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막 2:1-12)

  • 잡초 잡초
  • 566
  • 0

첨부 1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가복음 Mark 2:1-12)

2: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A few days later, when Jesus again entered Capernaum, the people heard that he had come home.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So many gathered that there was no room left, not even outside the door, and he preached the word to them.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Some men came, bringing to him a paralytic, carried by four of them.
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Since they could not get him to Jesus because of the crowd, they made an opening in the roof above Jesus and, after digging through it, lowered the mat the paralyzed man was lying on.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Son, your sins are forgiven."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Now some teachers of the law were sitting there, thinking to themselves,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Why does this fellow talk like that? He's blaspheming! Who can forgive sins but God alone?"
2: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Immediately Jesus knew in his spirit that this was what they were thinking in their hearts, and he said to them, "Why are you thinking these things?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Which is easier: to say to the paralytic,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take your mat and walk'?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But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 . ." He said to the paralytic,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I tell you,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He got up, took his mat and walked out in full view of them all. This amazed everyone and they praised God, saying, "We ha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지난주일, 나는 “유태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런 질문을 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나는 유태인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 전문 영역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나는 보다 큰 그림 속에 유태인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아니라 물질 중심이라면 누구나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 교회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물질,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물질을 선택했다면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바른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제외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요한복음 John 14:6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물질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물질 중심으로 살아가면 “비인간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모두 돈을 환산하기 때문에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사람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사람을 물질을 위해 짓지 않으셨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물질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과 함께 영생이요, 물질을 섬기면 물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 뵙고 병 고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어떤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병이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이 병든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방법을 놓고 상의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 머물 때였습니다. 친구들이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들 중에 네 명이 침대의 모서리를 각각 붙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네 명 말고 더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좀 비켜달라고 해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뵙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침대를 끌고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붕은 평평했습니다. 침대를 끌고 올라간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었습니다. 이제는 침대를 끈으로 잡아매고 아래로 내려뜨렸습니다.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본래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인 이스라엘 가옥 구조 상, 지붕을 뜯어내면 먼지가 많이 생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만 하시오! 무엇 하는 거요?”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반발은 예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눈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중풍병자를 포함한 그 친구들, 침상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내린 그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어서 침상에 누운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너의 죄를 사한다.”

이 사람은 그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것입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교육을 담당하던 서기관들이 소곤거리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누구야? 하나님 말고 또 누가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의 논의을 아셨습니다. “내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예수님 고유의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대를 가지고, 집으로 가라!”
중풍병자는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를 메고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언제 본 적이 있나? 정말 놀랍다. 하나님은 참 위대하시다!”

역사적으로 이처럼 극적인 방법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 또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가지가지입니다. 수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때마다 다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단과 방법은 두 번째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먼저 마음이 가고나면, 방법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간 이 중풍병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생명은 간절함에서 납니다. 그리고 생명은 간절함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더 건강해질 수도 있고, 더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품고 있는가, 여기 달렸습니다.

친구들
그 친구들에게 초점을 돌리기로 합니다. 주님께서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병자를 친구로 두었습니다. 대개 건강한 친구를 원하지, 병자는 꺼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험난한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병자
병자에게로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병을 얻었으니 그렇게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친구들을 얻었습니다. 이만하면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더 운이 좋은 사람일까요?

그러나 단지 운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은 친구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김순보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CPMC 캘리포니아 캠퍼스에 입원해 있습니다. 상태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시간을 내어 기도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가능하시면 방문하셔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권사님이 그동안 기도하면서 길러온 성지를 위해서 기도 부탁합니다. 이제 지난 8월로 11살이 된 그를 위해 꼭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권사님이 우리교회 등록한 것이 1995년 4월 2일이었습니다. 개척한 지 11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지금부터 11년 7개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한결같이 교회를 위해 기도해 오셨습니다.

