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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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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왕 하면, 토마스 앨버 에디슨 (Thomas Alva Edison)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1300개 이상의 발명특허를 얻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디슨이 어렸을 때에는 저능아로 취급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규학교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에게 용기와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꾸준한 연구를 하는 가운데 에디슨은 어느 날 기차 안에서 발명품을 실험하다가 그만 불을 내는 바람에 얻어맞아 가지고 귀머거리(농자; 聾者)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보십시오. 훗날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것은, 내가 귀머거리가 됨으로써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서 이같이 많은 발명품을 개발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귀머거리 됨을 감사했습니다.

1880년 06월 27일 출생하였으나 1882년에 시력, 청력 잃고, 말을 못하여 삼중고로 시달려야만 했던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여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이 불구 때문에 나 자신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내가 불구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고 고백했습니다. 자! 보세요. 저들은 한결 똑같이 잃어버린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귀머거리 됨으로써, 소경이 됨으로써, 벙어리가 됨으로써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감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불행에 처했든, 실패했든, 병들었든, 가난했든,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통과 실패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얻게 되는 것, 얻은 것, 그 소중한 것들을 생각할 때에 인생이 달라지고, 그럼 사람만이 참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아이작 월톤’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단 두 곳뿐이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심령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찬송가 해설가로 유명한 김경선 장로님은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은 또 다시 받을 길을 열어 놓는 것이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줄수록 양양인 사람에게는 다시 줄 마음이 없습니다마는 반대로 줄때마다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싶은 법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스펄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반딧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촛불을 주시고,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전기불을 주시고, 전기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주시고, 밤이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감사하는 사람만이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옥의 삶이 따로 있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며 그리고 미워하며 사는 그곳이 바로 지옥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 유명한 단테가 쓴 신곡 중 “지옥 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지옥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할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인 골로새서 2장에 보면, “너희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치유와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내용은 ‘열 명의 나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모두 치유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 중에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과 그렇지 못한 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우선 나환자들처럼 비참한 곳에도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본문 11절~12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어느 한촌에 들어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 한 촌이란? 나환자들만이 모여 사는 촌을 의미합니다.

당시 일단 문둥병이 들었다 하면, 사랑하는 가족들과는 격리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 가정에서 동네 밖으로 쫓겨나서 따로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죽어서도 따로 묻히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 출입은 물론이고, 성물을 먹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고요?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병'이라고 불리던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여기에 열 명의 문둥이들이 비참한 것은 고침을 받아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갈 소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기대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 있다고는 하나 결코 살아 있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주님께서 찾아가 주셨다는 것입니다.??놀라운 사실은 2천녀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도 역시 해당된다.'는 사실을 먼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절망에 빠져있던 나환자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거하는 촌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가까이 갈 수는 없고, 그저 멀리서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느냐고요?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들은 건강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성한 사람이 가까이 오려고 할 때에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돌로 맞아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입니까?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던 동네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나환자들은 주님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그야말로 부르짖었습니다.

