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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사람들(요한의 형제 야고보)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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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하는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맞춰보기를 바랍니다. 그는 금속가공 혹은 땜질, 놋쇠질 이라고 불리 우는 유업을 아버지로부터 이어 받았습니다.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58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그의 글을 통한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회심할 때까지 악담, 욕지거리, 거짓말 등 온갖 죄악과 악행을 저지르며 자신의 삶을 비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5살 때 어머니와 13살 된 동생이 한 달 안에 세상을 떠났고, 이 슬픔이 가시기 전인  어머니가 죽고난후 한 달 만에 아버지의 재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이 사람이 속한 공동체는 공격을 받아서 무차별 살육되는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21살 때 결혼해서 10년이 되었을 때 아내가 죽었고, 그 아내가 죽었을 때에는 4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중 첫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60평생 중 12여년 이상을 신앙을 위해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기회가 있었지만 평생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설교의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그리하면 이다음에 하늘 아버지의 얼굴을 평강가운데 뵐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집필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이 세계에서 성경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천로역정을 쓴 바로 존 번연이라는 사람입니다. 절망적이요 비관적이였던 자기인생가운데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고난과 고통의 연속 속에서도 믿음 안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뿐만아니라 많은 시간이 흘러간 지금도 그의 생애와 그의 책 천로역정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책으로 놀라운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존 번연으로 하여금 절망에서 소망의 삶으로 극적인 변화의 삶을 살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극심한 고통과 절망적인 삶속에서도 인내하며 살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며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일깨우는 그의 삶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여러분! 여러분 삶에 변화를 원하십니까? 이대로 내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가슴에 가득 합니까? 때로는 고난과 이유 없는 고통가운데서도 절망 하지 않고 소망을 노래하며 살아갈 힘을 얻고 싶습니까? 나아가서 나의 삶의 승리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의 한계를 이기도록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내 인생이 존 번연처럼 변화될 뿐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끼며 후회하지 않을 그 삶의 원리를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존 번연이 붙들었던 그 소망을 나의 소망으로 삼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제자인 야고보를 주목하십시오. 진정한 변화의 사람 야고보를 만나보십시오. 세상의 욕망을 영적인 것으로 승화시킨 야고보의 열정에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야고보로 하여금 그의 삶을 지탱하며 붙들어준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오. 자기를 바꿀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 분석해보십시오.

남을 심판하기를 좋아했던 그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남을 비판하기를 즐겨했던 그가 격려자가 되었습니다. 남을 지배하기를 사모했던 그가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변하기전 그의 삶에서 어부로서 그가 잡은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낚는 어부로서 그가 잡은 모든 사람들은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죽이는 자가 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삶의 이유는 무엇 이었습니까?

첫째 야고보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19-20에 보면 야고보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아버지 세배대와 품꾼들 그리고 배와 자기가 하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야고보가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버릴 수 있는 것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린 것입니다. 삶의 도구인 배를 버렸습니다. 자기의 직장과 하는 일을 버렸습니다. 자기의 지시를 받고 자기를 도와주던 품꾼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믿음을 두 개의 동사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바로 버리는 것과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개인의 변화나 공동체의 변화 그리고 역사와 민족의 변화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버리는 역사가 선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 1이하를 보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버리는것 입니다. 그리고 4절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운명이 바뀌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을 십자가에서 버릴 때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버린다는것은 운명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릴 때 역사가 바뀌어 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까? 고향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잔뼈가 굵은 삶의 터전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근거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근본적인 목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네 친척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지금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과 환경, 나에게 지금도 영향을 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즉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아비는 나에게 소중합니다. 바꿀 수 없습니다. 그만큼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관과 미래를 위해서 그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주인을 위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나 공동체는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었을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룻은 자기의 친척 본토 땅과 그곳에서 보장된 자기 미래를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를 때에 그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따를 때에 하나님의 역사무대에 오르는 뿌리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에 진정한 변화가 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16:24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운명을 바꾸며 삶의 결과를 바꾸기를 원한다면 버리라 라는 명령으로 우리를 권면합니다.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버리십시오.

승진이 너무 늦어 불만이 많던 어느 중학교 선생님이 어느 날 교장선생님에게 이렇게 따졌습니다. ‘ 내가 이 자리에 몇 년이나 있었는지 아세요. 무려 25년입니다’ 이때 교장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 25년이 아닐세 자네는 1년 동안만 있었네. 그것을 무려 25번이나 반복한 것뿐 일세’ 버릴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새로운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버리셨습니까?

