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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추수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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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끝을 아는 지혜

주일학교 아이가 교회 갈 때마다 엄마에게 헌금을 받아 가지고 갑니다. 그날따라 엄마가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주면서 하나는 하나님께 헌금해야 된다. 그리고 예배 잘 드리고 돌아오다가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어도 된다. 아이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양 손에 동전을 들고 깡충깡충 뛰어 갑니다. 개울창을 지나가다 동전이 하나 떨어져 떼구르 굴러 시궁창에 빠졌습니다. 아이가 하는 이야기 "에잇, 하나님의 돈이 시궁창에 빠졌네."

하나님의 돈이 하필 시궁창에 빠졌을까요? 내 것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데 이 철부지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 시궁창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몹시 실망하고 있던 어느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하늘 보화창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한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창고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물었더니 "간구창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간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 보화 창고를 열고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빈 창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더 큰 창고가 있었는데 보화가 하늘 천정까지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고는 무슨 창고입니까?" "감사창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작은 은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나누어 주려고 쌓아 두었던 보물창고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도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물이 쌓여져 있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이 성도는 성전에 엎드려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감사했습니다. 하늘 보화가 신령한 은혜가 넘치게 되었더라는 얘기입니다.

감사엔 참 신비가 있습니다. 감사할수록 더 커지는 신비 말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축복을 원하십니까? 가정에 보화가 쌓이길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한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언젠가는 마지막 추수감사주일을 보내고 그 결실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출발이 있으면 종착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끝이 있는 것을 알고 삽니다. 역사는 나선형도 아니고 돌고 도는 윤회도 아닙니다. 다만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고 종착역이 있습니다. 이 역사의 방향에 따라 다만 인생은 한 번 지나갈 뿐입니다.

세상적인 일에는 연습이 있지만 인생은 연습게임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대로 종말이요 한 번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목적을 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이대로 좋고 이대로 만족할 것인가? 다시 한번 깊이 물어보아야겠습니다. 이대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인생엔 요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II. 부자와 지옥

오늘 아침 우리는 인생의 종착역에서 서서 절망적인 후회와 영원한 탄식으로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없이 살다가 저 지옥에 간 부자입니다. 그는 권세의 자색옷과 기름진 음식으로 연락하여 온 몸은 기름기가 번질거렸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는 부자집 대문간에 가마니를 깔고 개들의 헌데를 핥아주는 위로 속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때가 되자 부자도 죽었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인생의 종말이 저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천사의 손에 받들려 낙원에 갔고 부자는 음부의 고통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귓전에 부자의 고통과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여러분 누가 돈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가요.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라고 했던가요. 부자의 영화가 어디로 갔으며 부자의 재물이 무슨 소용이며 그가 누렸던 쾌락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본문의 부자는 얼마나 후회하고 탄식했을까요? 재물을 가지고 세상쾌락에만 젖어 살았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이제는 땅을 쳐도 소용없고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제 다섯 형제가 거기 있습니다.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고통받는 곳에 그들은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사람을 보내어 그들에게 "경고하게"하여 주십시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자기처럼 살고 있는 다섯 형제들에게. 그뿐입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부자처럼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소리를 진지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천당과 지옥은 성경이 가르치는 엄숙한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목은 현대에서 사리진 설교 제목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연극과 코메디 그리고 문학작품이나 농담에서 우리는 천당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천당과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들은 것이 언제입니까?

주일학교 다니는 학생에게 학교선생이 천국이 어디있고 지옥이 어디있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어린 학생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내가 가는 길로 가면 천국이 있고, 선생님이 가시는 길로 계속가면 지옥이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설교를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부자처럼 살고 싶으세요 아니면 나사로처럼 살고 싶으세요?" 그때 한 아이가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땅에서는 부자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서는 나사로처럼 살래요." 여러분, 그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III. 지옥에 간 이유?

1.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부유한 것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유함 때문에 영적무관심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아마 부자는 지옥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적어도 저는 나사로를 우리 집에서 추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잘못입니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잘못이다." 지옥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관심속에서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사람들이 간간이 지옥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지옥이란 단어를 완전히 떠나지 못할까요? 성령의 경고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누가 감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거기에 가야 할 사람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지옥이 없기를 바란다고요?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2.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옥에 간 제일 중요한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절을 보십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자기가 회개하지 않아서 그곳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틴 루터는 "내가 천국에 도착하는 그날, 천국문에서 하나의 현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현판에는 「오직 회개한 자」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3. 그는 입술신자였습니다

형식적인 신자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입술로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믿음을 가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때로 기도도 했고 교회도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세나 영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전혀 기억하지 않고 살았던 현실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4. 생명책에 그 이름이 누락되었기 때문에

또 한 원인은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흥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거지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사로입니다. 그러면 부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성경에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 때에는 누구의 이름이 더 영광을 얻었습니까? 틀림없이 부자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 거지의 이름에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했습니다.

