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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실천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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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서 2:14 ~ 26)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4-26

  사람은 영적인 존재여서 언제나 종교를 가집니다. 태고로부터 시작해서 우주여행을 하는 오늘날까지도 인류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 18장을 보면 인류의 종말이 올 때도 마지막까지 종교가 있고, 적그리스도는 세계 종교를 하나로 묶어서 정치에 이용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큰 바빌론의 멸망 이야기지요.

  사람들이 갖는 종교에는 다양함이 있습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또는 힌두교를 믿거나 우상, 금은목석 등 무생물체를 신으로 섬기거나 미신을 믿는 등 다양한 신앙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무런 종교가 없는 무교(無敎)”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무교라고 하는 사람마저도 따져 보면 신앙이 있습니다. 자기 믿음이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좀 덜 하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이나 믿어라!”고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요. 어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도 사실은 신앙인입니다. 사람은 감기만 걸려도 열이 나고 몸져눕는 연약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게다가 한국 사람이라도 한국 땅조차 다 못 가본 사람이 흔하고, 이 우주에는 우리와 같은 우주가 10억 개나 있다고 하는데 이 넓은 세계를 제대로 탐험해보지 못한 작은 인간 하나가 땅 위에서 “하나님은 없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 이런 신앙고백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개인의 선택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없다”라는 단정적인 말은 아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주만물을 관찰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생각합니다. 어린 아기를 들여다보며 이 신비한 생명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경이롭게 여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디자인하셨습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우주만물을 통해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이 생기면 그 믿음은 반드시 믿음에 따르는 행동을 유발합니다. 믿음은 있으나 그에 합당한 행동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과 행동이 있는 믿음입니다. 선(善)이 없는 믿음과 선이 있는 믿음입니다. 생명을 죽이는 믿음과 생명을 살리는 믿음입니다.

  최근에 로마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슬람 종교에 대해서 한마디 했다가 이슬람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잘못했다고 아무리 빌어도 용서할 수가 없답니다. 교황 바오로 2세의 암살을 시도했던 사람이 “터키에 오지 마라. 오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종교인데 이처럼 죽이는 종교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믿음인가에 따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유익이 있고 선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죽은 믿음’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14절) 믿음은 반드시 유익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으로는 믿으나 행동이 따르지 않고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무익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가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지…. 예수 믿는 사람이 저러니 교회가고 싶지 않아.” 예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하는 때도 있습니다. 행위가 안 따라 주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No good”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있으나 유익도 선도 따르지 않는 믿음을 ‘무익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구원이 없는 믿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선이나 유익이 없는 믿음은 아마 가짜 믿음일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내 믿음은 참된 믿음인가, 유익한 믿음인가, 구원의 믿음인가 늘 점검해야 합니다.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는 반드시 행동이 따릅니다. 실천이 있습니다. 선이 나타납니다. 사랑이 보입니다. “하나님, 나의 믿음이 행동이 따르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을 두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반드시 이웃 사랑이 따라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예수님 제자가 된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선과 유익이 나타나고 사랑이 있습니다.

  15, 16절에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헐벗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인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옷 잘 입고 춥지 않게 하세요), 배부르게 하라(끼니는 거르지 마시고 꼭 제 때 잡수세요)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런 사람을 보면 빵을 하나 주면서 “내 주머니에 이것 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드시지요”하는 것이 실천과 사랑의 행동이 있는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북한에는 못 먹고 굶주리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금년에는 태풍이 와서 먹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잘 못 먹으니까 젖이 부족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굶고 병들고 말라있습니다. 북한의 굶주린 백성들이 참 불쌍하지요. “하나님, 저 아이들을 먹여 주옵소서.” 그럴 때 여러분이 5천원을 주면서 “이거 가지고 우유 좀 사서 주십시오” 하는 것이 행동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자가 참된 예수 믿는 사람이요, 행동 있는 믿음이 구원 받은 사람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최근에 베푼 선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배고픈 자에게, 연약한 자에게, 헐벗은 자에게, 가난한 자에게 마지막으로 선을 베푼 지가 언제입니까?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주중에는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선과 유익을 주며 사는 것이 참된,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행위가 없으면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선을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선을 베풀고 사랑을 행하고 친절을 보입니다. 참된 믿음은 유익을 나타냅니다.

  믿음은 있는데 행동이 없는 믿음, 즉 머리로만 믿고 행동으로 선을 베풀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 구원이 없는 믿음”을 넘어 “마귀 같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마귀가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마귀가 더 잘 믿을 수 있나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처음 창조 때부터 알아요. 우리보다 神論을 더 잘 압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악을 행합니다. 파괴 하고 거짓과 음란과 온갖 종류의 악을 저지를지언정 하나님을 믿어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 같은 믿음”입니다.