무엇이라고 부르짖었습니까? 본문 13절에 보면,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이었습니다. 고쳐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불쌍히만 여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고침 받을만한 무슨 의라든지, 자격이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자신들임을 알았기에 긍휼만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긍휼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의가 있고, 자격이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전혀 무자격한 가운데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무자격한 가운데 그 은혜를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그저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뿐입니다. 저는 새벽마다 나를 위한 유일한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이여,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밤을 새워 가면서 부르짖고 기도한다고 하지만 줄이고 또 줄이면 ‘하나님이여, 나에게 긍휼히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의 이웃을,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여러분, 이 어두운 역사 속에서 죄악가운데 빠져 있는 이 백성들의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에, 문둥이들만이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까? 이것은 문둥이들이 아닌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여, 악이 가득함과 이 어두움, 이 죄악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이 땅에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긍휼만이 병든 이 땅을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오늘 구한 것은 오직 긍휼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비참한 곳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시며,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이제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만 합니다. 절망하지 말고, 나의 절만할 수 밖에 없는 가운데서 나를 사랑하사 찾아오시고, 도와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에게 다시 한 번 더 소망을 가지고, 기도의 입술을 여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문둥병자들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곳에 계십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분이 나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마저도 나환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이 여기서 시험이 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백방으로 손을 써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붙잡아 온 식모아이가 엘리사를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라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보따리를 짊어지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보십시오. 문밖에 나와 보지도 않고 그저 종을 시켜서 “돌아가다가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목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상 5:11절에 보면, “나아만이 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생각에는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에 손을 얹고 흔들어 병을 고칠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안수기도나 안찰기도를 통해서 병을 고쳐 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에이 쌍’하고 돌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실망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충직한 신하들이 '엘리사의 말씀을 순종하여 몸을 일곱 번 잠그라.' 간곡하게 권했고, 순종하였더니 어린아이 살처럼 여전하여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하등의 다를 바가 없는 상황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 역시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자기들 머리위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하신 다든지, 아니면 몸에 손을 얹고 안찰기도를 해서 고쳐 주신 다든지 했으면 모를까?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쳐 주신 다음에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셔야지, 이 상태로 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과학과 믿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지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은 ‘정확한 데이터’를 요구합니다. 0.1% 실패확률도 없을 때에야 움직이는 것이 과학입니다. 정확한 지식을, 합리적인 지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99.9%가 불투명 하다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싶으면 용기 있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해 보여도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해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보면,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바를 내가 알고”입니다. 내가 아는 바를 믿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해가 먼저가 아닌 믿음이 먼저입니다. 가령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타지방에 초행길을 간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그때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도일 것입니다. 요사이는 자동차에 ‘네비게이션’이 지도를 잘 안내해서 알려줍니다.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을 이해하고 가십니까? 아니면 안내해 주는 대로 믿고 가는 것입니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어떻게 이해하고 간단 말입니까?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 지도를 믿고 가는 것입니다. 믿고 갔더니 ‘역시나’였습니다.

그 다음 이제 두 번째로 갈 때에는 믿고 가는 것이 아닌 이해하고 가는 것입니다. 왜요? 이미 한번 갔다 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하찮은 진리도 믿어야 아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이해 안 된다고, 말씀이 이해가 안 된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부정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은,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 이해가 안 된다고 못가겠다, 못 믿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믿음을 통해서 지식에 이르고, 이해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들은 자기들의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른 것이 아닌, 저들은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가라는 말씀만 믿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저들이 믿는 바를 곧 이해하게 되었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14절 하반 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했습니다.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행동으로 옮기다가 중간에서 치유 받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들의 믿음이 저들의 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저들의 행동하는 믿음이 불치의 병에서 자유 함을 얻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병을 치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의학계에서도 널리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보스톤'에서 '하버드 의과대학 심신의학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심령치료의 효과와 역할”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었습니다. '다트머스 의과대학'의 '옥스만 박사와' 그의 연구팀이 95년도에 심장병 수술을 받은 환자 132명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술 후 6개월 이내에 사망한 사람 중에, 교회에 전혀 다니지 않은 사람의 사망률이 12%였고, 가끔씩 출석한 사람의 사망률이 5%로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신앙심이 깊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은 모두 건강을 되찾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분당 차병원 통증 센터'의 '최윤근 소장'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비신자들보다 마음의 안정을 얻어 스트레스 호르몬을 적게 분비하며, 면역계나 심혈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신경내분비 반응을 억제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듀크 대학'의 '해롤드 G. 코에니 박사'가 1700명을 대상으로 종교적 활동과 면역계 기능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해서 발표한 논문이 소개되어 화재를 모으고 있습니다. 코에니 박사는 "교회 출석률이 낮은 사람일수록 면역계의 부조화를 나타내는 '인터루킨'이 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믿음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강조하는 논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의학계에서도 이 놀라운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은 치료과정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술 후에 회복도 신자들이 빠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확신 있게 외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이요, 믿음의 결국은 곧 기적을 낳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약5:14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대로라면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들은 그대로 순종했더니, 그 결국은 문둥병에서의 자유 함이었습니다. 가라고 하실때 우리는 가면 됩니다. 가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고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지시할 땅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히11장에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떠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가 가나안의 주인공이 되며, 복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철저하게 순종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4절 후반 절에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하였으니 곧 순종하므로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사람만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러나 배은망덕한 곳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은망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15절에 보면, 열명 중의 한 사람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謝禮)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그 중에 감사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본문 14절 하반 절에 보면,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했습니다. “저희가”즉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건만 그중에 한 사람만이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섭섭함과 유감스러움이 있습니다. 17절에??“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는 고침을 받고 돌아오지 않은 그 아홉을 찾고 계셨습니다.