부자가 죽었을 때 그의 이름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올 정도로 그 장례식은 호상이었습니다. 그는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의 일생을 투자하여 왔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빛내는 것이 그의 생애의 모든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날에 그는 하늘에서 기억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사로! 그 이름을 땅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이름은 주님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IV. 부자는 곧 내 모습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이 비유는 누구를 대상으로 말씀한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전후의 문맥상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16:14절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고 그리고 예수를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위선과 교만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네가 이 부자와 같다" "네가 지금 이 부자와 같은 심판의 길에 들어가고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사라질 것이며 무엇이 남을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돈 모으는 재미로 살던 어떤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용돈을 쥐어 주면서 맨날 "오늘 손해 많이 본다." 그러면서 용돈을 주었습니다. 할머니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손자의 손을 잡고 교회를 가는데 시장 모퉁이를 돌아갈 때 거지가 손을 내밉니다. 돈을 거지손에 곱게 쥐어 주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헌금주머니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넉넉한 헌금을 헌금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손자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오늘 손해 많이 보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할머니가 손자에게 얘기합니다. "손해 보는 것 아니다. 이것이 이득 보는 것이란다. 할머니가 몰라서 그랬지 주는 게 이득이더라. 할머니는 지금 천국에 투자하고 있단다."

V.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없는 인생입니까?

인생의 마지막 추수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1.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 믿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후회가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인생 전부가 후회스런 것뿐입니다. 이 부자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이생이 그의 전부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희 신은 배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빌3:19-20) 멸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이 한가지만이라도 똑똑히 알고 살면 내 인생의 코스가 바로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옷을 입으면 벗을 때가 있습니다. 감투를 썼으면 벗을 때가 있습니다. 산에 오르면 내려올 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인생을 영원히 후회없이 산 사람은 사랑하며 산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사랑하고 후회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 지옥에 간 부자를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자기 집에 남아서 장롱 속에 쌓아놓은 헌 이부자리 하나라도 왜 나사로에게 덮어줄 수 없었을까요? 자기 밥상에 있는 음식하나를 자기 손으로 주지 못하고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업과 돈벌기에는 바쁜데 자식과 아내를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업합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데 쓸 수 없는 돈이라면 그것이 저주요,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직업이라면 그 직업은 불행입니다.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인생이라면 사는 것이 고통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업과 명예와 성공은 악입니다.

원종수 권사의 간증집에 보면 "주님위해 쓸 수 없는 기술은 저주다. 주님을 위해 쓸 수 없는 돈은 저주다. 주님을 위해 쓸 수 없는 건강은 저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소유가 사랑하기 위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이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요 높은 위치는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최대의 실패는 사랑하지 못하고 산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고라도 사랑을 얻었다면 이는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9.11 테러가 있을 때에 보석 주머니를 가지고 보석 배달을 갔던 딸아이가 빌딩이 폭파되는 바람에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의 엄마는 빌딩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을 토하며 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딸아이가 피투성이가 되어 그 앞에 서서 엄마! 엄마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딸을 와락 끌어안을 때 "엄마, 미안해. 보석을 다 잃어버렸어." "아니다. 딸아! 너는 내 앞에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마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준 것이다."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 내 인생에 최고의 선물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을 내 곁에 두신 것은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3. 소망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후회가 없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대조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땅의 안락한 집을 자기 거처로 삼았고 육신의 양식으로 배불렸고 땅의 영광을 생의 전부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사로는 부자집 문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집의 장막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땅에서 먹은 양식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였습니다. 그것도 개가 먹고 남아야 자기의 것이 되는 정도였고 식모의 기분이 좋아야 얻어먹고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부자의 밥상을 부러워하지 않았고 탐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영원한 천국의 신령한 양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신령한 하늘의 만나에 배부름을 얻었던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 동안 얼마나 어려운 순간 순간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씨를 뿌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오늘 진정으로 감사하며 감사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런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들판에도 꽃이 있다. 지진이 난 땅에도 샘이 있다. 초토속에서도 풀은 돋아난다. 우리는 어떤 슬픔의 순간에도 쓰러지지 않고 사랑과 생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오늘도 우리는 꿈을 꾸며 기도하고 오늘도 감사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가졌다고 너무 기뻐하지 마시고 빼앗겼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이라도 불어 버릴 수 있고 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가뭄 때에 뿌리가 깊어지고 겨울 찬바람에 단단해 지는 법입니다. 진한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어머니는 자녀에 대해 진한 애정을 느끼게 되고, 부부는 고생스러운 일이 있을 때 함께 정이 드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섬기면서도 함께 고생을 해 봐야 정을 알고 은혜를 알게 됩니다. 목사와 교인이 정이 드는 것도 어렵게 교회를 섬겨봐야 그 맛을 압니다. 그래서 목사도 교인도 성전을 건축해 봐야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환난날에 망하는 사람이 있고 환난날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단후에 죽어 송장이 되어 나오는 사람이 있고 연단후에 정금같이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모조리 까먹고 나오는 사람이 있고, 금같은 믿음을 얻어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에게 어떤 소망, 어떤 꿈, 어떤 비전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인격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짧은 시간동안 교회를 섬겨 오면서 제 마음속에 분명한 한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 희생을 두려워하는 사람, 헌신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역사의 개척자가 될 수 없다.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통해 새 역사의 지평을 열어 가신다."

