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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변해야 산다 (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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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회사 현황을 소개받은 적이 있는데 놀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삼성전자 연계 사업의 총 매출액이 82조원 정도가 된답니다. 그리고 연간 순이익이 100억불 그러니까 10조가 넘는데 이 100억불 클럽에 든 기업은 전 세계 통틀어 5개이고 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기업은 삼성과 일본의 도요다 자동차뿐이랍니다.
게다가 삼성전자 한 회사의 연간 수출액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7.7%랍니다. 또한 삼성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전 세계에서 20위로 28위인 일본의 소니를 멀찌감치 따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성이 한국의 일류기업에서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하게 되는 데는 하나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즉 1993년 삼성 신경영 선언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소위 프랑크프르트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신경영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발판이 되어 세계 초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크프르트 선언의 골자는 이것입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다 남이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변화는 없다. 나 자신부터 양보하고 나부터 변해야 한다.” 그리고 이 때 생겨난 모토가 있는데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건희 에세이]라는 책을 보니까 이 때 이건희 회장이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졌더라구요. 이분이 1992년에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위기감에 등골이 오싹해 지는 경험을 했다는 거예요. 삼성 내부에 긴장감도 없고 나름대로 국내 제일이라는 자부심 속에 안주하고 있었으니 그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더라는 거예요. 이 때 고민하느라고 체중도 10키로나 빠지고 강력한 변화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변화를 이루어 냈고 세계 초 일류기업으로 삼성전자를 도약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변화해야 할 때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변화해야 할 때 제대로 변화하면 남보다 앞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할 때를 놓치거나 변화를 외면하면 도태되고 결국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변화의 요구 앞에 서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성장 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도전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그 변화를 뒤따르지 못한 채 낡고 구태의연한 모습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찾아가보고 싶은 종교 선호도에서 불교, 천주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오히려 신자들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일산영문교회도 변화의 요구 앞에 서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변화의 요구에다 지역사회의 변화로 인한 변화의 요구를 함께 맞고 있습니다. 특히 비교적 안정된 아파트 밀집 지역에서 각종 다양한 문화적 욕구의 수요가 많아지는 때에 우리교회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변화의 요구를 던지고 있습니다.

저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을 예사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우리교회의 지도자들이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와 우리교회의 앞날을 내다보고 어떤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기도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해 왔습니다. 외적인 변화는 물론이고 내적인 변화를 병행해서 시도해 왔습니다. 나름대로 교회가 발전했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교회는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고 발버둥 쳐도 좀처럼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지역이 앞으로 더 빠르게 변할 것이고 한국사회가 더 빠르게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변화를 시도해야 하고 반드시 그 변화를 성공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교회가 앞으로도 교회다운 교회로 든든히 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약 500년 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교회들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교황의 절대 교권주의 하에 교회의 경건은 화석처럼 굳어져만 갔습니다. 교회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해 면죄부라는 신앙을 빙자한 돈벌이 사업을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신자들은 미신적 신앙에 빠져들었고 복음의 능력은 이미 교회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이 때 변해야 산다고 외치고 나선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종교개혁자들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면서 그 선봉에 섰습니다. 이 변화의 물결이 강물처럼 온 유럽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신앙의 운동이 일어나 교회를 새롭게 했고, 교인들의 신앙을 다시 말씀 위에 서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변화에 성공했습니다. 변화해야 할 때를 정확하게 읽었고, 변화할 수 있는 힘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48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개혁자들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오늘 개혁자들이 우리들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1. 나로부터의 변화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원래 세상을 바꾸어 놓으려는 야심찬 개혁가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개혁해서 새롭게 하고자 하는 종교개혁자도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소심한 일개 신부였고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문제 때문에 번민의 번민을 거듭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에 정진했습니다. 금욕과 자기수행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510년 루터는 불과 27살의 나이에 업무 차 로마로 파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스칼라 산타 즉 예루살렘의 빌라도 관저에서 가져왔다는 계단을 맨 무릎으로 기어 올라감으로써 죄를 씻고 공로를 쌓는다고 믿는 풍습이 성행했습니다. 그도 수많은 순례자들 틈에 끼어 이 스칼라 산타를 맨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라 그의 마음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계단 중간쯤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나오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롬 1:17 말씀이 온통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진리에 기초해서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루터는 수도원을 뛰쳐나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뒤 따랐습니다. 그리고 면죄부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변화된 양심이 그를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마음 안의 개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그가 새사람이 되고 난 뒤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의 파문이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져서 호수 전체로 확산되어갑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헛수고 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은 채로 사회를 변화시키려 한다면 역시 헛수고입니다.

