 가뭄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흐린 날도, 비도 주시기 때문에 이세상의 곡식이 물기를 머금고, 그리고 익어가고 거둘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막음을 통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길을 여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모든 길이 막히거나 답답한 상황에 처한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은혜의 길로 우리의 길을 여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했지만 어려움이 있고, 우리는 예상치 못했지만 아픔이 있고, 우리의 길을 그것을 통해서 열어 가시는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하다 보면 우리 이런 거 느낄 때가 있죠? ‘정말 이 일은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스스로 느끼는 일이 있어요. ’정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셔서 일을 이루어 주셨구나 이건 정말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거야‘ 라고 우리가 마음속에 정말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가 있는지 아십니까? 정말 그렇게 기도했는데, 정말 애간장을 짜면서 그렇게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결과는 기도 하나도 안한 것과, 기도한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도대체 다음에 이와 똑같은 경우가 생긴다면 내가 더 기도해야 될 것인가,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라고 회의가 들만큼 기도한 것에 대한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 같아요. 믿음으로 믿었던 것에 대한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 같아요.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결과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 마음에 흔히 들어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런 상태가 오면 나는 또 기도할것인가 차라리 주어진 결과를 그냥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이 들만큼 너무 허망할 때가 있는거죠.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을 극복하는 거예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내가 그렇게 애간장을 짜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무심히 고개를 돌려 버린 듯한, 이와 같은 마음에 실망이 되고 슬픔에 쌓이는 이러한 순간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길이 열림을 봅니다.
사도바울은 이리 가려고 애썼고 저리가려고 애씁니다. 그는 가서 어떤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시작도 못해보고 이리저리 길이 막힌 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드로아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길을 열어주시는 거죠. 우리의 길이 막힐 때 그것은 그걸 그만 두라는 것 일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는 것일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그만 두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일을 막아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는 것인지 우리는 영적인 분별함을 가지고 예민하게 그 일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 조그만 아이성 전투에 패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죄악을 제거해 낸 다음 길을 가라는 뜻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의 우렁우렁한 이와 같은 용맹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 쥐 죽은 듯이 떨며 엎드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다윗을 등장시키기 위하여 그와 같은 상황을 만드셨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방법을 우리는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새 길을 위하여 우리의 시도 자체를 막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심을 믿고 기대하고 그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애를 써야 합니다. 지금 잠시 어려워도 새 길을 열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저는 어느 도시든지 가면은 제가 꼭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 도시에서 미술관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저는 미술에 대해 조애는 별로 없습니다만 그냥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저 책 몇 권정도 읽었고, 이리저리 보고 싶은 그림 보고, 또 좋아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같은 도시에 가도 또 여러 번 같은 미술관을 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많은 미술관을 가서 책에서만 보던 그림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을 참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미술관을 들어가게 되면요, 연도별로 그림을 걸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별로 그림을 걸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사람이 수집한 것으로 갤러리를 구성해서 방들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각각 모양이 다르죠. 그래서 각 1번부터 시작해서 갤러리를 쭉 이제 가서 구경을 합니다. 큰 미술관은 아침에 들어가면 점심 먹고 저녁때 끝날 때 나오기도 하고, 작은 미술관이면 또 일찍 나올 수도 있기도 하구요, 그저 늘 이렇게 마음속에 새로운 감동과 새로운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까지 구경꾼의 수준이니까요.