4. 감사의 씨를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여기에 한가지를 나는 더하고 싶다. 감사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감사는 마치 공으로 벽을 치는 것과도 같아서 감사하면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이 아프리카 미개한 곳에 가서 인디언들을 살펴보니 그들의 말을 다 번역할 수 있었는데 "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해줄 단어는 그들에게 없더랍니다. 감사를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생활이 미개하면 할수록 문화가 미개하면 할수록 생활이 육적, 영적으로 어렵고 어두울수록 감사가 없습니다.

동서독이 통일된후 그곳을 방문한 어떤 분의 얘기입니다. 구공산권 땅에 가보니 모두가 가난하고 얼굴엔 기쁨이 없고 모두 거짓말을 잘하고 그들 언어에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란 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세계여행을 하고 돌아온 우리나라의 어떤 사람은 세계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고 세계 무수한 언어들을 만났지만, 그 나라에 가서 '감사합니다' '실례합니다' 이 두 단어만 있으면 여행이 피곤하지 않더라고 간증했습니다.

카네기는 말하기를 "배은 망덕은 들풀과 같아서 가만히 두어도 자라나지만 감사는 장미와 같아서 계속 길러야 자라난다"고 말했습니다. 불평 불만은 가만히 두어도 자라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아무교육이 없어도 저절로 살아나고 돋아납니다. 그래서 자주 뽑아야 됩니다. 그러나 감사는 가만히 두면 자라나지 않습니다. 장미와 같이 자꾸 물을 주어야 감사의 꽃이 피어납니다.

인도 격언에 "호랑이를 왜 만들었는가 불평하지 말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쭈무라 간조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시간 우리를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으로 우리를 저주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한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막힌 귀로, 한정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가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메마른 심령으로 그들을 저주할 것이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 신앙이냐? 여러분에게 감사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합니까? 여러분의 감사의 표현이 얼마나 진실하냐?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사랑도 감사도 충성도 헌신도 이 땅에서 해야 합니다. 부자의 그토록 간절했던 애원도 지옥에서는 거절되고 맙니다. 지옥의 불행은 다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기도가 거절되어진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종국이라는 데 있습니다. 회개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해야합니다. 전도도 선을 행하는 일도 이 땅에서만 가능합니다. 돈을 천국에 가져갈 수는 없지만 돈을 먼저 보낼 수는 있습니다. 성전 건축에 아파트를 바치며 어떤 권사님은 "아파트야 네가 먼저 천국에 가 있거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VI. 고난 중에도

추수감사절은 구약과 신약 그리고 교회시대의 공통된 절기, 최고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세계가 11월 셋째주일을 감사주일로 지키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서 유래합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첫해에 곡식을 거둬들여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 날이 시초가 되어서 지금의 감사절이 된 것입니다. 1620년 12월 26일 미국 동북부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한 146명의 청교도는 상륙 즉시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비록 180톤밖에 안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들은 배를 주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 배의 속력은 평균시속 2마일 이어서 어떤 때에는 걷는 것보다 느렸습니다. 그러나 117일간을 항해하여 무사히 약속의 땅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을 감사했습니다. 항해중에 여러 사람이 죽었지만 몇 명의 아기가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큰 돛까지 부러질 정도의 풍랑을 만났으나 파선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여자 몇이 물결에 휩쓸려서 실종되었으나 구출된 것에 감사하고, 원주민의 방해로 한달여 항구를 배회했으나 마침내 호의를 얻어 무사히 상륙한 것을 감사하고, 삼개월반 동안의 고통스런 항해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원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인생항해에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 수록 오히려 큰 감사의 힘을 내어볼 때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감사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추수! 감사로 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수고한 날이 있고 거두는 날이 있습니다. 나도 너도 인생의 마지막 추수의 날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의 길을 다 피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 때문에 받고 얻고 누렸던 분복만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다 버리고 하늘 면류관 쓸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받아 누리기만 하다가 하나님 앞에 서시렵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고백시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다 피하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 위하여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다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골고다의 길, 영문 밖의 길, 주님 가신 길 내 따르오리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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