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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빛을 발라라! (사 6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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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길을 걸어 보신 적 있습니까?
칠흑 같은 어두운 시골 길을 혼자 걸어 보신 적 있습니까?
요즘은 시골도 가로등이 설치되어서 길을 걷는데 그다지 무섭지 않지만 옛날 제가 어렸을 때는 호롱불을 켜서 살았던 시골 밤길은 참 무서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길에 멀리서 작은 불빛이 조금이라도 비취면 그래도 덜 무섭고 왠지 소망이 생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깜깜한 밤에 바다 길을 비춰주는 등대는 항해를 하는 배에게 생명 빛입니다.
또한 깜깜한 밤 착륙하려는 비행기에게 활주로의 파란 유도 등도 비행기에게 생명의 빛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둔 세상, 죄악된 세상의 빛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캄캄할수록 더욱 빛이 필요합니다. 또한 어둠이 심하면 심할수록 빛의 진가가 발휘됩니다. 여러분 지금이 바로 빛을 발할 때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죄악이 관영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오리무중 같은 캄캄한 세상 속에서 빛이 발휘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왜 우리가 빛을 발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그 시대를 사는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요일1:5) 하나님은 햇빛보다 더 밝은 영광의 빛을 가지고 계십니다.(계21:23)
예수님도 빛이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또 요한복음 12장 46절에서도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성령님도 빛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강림하심에 대해서 “성령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불이 무엇입니까? 불이 빛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도 빛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빛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8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또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우리는 본래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빛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발전기를 돌려주심으로 우리가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사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for your light has come, 너를 위한 빛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아 세상에 비추어야할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빛을 받아야 합니다. 빛을 발하기 위해서 충전을 잘 해야 합니다.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전원에 연결되어야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조명기구를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아무리 비싸고 커다란 조명기구라 할지라도 전원과 연결시키지 않았다면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일날은 충전하는 날입니다. 찬양으로 충전하고, 기도로 충전하고 말씀으로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충전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새벽예배를 통해서 개인의 기도 생활을 통해서 충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통해서 충전 받고 또 새벽예배를 통해서 기도시간을 통해서 충전 받으면 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마음껏 충전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소리를 높여서 기도하므로 주님의 능력의 에너지를 충전 받기를 바랍니다.

용량이 클수록 더 많이 충전 받아야 합니다.
용량이 작으면 금방 충전됩니다. 그런데 용량이 크면 한참을 충전해야 충전이 됩니다. 제 핸드폰은 금방 충전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사용해도 금방 방전되어서 그런데 제 아내의 핸드폰은 오래 동안 충전해야 완전충전이 됩니다. 그런데 한번 충전하면 오래 씁니다.
성령님께 오래 충전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잛게 충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용량이 크면 클수록 오래 충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빛을 발하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충전 받으십시오. 더 많이 충전하십시오. 아니 충전하는 것보다 전원에 꽂아 있으십시오. 그러면 한없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촛불로서 작은 불을 비추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중요합니다. 작은 촛불로 가정을 비출 때에 가정이 환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멀리 비추이는 빛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비추이는 빛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가정만 비추이는 빛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빛을 많이 발해도 이미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빛이 있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우리가 빛을 발하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아니 이러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서 빛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일어나라! Stand up!”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게으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인 나태함과 교만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라고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고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보고도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어서 거동을 못하는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는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니 이 중풍병자가 치료함을 받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어서 무덤에 묻혀 썩어 냄새나는 죽은 나사로에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명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일어나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자신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받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가시는 도중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딸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을 안심시키시면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말씀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셔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외치니 그 순간 소녀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달리다굼”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죽은 소녀를 다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라”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납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려면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죽었던 청년처럼 죽음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어날 때 믿음도, 건강도, 사업도, 경제도 기적적으로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도가 빛을 세상에 어떻게 비추겠습니까?
예수님은 총론뿐 아니라 각론도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는데 그 각론 즉 우리가 해야 할 빛의 사명은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마태복음 5장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거나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기분 좋게, 유익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사랑을 주고, 복지를 증진시키고, 쓰레기를 치우고, 질서를 지키기, 부정부패를 퇴치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현실]
20세기 말 한국 교회는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아무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 1천명에게 앞으로 종교를 가지면 어떤 종교를 가지겠느냐는 물음에 80년대에는 개신교, 천주교, 불교 순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서는 불교, 천주교, 개신교 순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머리 깎인 삼손, 눈이 뽑혀진 삼손이 되었습니다.

[예]
서울의 모 구청에서 사회 복지관을 지어 운영권을 맡길 때에 개신교에서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는데, 구청 담당자가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교회가 맡아서 일을 하는데 말만 많고 운영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청 담당자가 차라리 천주교에게 운영을 맡기자고 구청장에게 건의를 하였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등불을 가졌다할지라도 그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등불을 켰다면 등경 위에 두어야 그 빛이 비추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병욱목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숨어 있는 7,000명이 무슨 소용 있느냐? 엘리야와 같은 불의와 싸우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 아무리 개신교의 숫자가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두 자기의 빛을 감추고 일어나지 못한다면 이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착한 행실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머리 깎인 삼손이요. 눈이 뽑힌 삼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 직장 상사]
어떤 분이 교회 나와 등록했다가 그 직장의 상사가 교회 직분자인데 사사건건 하는 일에 시비를 걸고 은근히 상납을 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공금까지 유용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고 교회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그 상사는 직장을 사임하게 되고, 후임자가 왔는데 그 분도 교회 중직자인 것을 알고 또 잘못 만났구나! 했는데 이 분은 전번 상사와는 달랐습니다. 이번에 온 상사는 부하 직원들을 격려하고, 솔선수범하고, 단합하기 위해 자기 돈을 내서 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명을 받고 다시 교회 다니기로 했고 상사와 함께 일하던 부서 사람들은 그 후 다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직장에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결론: 빛을 비춘 결과
성도가 빛을 비춘 결과 열방과 열왕이 네 빛으로 나아옵니다.(3)
3절을 읽겠습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3)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통하여 본을 보이면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옵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이 주님의 빛으로 나아옵니다.

요즘은 노방전도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적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관계전도를 통해서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빛으로서 살면 여름밤에 빛이 있는 곳에 생물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옵니다.

또한 우리가 빛의 사명을 감당하면 자녀들이 복이 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물론 이 말씀은 유다가 포로에서 귀환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정말 이 예언대로 BC 536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고초를 겪던 유다가 돌아오는 예언의 성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빛의 사명을 감당하면 묶였던 것이 풀리고 자녀들이 주님 앞에서 복을 받은 축복이 있음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잘되기를 누구보다 원하시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저절로 오는 분명한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5절부터 7절을 보면 경제적으로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사 6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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