버리고 나면 많은 자유가 주어집니다. 보여지는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선택하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불편하거나, 나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나에게 불필요한 것이어서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의 영광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스라엘백성들과 고난을 택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위해서 고난의 상처를 버리고 용서를 택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따르기위해 자기의 연약함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겨졌던 것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따랐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여리고성 앞에서 자기들의 판단과 상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때에 그 견고한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에 새로운 역사는 일어납니다. 새로운 시작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이루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결단입니다. 과거의 상처도, 내가 즐거워하던 것도, 내가 옳다고 믿던 것도, 내가 사랑하던 것도, 나를 누루고 있던 근심과 걱정도, 내가 이루려고 하던 꿈도 다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택하십시오. 거기에서 진정 내가 얻고 누릴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변화를 위한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야고보의 삶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까?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했습니다.

야고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누가복음 9:51-56에 잘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가까운 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날씨는 덥고, 몸은 지쳤습니다. 가야할 길은 멀었습니다. 그래서 지름길인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가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마을의 사람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너무 분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땅을 버리지 않고 수가성의 한 여인까지도 귀하게 여기셔서 귀중한 복음을 증거 하시고 사랑하시는데 그 예수님께서 피곤하셔서 그 땅으로 지나가려고 하는데 거절하였습니다. 그때에 분노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분노하여서 다음과 같은 것을 요청합니다. 54절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저들을 싹 쓸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성경의 저자들은 바로 우레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문제해결방식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존재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분노로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입니다. 거절당하는 상처를 견디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인정해주어야 하고 사랑해주어야 하고 받아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않을때 분노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방식에는 긍정적인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방법은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월등하고 잘 해서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방법은 저 사람의 약점과 부족한 면을 헐뜯어서 끌어내려서 자기가 그 위치에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쓰는 방법이 바로 부정적인 방법입니다.

바로 야고보는 이런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죽이기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 야고보의 삶의 자세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즉 자기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때에 자기 두 아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리 잡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세배데의 아내는 경제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돕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가지고 있었고 또 요한복음 18:15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때에 ‘ 시몬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뜰에 들어가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다른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중 하나며 대제사장과 잘 아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으로나 사업적으로 꽤 영향력이 있던 집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보다 높은 자리, 편한 자리, 존경받는 자리, 지배하는 자리,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의 방법을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기위해서 드러내놓고 요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막10:3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 44절에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45절에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은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야고보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분노로 일을 하며, 돈으로 풀어가는 자기방식을 포기합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료도 공동체도 생각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바리새파가 풀어가는 방식인 전통신앙의 고수와 강화나 사두개파 사람들이 행했던 정치와의 결탁이나 에세네파의 제도부정과 현실도피 그리고 열심당의 체제 전복 등의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주님의 방법과 비전을 자기 꿈으로 받아들이고 삶속에서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분노와 강포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로 그 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 요한은 끝까지 살아남아 진정 예수의 어머니를 섬기고 복음을 섬기며 섬김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가 잃어 버린 것이 있다면 자라나는 세대를 섬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돈벌이의 대상으로, 청년들은 정치의 희생 제물로, 청소년들은 시행착오의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진정 이들을 섬기는 정책이나 배려가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습니다. 돈이 되고 유익이 되면 무엇이든지 하는 이 땅의 논리 앞에 교회는 침묵하면서 진정 이들을 섬기고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열어가야 할지를 잊어버린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이세상이 되나 저세상이 되나 마찬가지라는 의식이 깔려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이 거짓 앞에 진리를 내어준 아픈 역사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침해받는 교권을 더 확고하게 해야 하는 주장도, 정치와 타협해서 교회의 위상을 정립해야 하는 것도, 아예 정치를 떠나서 침묵하고 정치와 종교가 완전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이 체제를 붕괴하고 새로운 정치와 경제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중요한 방법이며 효율적인 방법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섬김과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내 생활 속에 이것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주님의 방법을 내가 순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에 무겁게 다가오는 찔림이 있었습니다. 제가 밤늦게 들어가거나 지쳐서 들어가면 다른 것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텔레비전 채널 돌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에게는 쉼이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내 자녀를 위하는 배려나 섬김의 모습일까 하는 자책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형식적이라 할지라도 가족들과 함께 대화하고, 책을 보며 집안일을 돕는 모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전부터 해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효율적인 것이라고 해서 따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보다도 익숙해진 나의 방식과 세상의 방식보다 주님의 방법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물질과 시간과 젊음을 희생하지 않으면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새롭게 살아나갈 때 진정한 변화를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변화로부터 이웃과 역사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주님의 방법인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주님이 씻기셨던 제자들의 발을 씻는 삶의 방식의 변화 없이는 내가 진정 사모하는 삶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이 무기력해보입니다. 섬김이 나약한 자들이 취하는 삶의 자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 속에서 우리는 변화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변화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변화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방법, 이 세상에서 말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방법인 섬김을 순종함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야고보의 놀라운 삶은 어디에서부터 왔습니까 ?
바로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1-2에 보면 야고보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헤아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헤롯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는 자기의 인기와 정치적 입지를 굳게 하기위해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교회를 박해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한 사람을 시범케이스로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주목된 사람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 결심한 바를 이루기위해서 배와 그물 그리고 일군,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것을 이루기위해서 진정 섬기는 삶을 살기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진정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렇게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자기변화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소망이었습니다.