더구나 여기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그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참된 감사를 아는 이 사마리아인에다 이방인이었지만 본문 19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사람취급을 받지도 못했던 존재였습니다. 짐승과 이방인의 차이는 말귀를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짐승과 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짐승취급을 받던 사람은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하는데, 너희 사람 같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너희 유대인들은 다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다. 겨우 9:1의 감사비율이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니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열 명이 은혜를 입으면, 그 중에 한 사람 감사하면 다행이요. 열가지 중에 겨우 한가지 정도를 감사하며 산다는 성서적인 통계인 셈입니다.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준 셈입니다. 감사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일에다가 우선순위를 두지 않으면 감사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사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현대인들이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 갈까를 생각해 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몇 가지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먼저는,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당연한 생각 때문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하도 속을 썩이니까 어머니가 그 자식을 앞에 놓고 종아리를 때리면서 한마디 했더랍니다. 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내 혼자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 네 놈이 이러느냐고, 네가 정말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뭐라고 한줄 아세요? 누가 나를 낳으랬어요? 누가 어머니 보고 혼자 살라고 했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기르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하면서 오히려 대 들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대입니다. 오늘의 세대들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옛날에는 스승의 날이다 하면, 그래도 선물은 못할지언정, 마음만은 고맙게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러 드리며, 꽃다발이라도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내가 비싼 등록금 내서 공부하는데 은혜는 무슨 은혜냐는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월급을 받으면서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문입니다. 그래 요즘처럼 살벌할 때도 없었다고 합니다. 스승이 학생들에게 매를 맞아 가면서 가르친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학교가 스승과 제자의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 아닌,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사고파는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여기에도 당연논리가 적용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저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말입니다. 저 북한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햇볕정책 이후에 얼마나 북한에 갖다 주었습니까? 이쯤 되면 감사하다고 한마디 할 만한데도 이제는 핵무기를 만들어 놓고, 핵무기를 실험하고,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세계를 향해 큰소리치고, 또다시 핵무기 실험을 할 수 있다. ‘자꾸 억압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니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전혀 아니거든요?

그야말로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져 주었더니만 보따리 내 놓으라’는 식입니다. 보세요, 죽어가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쌀을 보내준다, 소를 보내준다, 의약품을 보내준다, 달러를 보내준다, 비료를 보내준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큰 소리는 저쪽에서 내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가 큰 빚이라고 진양, 빚 독촉을 받고 있습니다. 어째서 저 모양일까?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당연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곳에는 감사가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이십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당연하다는 생각이십니까? 그래서 감사가 없는 것입니까?

또 하나의 원인은 지극히 세속적인 그릇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속적인 가치관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에 따르면, 물질이 아닌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내가 말씀 속에 살며,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을 진정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가치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하면, 복은 욕망과 욕심 속에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과 욕심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서 감사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만 되나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원망과 불평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23)”그랬습니다. 감사하는 그가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본문에서 보여준 9:1의 감사,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혹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3대 절기 하면,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은 다른 말로는 ‘맥추절’ 또는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였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감사를 상기시키며, 가르치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는 더 중요한 현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손으로 수고한 일, 직장과 사업 터와 심은 것들을 거둘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절입니다. 남은 생애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런 뜻 깊은 절기를 맞이하여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한명의 사마리아인처럼 감사함이 회복이 되며, 그 감사가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로 인하여 좀 더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곳에도 계십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믿음이 있어야 긍휼과 은총과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이 시간 혹시 감사절을 통해 나의 삶과 신앙 속에 배은망덕한 적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기도합시다.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달려 나온 저 희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끝없는 욕망 가운데 붙들려 사는 저희들로 하여금??주님 앞에 나와서 더러운 마음을 씻고, 눈을 씻게 하셨으니 저희들의 심령 속에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 주사 감사가 메말라가는 마음이 회복이 되게 하시고, 범사에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심령, 가정, 직장, 사업 터, 학원이 되게 하시어 천국을 맞보게 하시고, 더욱 큰 은총을 체험하는 복된 나날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매일 감사생활의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게 하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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