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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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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때문에 내가 새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사람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성품중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  속에 부끄러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할 때 부끄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할 때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당해야할 일은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대하여서는 뻔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전도에 있어서 사탄이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자극하거나, 부끄러움을 자극해서 복음의 증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나에게 주어진 이 생명도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끝까지 우리의 입술을 열지 못하게 하고, 성령님은 우리의 입술을 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이 두 양상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도들이 성령충만할 때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지만, 은혜가 떨어졌을 때는 입술이 닫히고 내향적이 되어 복음전파가 약해졌습니다.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는 이유도, 이 당시 로마는 예수 믿는 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유대인 개종자들과 노예나 천민 출신자중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이 로마의 거대한 세속적인 문화를 거스리며, 복음을 담대하게 외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로마의 세속적인 물줄기에 이끌려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딤후1: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고, 3대째 신앙을 가진 자요, 이미 성년이고, 목사이며, 복음전도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아버지로서의 바울의 마음은 혹시나 디모데가 위축되어 복음전도자로서의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까봐 격려하고 훈계하는 의미에서 8절에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라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리 입술을 열지 못하게 방해하고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의 입술을 담대하게 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부끄러움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막8:36-38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복음을 먼저 받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입을 닫고 있을 때, 수많은 영혼들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떠내려가는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가치가 혼란스럽고 예수 믿는 자와 진리를 무시하고 도전하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세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 드러내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의 가치관을 공격하고, 다수가 우리를 따르지 않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런 상황을 다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보다 똑똑하고,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위축되는 것을 다 간파하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나도 그를 부끄러워하리라”고 엄청난 경고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나 조직사회에서 처음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양심의 고통이나 조직사회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계시는 분이 있으면 이 시간을 통해 해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그리스도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1.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구원이며, 구원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지옥 갈 사람을 천국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한자는 복음을 마음속에 가두어 놓을 수가 없고, 입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상식을 깨뜨린다든지 무례하게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를 당신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을 가지고 애정어린 소원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복음이 너무나도 좋은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나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비밀정보원 식으로 숨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다가가는 것도 부담이 되고, 주님으로부터 떠날려 해도 부담이 많습니다.
따라서 물속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뭍으로 완전히 올라서는 것도 아닌, 물 가장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힘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집에가서도 가족들에게 복음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16절의 말씀은 비록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숫자적으로 소수이고, 문화적으로도 어렵지만,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는 영적 아버지로서의 바울의 마음인 것입니다.

2.믿음의 선배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을 다시 조명해보고, 우리의 삶에 필요한 교훈들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구절을 써 내려갈 때 사도 바울의 뇌리에 꽉 붙잡혀 있는 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그가 과거에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등지고 도전하던 때,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어느 날 유대인의 공회에 스데반 집사님이 잡혀왔습니다.
그런데 행6:15절을 보면 공회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았는데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대적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오릅니다.
스데반이 입을 열어 구약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복음의 내용을 이야기하자 공회에 있던 자들이 더 이상 앉아서 들을 수 없어 일어나 돌을 들어 스데반을 내리쳤습니다.
행7:59-60절을 보면 여기저기 깨지고 피투성이가 된 상황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때 행9:1절을 보면 사울은 이러한 “스데반 집사님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깨닫고 나서 그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고,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나빴는가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지금 그 스데반을 생각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를 결심하고 오늘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도 이기풍 목사님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거절하고 핍박했지만, 선교사님들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삶을 인해서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위해 청춘을 바친 선교사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정리할 때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것이냐, 아니면 복음에 붙잡혀서 복음을 자랑하며 살 것이냐를 결정해야하는 것입니다.

히12:1절을 보면 “우리에게는 복음을 자랑했던 구름 떼와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증거를 위해 자기 삶을 기쁘게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된 것은 바로 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입을 다물지 않고 담대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의 변방에 서 있을 때는 복음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깊이 깨닫고 예수를 만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아니라 자랑하는 자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영적인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시간 복음에 대한 감격이 내 영혼을 장악하고 주장하며 복음의 눈을 뜨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을 강권하여 데려오십시오.
한번 찾아가서 안되면 두 번 찾아가고, 두 번 찾아가서 안되면 세 번, 네 번 찾아가 그들이 마음의 문빗장을 열어 그 영혼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도록 우리가 책임을 져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삼고초려가 우리에게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주일마다 복음의 영광스러운 말씀으로, 내 영혼이 새로워지고, 거듭나고, 회복되는 거룩한 역사가 우리 고현교회에서 일어나 모든 성도들의 심령과 가정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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