권사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천국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죄”입니다. 죄가 모든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죄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을 바르게 깨닫지 못합니다. 질투, 편견, 전쟁, 이런 모든 것들은 죄가 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의 생산입니다. 말 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다 죄입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죄를 용서 받아야 천국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고서는 천국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죄는 우리를 세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지고, 세상에 매이게 만듭니다. 물질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인격도, 사랑도, 감정도, 모두 물질로 환원되는 비극입니다. 죄를 벗어야 합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죄가 사함 받지 않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모두 미봉책(彌縫策)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움질”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대안(代案)이 아닙니다.

좋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나 혼자만 아니라, 친구들도 같이 가져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보십시오.

중풍병자는 몸만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도 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친구들은 평소에 그 중풍병 친구가 무얼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더라도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무리한 일인줄 알았지만 그들은 그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평소에 무얼 원하는지 잘 알 수 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친구가 되었든, 식구들이 되었든,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1. 투명해야 합니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2. 단순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많은 소원이 아니라, 꼭 한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투명, 단순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예수님을 날마다 초청하십시오. 예수님을 날마다 기다리십시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그러면 삶이 투명, 단순해집니다.

그것이 친구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는 길입니다. 그들의 은혜와 그들의 여유와 그들의 여건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평소에 “강한 믿음”을 품으십시오. 평소에 뚜렷한 소원을 품으십시오.

유언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없어도 주변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혹시 유언장 없이 죽게 되더라도 식구들은 물론 친구들도 “아, 그 사람은 평소에 이렇게 살았어. 그러니 이렇게 해 달라고 했을 거야!” 일치된 의견이 나오게 살아야 합니다.

중풍병 걸린 사람은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면, 자기 침상을 짊어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친구들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너무 미안해서” 계속 그렇게 하라고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그런 상태의 병자 친구를 침상에 메고 올라가는 친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것이 친구를 위하는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나러 가는 길에는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데일리시티 언덕, 금문교회로 올라가는 길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길을 지날 때도 교회의 위치를 파악합니다. 280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교회의 십자가 탑이 눈에 금방 들어옵니다. Bart를 타고 갈 때는 더욱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정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열다섯 개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한 걸음씩 인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식사할 때도 입만 열었다 하면 “교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을 하다가도 궁금해집니다. 날이라고 궂게 되면 “교회 지붕이 새지는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렇게 “늘” 교회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김 집사님 가정은 이런 맛있는 걸 먹기는 먹는 거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옷을 입을 때마다, “박 집사님은 교회 입고 나올 옷이 없어서 고민하는 건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씁니다. 

이런 사람의 친구들은 그에게 무얼 해 주어야 그가 가장 기뻐할 줄 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속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먼저 예수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 병자는 병상에 누웠으나,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가지 않으면 ‘억지’입니다.
‘억지’로 지붕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억지로 지붕을 뜯어 내릴 수 없습니다.
억지로 사람들의 비난을 씹어 삼킬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기쁨”으로 하는 일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위해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돈 때문에” 하는 사업,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공부, 그런 것을 위해 우리가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시편 122:1입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A song of ascents. Of David.
      I rejoiced with those who said to me, "Let us go to the house of the            LORD."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뻐하고 또 기뻐하였습니다.

교회 가자! 이 말처럼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교회 갈 날만 손 꼽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중풍병자는 예수님 만나기를 기뻐했을 것입니다.
친구들은 그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 후에 영화가 된 그 이야기입니다.

좋은 친구의 마음가짐은 늘 이렇습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묻지 않아도 그 사람이 무얼 좋아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가장 좋은 일, 최선을 다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를 “주님께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나는 내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 가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가, 내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걸 아십니다. 그러면 그를 도와주는 방법,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법도 아십니다.

주 예수님께 나아가는 발걸음. 이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여기는 진정한 인간 냄새가 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 사람을 경쟁자가 아니라 ‘친구’로 여기는 마음, 그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앞으로 나아온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내가 네 죄를 사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다고 하신 주님. 그러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주님.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고 배우라고 하신 주님.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주님. 예수님을 날마다 기뻐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살도록 기도하십시오.

물질은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삽니다.

주님을 기뻐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아주 어렵게 될 때라도, 친구들은 여러분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기도

은혜의 주님.
저희들이 주님을 기뻐하는 마음 변치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도록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