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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간증 (히 1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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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사람들은 조상에 대해 관심이 크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조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조상에 대한 관심보다, 영의 조상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의 아버지도 되고, 이슬람교의 아버지도 되고, 천주교의 아버지 또한 개신교의 아버지도 된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간증을 들어보자.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이렇게 간증할 것이다. “제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다. 그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가운데 하나지요.

  저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았지만, 그 곳은 우상의 도시였다. (수24:2) 말씀처럼 아버지 데라도, 그곳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살았다. 저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에, 조상으로부터 믿음을 전수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75세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죽을 준비를 해야할 나이에 소명을 받았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지요. 미국 교포, 일본 교포들도 나이가 들면 조국을 그리워하여, 고향 땅을 잊지 못해, 고향에 돌아가서 죽으려고 하지요.

  고대 사회에서는 부족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떠나면,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없게 된다. 누구도 생명에 대한 보장도 받지 못한다. 부족을 이탈하면 죽음과 고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물며 노년이 되어 떠난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고향 땅에 뼈를 묻어야 할 노인에게, 고향 땅을 떠나라는 음성이 들려왔지요. 인간적으로 이것은 복된 음성이 아니다. 절망의 음성이요, 두려움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미지의 땅으로 떠났다.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난코스 가운데 난코스다.

  지대가 험난하여 노인은 무척 힘든 여정이다. 산악지대와 강과 들, 사막지대를 넘어 장장 2,400리 길이다. 저는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 원주민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평야와 성읍을 피하면서, 남쪽을 향해서 여행을 계속했다.

  가나안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창12:7)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아브라함은 허기에 지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애굽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약속하신 말씀이 믿고 기다렸다.

  변치 않는 충성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다. 이것이 신앙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당장 성취되면 기뻐하고, 성취가 늦으면 불신하고 원망하는 따위는, 신앙이 아니다. 이는 값싼 기복신앙이요, 이기적인데서 출발한 미신행위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간증을 듣고, 그의 신앙을 배워야 한다.

1. 순종하는 믿음(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했는가?

(1)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다. 순종은 깨달음으로부터 온다. 아브라함은 듣는 귀로 인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믿음과 복을 받았다.

  순종이 지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그런데 원문은, 듣는 마음(󰘨󰗭󰚇 ב󰗝)을 구했다. 어떤 사람은 매주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외면한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듣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세계를 열어주신다.

  순종하려면 잘 들어야 한다. 삼상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진멸하라고 명하셨지만 사울 왕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사울 왕을 버리시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하셨다.

  들음은 순종을 전제로 할 때, 바로 들린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신다. (행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시간에 열심히 말씀을 들어야 한다.

(2)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다. 비록 알지 못했지만, 그는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은, 즉각적인 순종이었다.

  이렇게 순종하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원조가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즉시 순종하는 믿음이다. 이처럼 참 믿음은, 언제나 순종의 행동을 낳는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우리는 주님을 믿는 동시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하였다.

  믿음의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순종의 수업이다. 하나님은 순종을 가장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신다. 따라서 순종은 축복의 비결이다.

  (신28: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그리고 약속하신 모든 복을, 신28:3-14에 기록했다. 또 순종하지 않는 자가 받을 저주도 기록되어 있다(28:15-68).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 복을 받을지, 불순종하고 저주를 받을지 선택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만일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를 못했고, 그 후손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창대하지 못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했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와 그의 후손을 위한 기업으로,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순종이 귀한 이유는, 순종 속에 구속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 한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죄가 시작되었고, 그 죄 때문에 이 땅에 저주와 사망, 고통이 임했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인류가 죄 아래 놓이게 되었다.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을 보내, 아담의 범죄에서 구속하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하셨다. 저주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온 인류는 죄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한 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

  순종은 어렵다. 그래서 귀하다. 순종보다 불순종이 훨씬 쉽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말을 배울 때 ‘엄마’ 다음으로 빨리 배우는 말이 ‘싫어’라는 말이다. 불순종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에게 불순종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타락한 본성 속에, 불순종하는 성향이 있기에, 배우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

  순종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예수님의 본성이다. 그래서 순종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기도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사랑을 받는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도 바울은 행복한 결혼생활의 비밀을 엡5:22-33에 기록하고 있는데, 그 첫째 비밀이 복종이다. 사랑보다 복종이 먼저다. 사랑 받는 비결은 순종에 있음을 기억하자.

2.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9).

신뢰는 행복의 비결이다. 행복은 관계에 있는데, 관계를 잘 맺으려면, 신뢰가 필요하다. 믿지 못하면 불행해 진다. 불신은 병이다.

