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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의 방주와 그리스도 (창 6: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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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와 그리스도(창6:13~22)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특히 구약성경을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원리를 알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원리 중 하나가 소위 ‘예표론’(豫表論, Typology)입니다. 조금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 두시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눈이 환하게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예표론’은 영화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본편’을 개봉하기 전에 미리 ‘예고편’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본편이죠. 예고편은 본편을 설명하기 위해 미리 일부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예고편’을 가리켜 ‘예표’(Type), ‘본편’을 ‘원형’(Prototype)이라 부릅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특히 예수님에 관한 예표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물, 사건, 인물 등이 예표로 사용되어서 예수님에 관해 부분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죠. 출애굽 당시 유월절 어린 양(출12:)은 장차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광야의 놋뱀(민21:)은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달려 인류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예표합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던 이삭(창22:)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도피성 제도(신19:)는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님께 나아가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예표해 줍니다.

  이러한 예표 중 그 중 하나가 본문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는 예표(예고편)이고, 예수님이 원형(본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의 방주를 예수님과 연관지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노아의 방주에 관해 살펴보면서 과연 그것이 어떤 영적 의미들을 가지는지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노아의 홍수와 방주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속에서 의미와 교훈을 찾아봐야 합니다.

[1] 노아 시대의 배경 : 심판의 필연성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몹시 번성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축복을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죄악의 기회로 오용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부터 모든 사람의 전반에 죄악으로 관영했습니다. 13절 말씀 보면 그 시대의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과연 어떻습니까? 노아 시대보다 더 악합니까? 선합니까? 당연히 더 악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악이 극에 달할 때 일어나는 필연적인 현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죄악이 가득한 인간도 오래 참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영원히 참아 주지는 않습니다. 죄악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국가, 시대, 인류 역사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심판 아래 있습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세상을 가리켜 뭐라고 표현합니까? 장망성(將亡城)! 그렇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 심판했지만,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면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심판받을까요? ‘불 심판’을 당합니다. 이러한 심판의 필연성에 대해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실을 믿고 대비해야 합니다.

[2] 방주의 목적 : 구원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구원의 길을 준비해 놓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멸망당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18절을 보십시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 ” 이 말씀대로 홍수 심판의 와중에서도 구원의 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14절.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잣나무는 목질이 아주 단단하고 물에 잘 붇지도 않습니다. 내구성이 아주 강한 나무입니다. 간들을 만들고 안팎으로 역청을 칠했다고 했는데, 역청은 아스팔트를 가리킵니다. 방수재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홍수가 날 때 물이 방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한 겁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역청 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코페르(속죄 제물)입니다. 그리고  칠한다 는 말이 카파르(속죄하다, 덮다)입니다. 구약 제사 제도에서는 어린 양의 피로 죄를 덮어 죄를 속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써 속죄하는 것을 예표합니다. 역청이 물이 침투해서 멸망시키는 것을 방지하듯이, 예수의 피가 믿는 자의 멸망을 방지해 줍니다.

  방주의 제도는 아주 특이했습니다. 15절~16절.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규빗은 팔꿈치부터 손끝까지의 길이인데 약 45cm정도입니다. 300규빗 × 50규빗 × 30규빗(약45cm)이니까 135m × 23m × 14m 쯤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그 정도 크기에 모든 동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기 쉽습니다. 한 쌍씩이라도 그 많은 각종 동물들이 어떻게 다 들어갈 수 있느냐 이겁니다. 있습니다! 한국창조과학회http://www.kacr.or.kr/)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시면 관련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방주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 용적량이 기차 화물차로 522대 분량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양 122,500 마리를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물 속에 사는 어류를 제외하고 지구 상에 포유류 3,500종, 조류 8,600종, 양서류 파충류 5,500종 도합 17,600종이 있는데, 2마리씩 하면 35,200 마리가 됩니다. 여기에다 정한 짐승은 일곱 쌍씩이니까 좀 보태도 4만 마리 내외가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양이 동물들의 평균치보다 덩치가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계산 해보면 그 동물들 다 들어가고 식량도 충분히 들어간다는 얘기가 됩니다. 