우리가 변화를 이루려고 할 때 주의해야 할 태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미루는 태도입니다. 너부터 변화하고 난 다음에 내가 변화하겠다고 하면 아무도 변화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변화를 강요하는 태도입니다. 강압적으로 남의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하면 저항에 부딪힙니다. 내가 먼저 변화하고 난 뒤에 자발적으로 따라올 수 있게 해야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변화를 시기하는 태도입니다. 마땅히 변화해야 할 것을 남들이 잘 추진해 갈 때 이것을 시기해서 방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힘을 보태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변화에 몰두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와 사회 변화를 말하기 전에 내 변화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2. 올바른 방향의 변화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요원의 불길처럼 유럽과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성경 번역과 성경 출판이었습니다.
당시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되어있었고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가질 수도 없었고, 라틴어를 모르기 때문에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진리와 차단된 채 미신적인 신앙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말씀에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오직 말씀! “sola scriptura”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마침 구텐베르그에 의해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일반 신자들이 독일어 성경을 가질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성공적으로 확대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길을 안내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에 대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치밀하게 종교개혁을 기획하고 방향을 정하고 일정을 잡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말씀에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을 쳤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아갈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들으며 그가 나아가는 길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변화도 같은 방향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진리가 우리의 길을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4:12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의사들이 수술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환자들이 수술대 위에 누워있습니다. 대부분 전신 마취상태입니다. 완전히 의사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놓았습니다. 전문가인 의사가 메스를 들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손질합니다. 자를 것은 자르고 긁어낼 것은 긁어냅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부분을 치료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변화가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이라는 메스를 드십니다. 말씀으로 우리 심령 속에 잘라 낼 것은 잘라내십니다. 처리할 것은 처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 가운데 문제가 있는 부분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온전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나 신념을 따른다고 할 때 우리의 변화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우리의 변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그 변화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변화의 노력은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는 일에 그리고 그 말씀 앞에 머무르려는 일에 모아져야 합니다.

3. 점진적인 변화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한 순간에 한꺼번에 종교개혁을 이루겠다고 기염을 토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과제를 하나씩 둘씩 해결하다보니 나중에 종교개혁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뒤이어 깔벵, 쯔빙글리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그의 종교개혁을 이어갔습니다.

한번은 친구인 스타피우츠라는 사람이 마르틴 루터에게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 때 루터가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에게 말한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이 후에도 여러 차례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루터는 무려 15번이나 핑계를 대고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스타피우츠가 작심을 하고 루터에게 다시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루터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설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의 설교가 시작되었고 이 설교가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종교개혁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변화를 한꺼번에 이루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한꺼번에 변화를 이루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고 혁명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혁을 생각할 때 늘 떠올리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개울에 놓여있는 징검다리입니다. 징검다리는 돌이 사람이 건널 수 있을 만큼의 간격마다 놓여있습니다. 하나 건너고 둘 건너고 그러다 보면 개울 저 건너편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목회 프로그램들이 교회 개혁을 위해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주목을 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셀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의 교회 원리 그대로 교회를 개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도를 하는 교회 가운데 성공적으로 교회 개혁을 이루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오히려 교회 개혁을 하려다가 교회 전체가 큰 홍역을 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셀 정신이나 셀 원리는 좋은 것입니다. 성경적인 것입니다. 소그룹 공동체 내의 성도의 교제를 살리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석처럼 굳어있는 구역 예배와 의례적인 교회 내의 인간관계를 성령 중심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시도가 과격합니다. 한꺼번에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셀 교회로의 변화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셀의 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셀 교회로 개혁해 가는 과정과 절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화를 시도할 때는 징검다리를 생각하십시오. 변화의 걸음을 내 딛으려면 건널 수 있는 정도에 돌을 놓으십시오. 욕심을 내서 너무 멀리에 돌을 놓으면 건너다가 빠집니다. 그리고 한 걸음 건넌 뒤 다음 돌도 역시 건널 수 있는 거리에 놓으십시오. 한 번 건넜다고 자신감이 생겨서 더 멀리 놓으면 건너다 빠질 수 있습니다. 변화와 개혁은 점진적으로 서서히 오래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개혁정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부단히 개혁해 가야합니다.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 부단히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변화는 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변화여야 합니다. 나아가 점진적으로 하나씩 이루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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