  20절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또한 “헛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허탄한 사람아”(어리석은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쓸데없는, useless) 알고자 하느냐. 어리석은 자의 아무 유익이 없고 쓸모도 없는 믿음은, 그저 머리로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무익하고 헛된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배격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요, 우리의 믿음은 행동이 있는 믿음입니다.

  21절부터 26절에서는 살아있는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선을 베푸는 믿음입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유익한 믿음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옷이 없는데 말로만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음식을 잘 잡수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주고 옷을 주는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 의료 선교팀이 다음주에 중국에 갑니다. 여러분 집에 입지 않는 옷들이 있으면 가지고 오세요. 그것을 모아 중국의 없는 사람들을 도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마땅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는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한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배고픈 자에게 주라”고 하면 주는 믿음입니다.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칼을 들어 아들을 막 죽이려 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손대지 마라. 네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순종하려고 애쓰는지, 네 순종의 믿음을 내가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3절) 순종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셋째는 살리는 믿음입니다. 죽이는 믿음이 아니라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믿음입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들고 힘들어하는 자를 격려하고 살아나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라합의 믿음입니다. 붙들려 죽게 된 스파이 두 사람을 라합이 숨겨서 살렸습니다. 여러분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사람입니까? 낙심 시키는 사람입니까?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분노를 해소하는 사람입니까? 죽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살리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아무쪼록 생명력이 솟아나도록 사람을 살려내는 말과 행동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작년 10월, 우리는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걷기 대회”를 했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우유 1트럭을 보내기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시동이 걸리고 보니 규모가 점점 커졌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물었어요. “목사님, 우유 한 트럭이 얼마입니까?” “ 1천5백만 원입니다.” “제가 한 트럭을 하겠습니다.” 다른 분이 또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도 한 트럭 하겠습니다.” 분유 한 트럭 보내겠다고 시작한 것이 점점 커져서 모두 17트럭을 보냈습니다. 작게 시작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니까 이렇게 커진 것입니다. 너무너무 감사했어요. 그 분유는 북한 6개 도시의 많은 고아원과, 여러분이 영상으로 보신 굶주린 어린아이들에게 모두 나눠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금년에는 홍수가 나서 작년보다 피해가 더 크다고 합니다. 세계 식량기구는 “북한의 어린 아이들이 가장 위험하다. 이 아이들을 먹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발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금년에 한 번 더 북한 어린이를 위해 분유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분유를 노동당 당수가 먹지는 않겠죠.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에 분당구청 앞 잔디밭에서 모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께서 “목사님, 혼자 하지 마시고 우리 교회와 함께 합시다” 하셨어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우리 동네에 계세요. 두 교회 대표들이 모여 협의를 하면서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CTS 방송국에서도 한국의 최고 가수들을 초빙해서 스테이지를 만들고 큰 축제를 하자고 합니다. 30분 동안 프로그램을 찍어서 방송을 하고 동시에 TV로도 모금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교회와 할렐루야교회, CTS 방송국이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저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소식을 듣고 “왜 당신들끼리만 합니까? 우리도 같이 합시다” 하고 워싱턴의 한 교회에서 1억원을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작년에는 젊은 가수, 이수영 씨가 음악회를 해서 1억을 헌금했는데 올해는 다른 가수가 또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많은 분유를 북한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은 출발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시면 우리가 그저 마음으로만 믿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이처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여러분 모두가 참여하십시오. 아이들도 데리고 오세요. 지나치게 잘 먹어서 비대해진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좀 적게 먹이고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보내세요. 예수 믿는 아이들이 배고픈 아이들, 헐벗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도 하루 남을 위해 걷겠다!”는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 어릴 때부터 남을 위해 노력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누가 훈련을 시킵니까?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이번 걷기 대회 참가자는 한 가지 자격이 필요합니다. 두 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오십시오. 가서 북한의 아이들을 위해서 한 번 걸으십시다. 날씨도 좋은 계절에 건강도 다지고 축제에도 참여하고 북한의 아이들에게 우유도 보낼 수 있는 참 축복된 시간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미국의 주간지 “US News and World Report”에서 ‘행복’이라는 주제를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정신력이 강해야 된다. 둘째, 자부심이 있어야 된다. 셋째, 탄탄한 결혼 생활이 있어야 된다. 넷째, 가족간의 유대가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친구관계가 좋아야 한다. 여섯째,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이지요. 일곱째, 희망을 가져야 된다. 여덟째,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도와준다.

  이번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여러분 모두가 다 행복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어린 아이들이 행복해지도록 도와줍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살아있는 믿음, 유익한 믿음, 선한 믿음, 사랑의 믿음, 실천의 믿음이 되어서 여러분과 제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나머지 인생에 늘 행복한 사람들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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