그림을 보다보면요 이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습니까? 보면 일정한 라인이 생겨요. 그 그림을 보게 되는 일정한 라인이 생긴단 말이예요. 대부분 그림을 비슷한 크기의 그림끼리 이렇게 마련을 해놨죠. 아니면, 조금 차이가 있어도 어느 정도는 같은 라인에서 볼 수 있구요. 그림을 보다 보면 그 그림이 벽에 붙어 있는데 그 그림을 볼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의 라인이 생겨요. 거의 비슷한 라인에서 형성을 해서 그림을 보게 되죠. 그런데 비슷한 라인을 걸어가면서 그림을 보다가 보면요 어느 순간에 그 라인에서 그림이 안 보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뭐냐하면, 갑자기 그 비슷한 크기의 그림이 있다가 갑자기 큰 그림이 걸릴때죠. 큰 그림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유명한 그림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림을 볼 때 느끼는 마음의 감동은 각자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반드시 유명한 것이 훌륭하다거나 또 특별히 큰 그림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니죠. 그런데 가다보면 이제 큰 그림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그림을 그린 사람이 많이 애를 썼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큰 그림이라고 해서 부분 부분 대강 그린 곳은 없구요. 다 정성을 들였기 때문이죠. 가까이선 안 보여요. 그럼 할 수없이 뒤로 물러서서,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서서 그림의 크기만큼 뒤로 물러서야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 그러면 뒤에 서서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고, 또 이제 그림의 구석구석을 보기위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부분 부분들을 뜯어서 보게 되죠. 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인생도 때로는 내가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늘 살아가는 내 일상의 삶의 모습 속에서는 그 길이 안 보여요. 저도 가끔 일부러 제 삶의 일상을 벗어나 보고자 생각하는데요. 아무리 새로운 영감을 받으려고 하고, 아무리 새로운 길을 보려고 해도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또 때로는 전체를 보기위해서 또 뒷걸음질 쳐서 멀리서 객관적인 모습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위치를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입장을 바꾸어서 각각의 모습을 볼 때, 거기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정확한 통찰을 이루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때로는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내 삶의 길을 발견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저렇게 추락시키셔서 멀리서 그 삶을 바라볼 때 그 길이 환연하게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정말 마음에 비탄한 심정을 가지고 가슴아파하는 상태 속에서 비로소 우리 삶의 선연한 길이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길이라는 것은 내가 유유자적하고 다 편안한 상태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 속에서 유일한 길이 확연하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 속에서 그 눈물방울 가운데 우리의 길이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기쁘고 감사하고 웃음 속에 그 길이 보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반드시 획일화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양한 모든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막아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도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열어 가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확신으로 순종하며 결단함으로 우리의 비전을 향해 길을 떠나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야할 길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면, 후회나 아쉬움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감을 기쁨으로 여기고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확실한 사명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사명의 확신을 갖고 가는 삶은 과정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내가 힘들다’ 라는 것은 ‘일이 힘들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사명이 분명치 않다’는 거예요. ‘내가 고민이 많다’ 는 것은 ‘그 일이 어렵고 힘들다‘ 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때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사명의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오히려 어려움이 기쁨이 되기도 합니다. 선교지에 갈 때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도 오히려 성도님들은 기뻐하는 모습을 봅니다. 전도할 때 면박을 당하지만, 부끄러움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봅니다. 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운 거예요. 마음에 괴로운 거예요. 쓸림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분명히 ‘옳은 길이 무엇이다’ 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수모를 수모로 여기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다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 확신과 사명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울 때 정말 일이 괴로운가, 내가 사명이 없는가, 확신이 없는가,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 없이 그저 내 혼자의 유익이나 혹은 마음에 좋아 보이는 길을 간다면, 항상 우리는 후회나 번민과 고통이 다가오게 됩니다. 사명의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환경 탓하고 사람 탓하게 됩니다. 사명이 있으면 우리는 환경과 사람이 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나는 망해도 그 길가다 망해야 돼. 나는 죽어도 그 길 가다 죽어야 돼. 나는 그리고 흥해도 그 길 가다 흥해야 돼.‘ 라고 생각하는 삶의 분명한 비전이 있어야 돼요.
삶의 분명한 길이 보여야 합니다. ‘나는 그 길 가다 망할꺼야. 나는 그 길 가다 죽을꺼야. 나는 그 길 가다 흥할꺼야.’ 라는 우리의 삶의 길이 있어야 해요.
나는 망해도 흥해도 죽어도 그 길가다 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삶의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삶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께서는 바로 어떠한 삶의 환상을 가지고, 어떠한 꿈을 가지고, 어떠한 삶의 비전과 길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삶의 열정과 끊임없는 희열을 위해 늘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야 하고, 또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특징은 조급함입니다.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쫓아가느라 달려간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분명한 사명을 느끼면, 달려가야 하는 목표가 분명히 보이니 우리는 늘 조급한 마음으로 달음질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정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느 날 문득 없어진다면, 어느 날 문득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너무너무 안됐다, 참 안타깝다, 우리와 좀 더 함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겠습니까? 아니면, 언제 없어졌는지 그저 느끼지 못하고 지내시겠습니까? 아니면, 겉으로 표현은 안해도 그저 마음에 ‘좀 편안하고, 속 시원하다’ 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끼치지 말아야 하는데, 최소한 남이 싫어하지만 참고 사는 이와 같은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우리 삶의 누추함이라는 것은 때때로 이러한 지경에 놓여 질 때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받은 축복을 나누어주며, 다른 이들을 축복하며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한 때도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길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소망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의 역사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고통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자리에서 보여 지는 분명한 하나님의 길이 우리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슬픔에 놓여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가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보여 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척박할 때도 있으나, 그런 척박함속에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눈에 보여지고, 마음에 읽혀지고, 우리의 삶에 확신되어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분명한 길을 보시고, 달려가시고, 그 가운데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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