  어떤 나무꾼이 있었다. 하루는 어쩌다가 그의 도끼를 잃어버렸다. 아무래도 옆집에 사는 아이가 의심이 갔다. 그 아이가 훔쳤다는 생각이 들어,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의 얼굴표정과 하는 몸짓이, 자기의 도끼를 훔쳐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나무꾼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자기가 잃어버렸던 도끼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무꾼은 자기 실수로, 그곳에 도끼를 떨어뜨려 놓고서는, 괜히 옆집에 사는 아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아이를 다시 쳐다보았더니, 그 아이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너무나도 순진한 모습으로 보였다. 그 아이의 얼굴 표정이나, 하는 몸짓으로 보아서,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댈 아이로는 전연 보이지 않았다(여씨춘추 중에서).

  애당초부터 이 아이는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은 그 아이를 바라보는, 나무꾼의 시각이 달라졌을 뿐이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가 고쳐야 할 고질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이야기다.

  미국 선교사님들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 때, 의료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양반이 선교사님을 찾아왔다. 그의 몸에는 심한 종기가 돋아있었다. 그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염치 불구하고, 선교사님을 찾아와, 아픈 부분을 선교사님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부탁을 했다.

  “선교사님, 보시다시피 제 몸에 심한 종기가 생겼어요. 듣자하니 선교사님께는 좋은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체면 불구하고 찾아왔으니, 저를 좀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님은 그에게 페니실린을 나누어주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최근 개발된, 아주 좋은 항생제니, 이것을 드시면 몸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라고 했다. 양반은 페니실린을 받아들고서 물었다. “약값은 얼마입니까?” 선교사님은 선교할 목적으로 이렇게 답변을 했다. “공짜입니다. 그냥 드릴 테니까, 집에 가셔서 드십시오.”

  그는 약을 받아 쥐고 나오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다. “공짜로 주는 것을 보니까, 아무래도 이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인가보다.”하면서, 그는 그 귀한 약을 모두 길거리에 내버렸다. 의심이 일어나서 그 약을 먹지 않았으니, 병이 어찌 쉽게 나을 수가 있었을까?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다른 대가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신다. 믿으면 산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죽는다. 멸망할 수밖에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간 일도 마찬가지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다. 그 땅을 정탐하고 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은 너무 아름답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하신 땅이니,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고 보고해서, 그들은 믿음으로 그 땅을 밟았다.

  그러나 다른 열 정탐꾼은, 불신앙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악평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다. 우리는 그 땅에 올라갈 수가 없다.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 때문에, 축복의 땅을 밟지를 못했다.

  자기들만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처럼 믿음을 상실하면 참 불행해진다. 자기만 불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만 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시각을 갖게 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면서 기다렸다. 아브라함은 장막을 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지만, 언제나 그 땅 안에서 맴돌았다.

  비록 기근에 의해서, 애굽 땅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다시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왔다.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큰 민족을 이루어 400년 후에 돌아왔을 때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믿음이다.

  우리는 어떤가? 너무 조급하지 않나? 축복도 당장 받아야 되고, 기도 응답도 당장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일생은 고사하고, 10년, 아니 1년도 제대로 기다리지 못하지 않는가? 아브라함처럼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란다.

3.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다(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그 성은 영원한 천국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지상의 낙원을 꿈꾸지 않았다. 땅엣 것에 집착하지 않고, 위엣 것을 바라보며 살았다.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이 땅에서의 안락한 삶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다.

  내세와 천국이 존재함을 확실히 믿는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그렇게까지 매달릴 이유가 전혀 없다. 제주도에서 제가 몇 달 동안 안식할 때, 모든 살림살이를 다 갖추었다면, 이것은 딴 살림을 차렸다는 말이지, 몇 달 동안 거하는 나그네의 살림이 아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살면, 이 땅의 고난, 불편함, 부족함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다가 간다. 나그네는 머무르지 않고 떠나야 한다. 이 땅에 너무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지 말자. 미국의 강철 왕 ‘앤드루 카네기’가 남겼던 유명한 말이다.

  “부자로 죽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돈을 벌기만 하고 남겨놓고 죽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자기 말대로, 그가 벌어 놓았던 많은 돈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죽었다.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 왕 헨리 포드, 강철 왕 앤드루 카네기를 존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사업에서 크게 성공했기 때문인가? 돈을 많이 벌은, 대재벌이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자선사업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고 값있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살아가기 바란다. 아브라함처럼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해 하나님의 손 붙들고 날마다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 추수감사절에 물질적으로 돕는 것은 물론이고, 대청소와 어르신 목욕, 머리 손질, 몸으로 봉사하자.

  아브라함의 간증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을 갖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자.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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