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경주를 잘하려면 (히 12:1-3)

  • 잡초 잡초
  • 259
  • 0

첨부 1


오늘 봉독한 말씀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육상 경주에 비유합니다. 관중석에 수많은 사람이 앉아서 혼신의 힘을 다해 달음질하는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현실의 육상경주와 다른 점이 있다면,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경기를 관전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고 모두 다 시합을 성공리에 끝낸 선수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승의 면류관을 쓰고 앉아서 지금 한창 달음질에 열중하고 있는 우리들을 내려다보면서 격려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기나 그렇지만 경기에 참가했다고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 규칙대로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만 상을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저는 신앙의 경주를 잘 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써 피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시험을 당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 서 광야에 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말이 40일이지,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드시지 않은 채 그 긴 기간을 견디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 때 주리신 예수님에게 마귀가 다가와서 시험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저는 지난번에 성지순례를 갔을 적에 버스를 타고 광야를 지나면서 광야가 어떤 곳인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정말로 그곳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습니다. 누런 흙으로 된 산과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게다가 누런 빵처럼 보이는 돌멩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누런 돌멩이들을 보면서 ‘아, 저 돌들이 마귀가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한 바로 그 돌들이로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았을 적에 즉각적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면 물러가야 할 텐데, 마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생각해 보세요. 유월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절기가 되면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예루살렘은 붐볐습니다. 그러한 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사뿐히 땅을 밟고 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11)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고 한 시편 91편의 이 예언을 떠올리고 예수님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을 겪지 않고서도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르시기를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물러서지 않고 세 번째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한번만 절하면 천하만국을 너에게 주마’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어찌 마귀에게 절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몇 달 앞둔 때에, 예수님은 비로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하였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때에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가 아닙니까? 베드로는 제자로서 주님이 죽게 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사명을 훼방하는 것이므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시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토록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던 유다가 입맞춤으로 주님을 적들에게 넘기다니…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을 당하되 시험에 들지 않으시고 다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시험이 없을 리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매년 평균 26 차례의 태풍이 엄습한다고 합니다. 매년 태풍으로 인해 입는 인적, 물적 피해가 어마어마합니다. 그렇지만 태풍 때문에 못살겠다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방비를 잘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 다가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고 했습니다.

사도의 권면과 같이,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험을 통해서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태풍에 대비하듯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혹, 신앙생활을 하다가 무슨 이유로 시험에 들어서 주저앉는 신자들을 봅니다. 더구나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을 이유로 시험에 드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교회가 그럴 줄 몰랐다. 믿는 사람들이 그럴 줄 몰랐다’는 말을 듣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따라서 점점 더 성숙한 인격자가 되고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의 교회는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삶을 살기 위해서 모인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은 회개한 죄인들이지 천사들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자격 조건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고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나 신자들에게 기대를 가져야 하지만 완전함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도 완전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이 완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서 서로 간에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쓰고 애쓸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면 반드시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훌륭한 인격자요 신앙심이 좋은 분들입니다. 두 분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고 그 후에는 선교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두 사람은 마가를 선교여행에 데려가는 일로 심히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그처럼 훌륭한 분들이 서로 양보하고, 화합하지 않고 다투고 갈라서다니, 그러나 우리는 두 사도를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갈라선 사건은 그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실수한다면 상대방도 실수할 수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람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비결 중 하나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사실은, 우리는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까지는 시험을 당하는 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시험이 없는 곳은 무덤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큼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에 져서 넘어지면 그만큼 신앙에 손해를 입고 후퇴하게 되지만, 시험을 이기면 신앙이 한 단계 자라납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신앙의 성숙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여러 가지 시험을 고루 당해 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이 다가올 때 시험에 들지 않고 기어코 그 시험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이겨내면 또 다시 비슷한 종류의 시험이 다가올 때 당황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험이 다가올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시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영적 성숙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험을 이기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이름을 갖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시험을 다 이기셨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하여 본문에 보니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증언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끝까지 참아내신 비결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생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즐거움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그것은 멸망 받을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써 맛보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적들에게 붙잡히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을 적에 이르시기를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셨기에 어떤 어려운 시험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하는 원칙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시험에 들어 믿음에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고난의 십자가를 참아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가장 존귀하고 권세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에 복종하신 예수님에게 영광스러운 상급을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는 이 같이 말씀합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극한 상급을 주셨듯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도 큰 상급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히 11:6).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시험을 통과할 때라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상 선수가 푯대를 바라보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음질하듯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은 푯대를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육상선수가 아무리 빠르게 달릴지라도 골인 지점을 잘못 알고 달린다면 결코 우승을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의 목적을 올바로 알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열심을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신자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왜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도에서 시험에 들어 탈락하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앙의 목적 곧 푯대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는데, 허탄한 세상을 바라보니까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시험에 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돈궤를 맡을 만큼 신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을 죄인들의 구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시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을 때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세상적으로 성공, 출세할 줄로 알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그의 청을 물리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무속적 기복신앙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자들 가운데는 예수 믿는 목적을 현세적인 축복을 받는데 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목적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보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믿는 목적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 외의 복들은 덤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를 거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믿는 목적을 복 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의 구원은 덤으로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믿어도 기대한대로 복을 받지 못하면 시험에 들어 주님을 떠납니다.

더구나 요즘은 이 같이 어리석은 신자들을 노리는 자들이 많이 나와서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사람들을 미혹해서 끌어갑니다. 예수님은 말세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막 13:22)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예언이 벌써 이루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데, 성경을 도외시하고 신비한 이적과 기사를 좇다보니 악한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약 1:14).

성도들이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여 받아 누리는 것은 권장할 일이지만, 자기를 자랑할 목적으로 은사를 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자기를 자랑하라고 하심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무슨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에 덕을 세우기는커녕, 자기 자랑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놀라운 이적을 행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비체험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에 따라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예수 믿는 목적을 바로 알고 있는 신자들도 방심하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는 한 때 열심히 복음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마음에 세상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사명도 저버리고 사도 바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데마가 예수님을 푯대로 삼았을 때는 복음을 위한 충성된 일군으로 살았지만, 그의 시선을 돌이켜 세상을 바라보자 그만 믿음의 경주에서 낙오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타락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다 세속화된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세상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믿음의 경주에 힘써 나가야 합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찬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앞을 향하여 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푯대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려면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욕을 들으셨고, 침 뱉음을 당하셨고, 뺨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당장에라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악인들을 멸하실 수도 있고, 열 두 영 더 되는 천군들을 명하여 저들을 제압하실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면 죄인들의 구원을 이룰 수 없기에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인내가 있었기에 저와 성도님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내가 중요하기에 성경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도들은 누구나 믿음의 경주에 나선 선수들입니다. 선수들이 할 수 있는 대로 가벼운 옷차림을 하듯이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이 다가올 때 넘어지지 말고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항상 시험에 대비하고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푯대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에 전심전력을 다하심으로 모두 다 심판장이신 주님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