  방주의 모양은 장방형, 즉 직육면체입니다. 한 마디로 큰 상자나 큰 궤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면 Ship(배)라고 번역하지 않고 Ark(상자)라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구조로 40일 동안 비가 내려 온 땅이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난파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히려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구조라는 겁니다. 1993년 한국창조과학회 요청으로 해군사관학교 선박기술연구소에서 방주 모형을 제작해서 실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인공 파도를 일으켜 실험을 했더니 무려 40m 파도에서도 끄떡없었다는 겁니다. 인류 역사 상 30m 넘는 파도 없었다고 하니까 노아의 방주는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이런 절묘한 형태의 방주로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들과 동물들을 홍수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많은 사람들(성서고고학자, 불신과학자들 포함 ... )이 아라랏 산(터어키에 위치) 해발 5천m~6천m 사이의 빙하 지역에서 방주로 추정되는 물체의 잔해를 발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귀퉁이 조각을 떼어다가 조사해 보니까 나무가 단단한 돌처럼 굳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위치가 수목한계선 보다 훨씬 높은 지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주가 물 위로 떠다니다가 그 높은 아라랏 산에 안착했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에 대해 아직 논란이 있지는 하지만 터어키 정부가 이미 오래 전에  아라랏 산에 방주의 잔해가 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 외에도 방주와 관련된 사항들을 살펴보면 정말 흥미롭습니다. 방주는 단 한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도 오직 하나였습니다. 16절 보면, ‘그 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수이고,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을 예표할까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10:7, 9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노아와 그 식구들은 하나님의 말씀(심판과 구원)을 그대로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심판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겁니다. 그래서 히11:7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마찬가지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귀합니까? 영원한 운명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옵니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0분, 주일날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서해 훼리호 참사 사건입니다. 관광객, 낚시꾼, 섬 주민 등 262명이 사망한 최악의 해난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살아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증거하는 말을 들어보면 놀랍습니다. 그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견디다 구조되었습니다. 평소에는 착용법도 듣지 않고 무관심했는데 일단 위기 상황이 되니까 서로 먼저 입으려고 아우성입니다. 그리고 미처 구명조끼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 아이스박스에서 잘라낸 스티로폼 조각이라도 붙잡은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생각해 보면 예수 그 이름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노아 시대에 방주가 그렇게 귀했듯이 말입니다. 부디 예수 이름 믿으시고 꼭 구원 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방주의 창문 : 소망

  16절 보면 방주의 구조 중 ‘창’이 나옵니다. 위로부터 1규빗 되는 위치에 만들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창으로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하늘이 보입니다. 만일 창을 옆으로 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홍수 가운데 펼쳐지는 아수라장을 보고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을 바라봄으로 노아와 그 집 식구들은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염려, 걱정, 한숨, 불안, 고민, 낙심,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천국을 바라보면 새 힘이 넘칩니다.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스데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유대인 공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습니다. 돌이 날아오는데, 그래서 피투성이가 되는데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운명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습니까? 하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행7:55~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로 받으시고, 용기백배하여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4] 방주의 운전 장치 : 하나님의 인도 
 
  방주의 구조를 보면 신기한 게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운전 장치가 없었습니다. 조향 장치도 없고, 동력 장치도 없었습니다. 운전석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방주는 어떻게 움직였습니까요? 그냥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아라랏 산에 상륙했습니다. 창8:4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 ”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운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1년가량 심한 홍수 가운데 물 위를 떠다녔는데도 하나 상치 않고 안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운전하시면 안전합니다. 순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그렇게 됩니다. 고난이 와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갈릴리 바다 항해하는데 큰 광풍이 불어 닥칩니다. 제자들은 죽는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마치 맹수를 달래는 조련사처럼 말씀으로 파도를 잔잔케 하십니다.  막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생을 오직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선한 길로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5] 방주의 증거 : 복음 전도

  노아가 방주를 건조한 기간은 무려 120년이나 됐습니다. 방주 건조 기간 치고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아무리 노아의 식구 수가 적고, 방주가 크다고 해도 그렇지 그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슨 이유로 그렇게 긴 시간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심판의 유예 기간입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겁니다. 방주로 들어가면 구원받는다고 전도하도록 하신 겁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기회 주신 것입니다. 벧후2:5  보면 노아를 가리켜 “ ... 의를 전파하는 노아 ...”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120년은 심판의 집행 유예 기간인 동시에, 구원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아의 식구들 외에 모든 사람들이 그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홍수 심판이 시작됐을 때 방주를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후회 막심했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아의 가족들은 모두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노아 식구들은 한명도 빠지지 않고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노아, 아내, 세 아들, 세 자부 등 8식구 모두 ... 여러분, 만일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조롱하고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큰 비극입니다. 이 세상에서 한 핏줄이었는데, 한 지붕 밑에서 살았는데, 한 이불 속에서 살았는데, 한 솥 밥을 먹었는데, ... 다 함께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성경을 보면 그런 슬픈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롯의 가족을 보십시오! 소돔성에 유황불 심판이 내려질 때 천사의 손에 이끌려 노아와 식구들이 황급하게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자꾸 뒤를 돌아보다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두 딸은 겨우 살아났지만,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겨 무시하다 멸망을 당합니다. 영적인 이산가족이 된 겁니다.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 세상에서 헤어지는 이산가족도 그 고통이 크지만 내세에서 영원한 이산가족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다. 특히 노아처럼 가족들을 복음으로 잘 섬깁시다. 그래서 우리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이산가족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예표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고, 그대로 믿음으로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가 주는 교훈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시고, 약속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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