이 소망은 야고보를 바꾸었습니다. 이 땅에서 높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 더 귀하고 가치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땅이 될 때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은혜가 넘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확고한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이 땅에 가치관을 두고, 의미를 두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호주 유스코스타와 이민교회집회를 통해서 참 소망이 무엇인가? 어디에 참된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한 분을 한 분 만났습니다. 경기고등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머리가 좋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에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매너나 사업 감각도 뛰어나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가 무당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이루지 못한 한도 많았습니다. 이민 와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우울증으로 집을 나갔습니다. 두 아들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들하나는 그렇게 명석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한 아들은 청소년인데 자기의 분노 때문에 칼을 들고 와서 죽이겠다는 일로 경찰이 무려 7번이나 출동했습니다. 50중반을 바라보는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눈물과 한숨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부는 이루었는지 몰라도 정작 이 집사님의 삶에는 탄식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는 한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하나님 안에서 만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확신이 그 집사님의 삶속에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리잡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 저도 이 나라를 보면서, 젊은이들을 보면서, 기성세대를 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의 말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 결국 이 민족은 이대로 갈수밖에 없는가요? 진리가 무엇인지는 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깨닫게 되나요? 우리 삶에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한 번사는 인생 속에 왜 이 땅에 고난과 전쟁과 아픔만이 가득 할까요? 인간은 서로 싸우며, 원망하며, 미워하며, 갈등 속에 살아야 하나요? 우리 마음은 왜 이리 격렬한 전쟁터로 날마다 남아있습니까? 탄식의 절규가 나옵니다.

이 땅에 진정한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통령이 바뀌는데 있을까요? 한반도가 통일되는데 있습니까? 각 자가 꿈꾸는 그 이념과 신념이 이루어지는데 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이 한반도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습니다. 한국인의 철학 속에 깊게 잠재된 불교도, 조선왕조500년을 이어온 유교도 열강의 패권다툼 앞에 이 한반도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일본의 합방이 시작되고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절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나라의 이 소망은 이 땅에 절망한 젊은이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포기한 희망의 노래가 이 땅에 다시 울려 퍼지게 만들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주신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이 소망이 3.1운동이 되고, 이 소망이 기독교학교가 되어 미래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고, 이 소망이 우리민족의 패배적인 사고와 절망을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이 땅에 다시 소망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하나님나라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의와 희락과 화평의 나라말입니다
이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바로 야고보로 하여금 어두운 이스라엘의 역사 앞에 새로운 삶을 써가는 회복의 역사요 치유의 역사요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 오랜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가 체포 되었을 때 그를 기소한 최고담당관이 야고보의 용기와 그 자제력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 분명한 믿음에 감동되어 자신도 세례받기를 간청하여 교회의 일원으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다가 결국은 야고보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굳건히 붙들고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위해 나의 삶에 물질과 시간과 힘을 사용한다면 내가 구태여 남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삶을 일으켜 세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한 사람 존 번연의 삶은 오고가는 역사 속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시간과 공간속에 새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눈물과 가꾸는 희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야고보처럼 그 일군으로 쓰임 받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잃어버린 내 삶의 꿈을 찾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버리십시오. 내가 원하던 것, 내가 익숙한 것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주님의 말씀과 방법을 나의 삶속에 사용하십시오. 나아가서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갈망하십시오. 이 소망은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찬양사역자인 고형원형제가 ‘나는 꿈꿀 수없는 세상이 싫어요’ 라는 절규를 남기고 자살한 한 고등학생과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위해 지었던 ‘보리라’ 라는 찬양을 우리가 함께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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