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해지기 전에 (삼하 3:31-39, 고후 6:1-10, 막 13:24-27)

  • 잡초 잡초
  • 208
  • 0

첨부 1


1.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훌륭한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권력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1980년 봄 우리나라에 이런 권력의 공백이 생겼을 때 전두환을 앞세운 일단의 군인들이 온갖 악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 권력을 탈취했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자기들이 저지른 불법과 불의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때는 온 국민이 소위「서울의 봄」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민주주의가 다시 꽃피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저 일단의 군인들의 폭거에 의한 권력 탈취는 국민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는 엄청난 후진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군사 쿠데타의 주역들은 법의 심판을 받아 백담사로도 쫓겨 갔고, 또 감옥에 까지 가야했습니다. 아니 앞으로 올 미래의 모든 세대들에게 끊임없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역사도 이렇게 엄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마25: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때인가는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비유에 보면 청지기가 불의를 행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이 그 청지기를 불러 “네 하던 일을 정리하라”고 했다. 요새 같으면 “책상 빼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야할 나의 보고서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정죄와 함께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석이나 금이나 은같이 불에 타지 않고 남아서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나 짚이나 풀과 같아서 불에 타버려 겨우 부끄러운 구원은 받되 상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악한 종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늘 주님 앞에 살며, 주님 오시기를 고대하십니까? 아니면 “그런 일은 없다”고 하면서 내 마음대로 처신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때 가봐야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 가보면 확인해 보기 전에 이미 심판이 내려지게 됩니다. 술을 매우 좋아하는 어떤 분들은 “술 없는 천당보다 마음껏 술을 마실 수만 있다면 지옥도 좋다”고 말합니다. 지옥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군사 정권 때 소위 삼청교육대란 것이 있었습니다.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미명아래 인권을 싸그리 짓밟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공공연하게 행했던 치욕스런 사건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을 수 있다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낫다고 할 그런 수욕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을 자유도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에게는 죽을 수도 없다는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청교육대도 지옥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을 믿으십시오. 지금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섬기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구원이 되고 면류관의 보석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 삼하3:에는 이런 권력의 공백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인간군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3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그 첫째가 아브넬입니다. 그는 사울의 군대 사령관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들들 가운데 불구자인 이스보셋이 남아서 겨우 왕국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그런 현실에서 이스라엘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이 아브넬입니다. 겉으로는 허수아비 왕인 이스보셋을 세워놓고 명분을 만들고서는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기가 주군으로 섬기던 사울의 첩과 부정한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이스보셋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가 아브넬의 벽력같은 협박 앞에 말 한마디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넬은 배신자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자신도 어처구니없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남에게 행한 대로 자기가 고스란히 넘겨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사람은 그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혹 남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해친 일은 없습니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 남의 인격을 모독한 일,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간에 사랑으로 행치 않은 일들은 없습니까? 우리의 그런 일들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살피면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어떤 죄악일지라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넬의 죄악은 하나님의 뜻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하나님이 버린 사울 왕가에 붙어서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사소한 것에 잡착했다가 엄청난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이것을 小貪大失이라고 했습니다. 부디 세상 것 때문에 하늘의 복을 잃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다윗의 군 사령관 요압이 있습니다.

a. 먼저 그는 원수를 분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드린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북 왕국 사람들을 다 다윗치하로 돌려주겠다고 협상하기 위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기꺼이 그 협상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불가침 조약을 맺고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그나마 통일을 위한 협상이 진전되고 있는 마당에 요압이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도중에서 기다리다 암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적으로 오인하여 암살하고 말았습니다. 적을 잘못 짚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우(愚)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원수는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그것도 같은 교회 교인을 마치 적인 줄 잘못 알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서로는 결코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공동 전선을 펴고 적과 싸워야할 우군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b. 요압의 결정적인 잘못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일종의 파워게임이었습니다. 만일 남북이 통일이 된다면 아브넬이 요압의 가장 큰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싹이 자라기 전에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브넬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브넬이 전쟁 중에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데 대한 보복 살해였습니다. 국가적인 대사에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켰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역에 자기감정을 개입시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에 오히려 먹구름이 끼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아브넬의 속셈이 어떤 계산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인간의 역할을 이용해서라도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 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 받는 것,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돕는 것, 이런 일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때 주님은 “너희 상이 하늘에서 크다”고 하십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계획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너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새벽 시간에 아가서를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만 거기에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잇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보시면서 “네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스바냐서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뜻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뜻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사람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연약한 인간이요, 죄인입니다. 그도 역시 간음죄도 범했고 살인 교사(敎唆)하는 죄도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통절하게 회개했습니다. 신약의 가룟 유다와 구약의 다윗의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고 자살로 끝을 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하고 났을 때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지적하고 책망했을 때 왕의 보좌에서 내려앉아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거두시더라도 주의 성령님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애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용서해 주시고 계속해서 그를 들어 쓰셨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에 지극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의 입지를 위협하는 원수들과 싸워서 나라를 든든히 하고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백성 이스라엘을 잘 살도록 하여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 일에 관심이 컸느냐 하는 것은 그가 그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일,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 일,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성전 건축을 계획하고 온갖 힘을 다 기울여 그 준비를 한 일등을 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펼치면 맨 먼저 나오는 말씀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더니 하나님은 다윗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왕위에 앉을 사람이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시더니 만 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을 통해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또 한 가지 다윗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브넬이 암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고 베옷을 입고 통곡을 하면서 그 상여를 따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스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적군이나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슬퍼한 것입니다. 인간사랑의 자연스런 표출입니다. 매우 인간적인 이 모습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칫하면 자신이 암살 배후로 지목 당할 수 있는 위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된다는 것 보다 하나님의 일이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는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지극한 애도는 이 두 가지 우려를 다 불식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통일왕국의 건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굉장한 초석을 놓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의 나라를 위하여,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다윗처럼 나도 “해지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오동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